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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진화] 영아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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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진화] 영아살해

2021.01.10 06:00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서,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 《데미안》 헤르만 헤세

 

인류의 역사를 통해 어린 아이는 살해당할 위험이 가장 높은 집단이었다. 1세 미만에서 살해당할 위험이 가장 높다. 돌을 무사히 넘기면 살해 위험성이 크게 줄어들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되면 아주 낮아진다. 


전근대 시대니까 갓난아기를 훔쳐다 파는 일도 있었을 테고, 그러다 죽는 일도 잦았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다. 어린 아이를 죽이는 가해자 대부분은 바로 부모다. 자녀살해는 인간성의 어두운 측면이다. 헤세의 말처럼, 우리가 정인이 사건에 공분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 그런 본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죽이는 엄마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접경지대, 야오레오족은 수렵채집과 화전 농사를 겸하는 부족이다. 땅에 매여 있지 않는 삶을 산다. 이런 생활방식은 흔히 부계성을 약화한다. 혼인 연령이 되면 신랑은 신붓집에 들어가서 처가 식구가 된다. 


일반적으로 생활 환경이 척박할수록 배우자 선택에 관한 남성(혹은 남성 집안)의 선택권이 커진다. 야오레오족은 정반대다. 그래서 로맨틱한 연애가 흔하다. 여성은 남성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며, 여러 명의 남자를 만나 연애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연애는 종종 임신과 출산으로 이어진다. 

 

인류학자 폴 부고스와 로레인 맥카시의 연구에 따르면 야오레오족의 여성은 종종 출산 직후 아이를 매장했다. 출산 시기가 되면, 산파는 땅에 구멍을 두 개 팠다. 하나는 태반을 묻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아기를 묻는 곳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원치 않으면, 산파는 나뭇가지로 아기를 밀어서 두 번째 구멍에 넣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 의해 죽는 것이다. 


어떤 여성은 총 열 한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여섯 명을 땅에 묻었다. 다른 여성은 젊은 시절에 여섯 명의 남자를 만나 세 명의 아기를 임신했는데, 모두 땅에 묻었다. 스물네 살에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자, 더는 아기를 땅에 묻지 않았다. 

 

영아살해는 어머니의 연령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진화심리학자 마틴 데일리와 마고 윌슨은 어머니의 연령에 따라 영아 살해율이 감소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19세 미만의 어머니에 비해서 25세 이상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죽일 가능성이 5분의 1에서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진화적으로 영아살해는 현재의 번식 가치와 미래의 번식 가치 사이의 타협 과정에서 나오는 비극적인 선택이다. 영아살해는 수많은 동물에서 관찰되는 보편적인 자연 현상인데, 생애 초기에 집중된다. 양육자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경제적 여건,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의 건강 상태가 핵심 요인이다. 엄마의 연령이 어리고, 여건이 좋지 않으며, 아기가 건강하지 않다면, 미래의 기대 가치가 현재의 실제 가치를 압도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아이를 살해하는 행동이 진화한다. 

 

‘미개한 원시 사회’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러나 영아 살해는 문명사회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1974년부터 10년 동안 캐나다 경찰은 총 5444건의 살인 사건을 해결했다. 약 300여 건이 부모에 의한 자식 살해