메뉴바로가기본문바로가기

동아사이언스

[강석기의 과학카페] 기생충과 건강수명

통합검색

[강석기의 과학카페] 기생충과 건강수명

2021.02.09 15:30
어린 시절 다양한 미생물에 노출돼야 면역계가 안정적으로 발달한다는 ‘위생 가설’은 그뒤 옛친구 가설로 다듬어졌다. 옛친구 가운데 기생충의 역할도 중요하다. PNAS 제공
어린 시절 다양한 미생물에 노출돼야 면역계가 안정적으로 발달한다는 ‘위생 가설’은 그뒤 옛친구 가설로 다듬어졌다. 옛친구 가운데 기생충의 역할도 중요하다. PNAS 제공

가족부터 국가에 이르는 모든 사회 단위가 ‘공동의 적’을 두는 덕분에 존재할 수 있다.
- 펠릭스 르 당텍

 

지난 가을 습진으로 한동안 고생했다. 어제 같은 오늘을 사는 생활임에도 어느 순간 증상이 시작됐고 한 달쯤 지나서 극적으로 사그라들었다. 그 사이 항히스타민제를 먹고 스테로이드연고를 바르기는 했지만, 오로지 약 덕분에 나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몸의 어디선가 “이제 그만 하지”라는 약의 권고를 따라 ‘이제 내 몸을 그만 괴롭힐까’라며 봐줬다는 느낌이다. 

 

감염으로 생기는 피부질환은 ‘외부의 적’인 병원체의 유형에 따라 이를 죽이는 항바이러스제나 항생제, 항진균제로 치료하지만, 습진이나 건선처럼 면역계 이상으로 인한 피부병에 대한 약은 ‘내부의 적’이 된 면역계의 흥분을 가라앉혀 정신을 차리도록 유도하는 게 고작이다. 

 

지난 수십 년 사이 필자처럼 내부의 적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이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론이 1989년 나온 ‘위생 가설’이고, 2003년 이를 다듬은 ‘옛친구 가설’이 나왔다. 위생 가설은 우리 주위가 너무 깨끗해지면서 할 일이 없어진 면역계가 예전 같으면 신경도 안 쓸 것들이나 심지어 자신의 몸을 적으로 인식해 달려들어 자중지란을 일으킨다는 이론이다. 

 

 

기생충은 옛친구?

'옛친구 가설'은 깨끗한 환경으로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된 ‘외부의 적’이 엄밀히 말하면 ‘옛친구’라는 이론이다. 인체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외부 생명체가 오랜 세월 함께 진화하면서 서로 적응해 친구라고 불러도 될 정도가 됐는데, 최근 수십 년 사이 급격한 환경 변화로 헤어지면서 옛친구를 잃은 인체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설명이다.

 

인체의 옛친구 하면 장내미생물이 떠오르지만, 기생충 가운데도 옛친구라 부를 만한 종류가 적지 않다. 인체 거주 미생물 무리를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이라고 부르는 것에 맞춰 인체 거주 기생충 무리를 매크로바이옴(macrobiome)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건강하려면 마이크로바이옴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다. 많은 의사들이 항생제 사용을 자제하고 있고 불가피하게 쓴 뒤에는 환자의 마이크로바이옴 생태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프로바이오틱스를 처방한다.

 

그런데 매크로바이옴에 대해서는 아직 별 관심이 없다. 현대식 농업과 구충제 복용으로 우리 몸의 매크로바이옴 생태계가 사실상 사라졌지만 이를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옛친구 기생충 무리를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물며 일반인들은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구충) 같은 기생충이 옛친구일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몇몇 기생충이 옛친구임을 보여주는 수많은 연구결과들이 나왔다. 매크로바이옴 옛친구의 부재가 오늘날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 만연의 배경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옛친구와 공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이런 관계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림프사상충이 만연한 인도의 한 지역에서 류머티스관절염(자가면역질환이다) 환자 207명의 혈액을 조사한 결과 전원 림프사상충 항원에 음성반응이 나왔다. 반면 대조군 222명 가운데서는 40%가 항원에 대해 양성반응을 보였다. 림프사상충에 감염된 사람은 류머티스관절염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감염이 무증상이 아닌 림프사상충증으로 이어지면 류머티스관절염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으므로 림프사상충이 결코 ‘푸근한 친구’는 아니지만 꽤 인상적인 결과다.

 

사실 기생충은 인체를 위하는 친구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인체의 면역계를 교묘하게 조정하는 능력을 가진 것뿐이다. 면역계의 신호전달체계를 교란해 공격력을 무디게 만드는 전략을 진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인체 역시 기생충의 공작에 대응해 면역계를 가다듬어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다. 인체의 면역계는 옛친구의 존재(조절 또는 방해)를 전제로 해 균형을 갖추도록 진화했다. 공을 찰 때 헛발질을 하면 제풀에 넘어져 다칠 수도 있듯이, 이들의 장기적인 부재가 오히려 면역계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말이다.

 

 

염증노화 질병 만연의 배경
설치류에 기생하는 사상충(사진)이 분비하는 당단백질 ES-62를 매주 투여한 생쥐는 염증노화가 억제돼 건강수명이 늘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milenia-biotech 제공
설치류에 기생하는 사상충(사진)이 분비하는 당단백질 ES-62를 매주 투여한 생쥐는 염증노화가 억제돼 건강수명이 늘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milenia-biotech 제공

국제학술지 ‘이라이프’는 2일 기생충 부재가 염증노화의 주된 원인일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리뷰논문이 실렸다. 염증노화(inflammaging)란 노화와 관련된 다양한 질병(심혈관계질환이나 치매, 암 등)의 배경이 되는 만성적인 염증으로 병원체 감염과는 무관하게 일어난다. 염증노화는 나이가 듦에 따라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지만, 저자인 영국 런던대 데이비드 젬스 교수는 옛친구의 부재가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기존 이론에 따르면 오늘날 염증노화 관련 질병이 만연하게 된 건 사회가 서구화되면서 식단이나 신체활동 같은 생활습관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옛친구와 결별하게 된 것도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실제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들은 염증노화의 주요 지표인 인터류킨-6, TNF-α 같은 사이토카인의 수치가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구충제로 기생충을 없애면 이들 사이토카인의 수치가 올라간다. 그렇다면 이런 효과가 누적돼 염증노화 관련 질병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지난해 학술지 ‘플로스 병원체’에 실린 한 논문을 보자.

 

영국 글라스고대 연구자들은 설치류에 기생하는 사상충이 분비하는 당단백질 ES-62가 염증노화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ES-62는 숙주의 면역계에 작용해 (기생충에 대한 공격인) 염증반응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서구식단(고지방 고당분)에 해당하는 사료를 먹인 생쥐에 일주일에 한 차례 ES-62를 투여했다. 그 결과 염증노화가 억제되면서 관련 질병의 발생률이 ES-62를 주지 않은 대조군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건강수명이 늘어났다는 말이다. 수컷의 경우는 기대수명도 12%나 늘어 대조군에 비해 평균 70일 이상 더 오래 살았다. 

 

분석 결과 ES-62는 다양한 작용을 통해 이런 효과를 낸 것으로 밝혀졌다. 먼저 숙주의 장세포가 인터류킨-22을 더 많이 분비하도록 유도해 장벽을 튼튼하게 했다. 나이가 들어 장벽이 느슨해지면 섭취한 음식물의 성분이 빠져나가 혈관을 타고 돌며 항원으로 작용해 면역(염증)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ES-62는 고지방 먹이 섭취로 인해 내장지방이 늘어나는 경향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방 조직, 특히 내장지방은 염증노화의 근거지로 다양한 염증 분자를 분비해 몸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설치류에 감염하는 브라질구충이 숙주의 STAT6 신호를 교란해 장내 포도당 흡수율을 떨어뜨려 비만을 억제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아마 ES-62도 비슷하게 작용할 것이다. 사람에서도 기생충 감염률이 비만 경향과 반비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비만이 급증하는 배경에는 서구식단 도입과 함께 기생충 퇴치가 자리할 것이다.

 

 

아직은 무대책

 

저자를 비롯해 옛친구 가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의 주장대로 우리의 면역계가 마이크로바이옴뿐 아니라 매크로바이옴(기생충)의 개입을 전제로 최적화되게 만들어져 있다면 이들 없이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나마 마이크로바이옴은 정도의 문제이고 프로바이오틱스 등 개선할 방법이 있지만 매크로바이옴은 유무(有無)의 문제라 몸 안에 이들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속수무책인 게 현실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인체에 피해가 미미한(가능한 무증상인) 기생충을 선별해 다시 몸 안에 살게 해 면역계를 안정화하는 방법이 떠오른다. 그러나 면역 관련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지 않는 한, 건강을 위해 몸 안에 벌레가 득실거리게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따라서 ES-62처럼 기생충에서 숙주의 면역계에 작용하는 물질을 찾아내 적용하는 연구가 실질적인 대안이 아닐까 싶다. 

 

시골에 살던 어린 시절, 구충제를 먹고 난 뒤 동네 아이들이 싼 똥에 회충이나 요충이 꿈틀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하다. 이런 광경이 사라진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니, 정말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나 보다.

 

※필자소개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9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관련 태그 뉴스

이 기사가 괜찮으셨나요?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댓글 0

18 + 2 = 새로고침
###
    과학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소개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고발 소재 등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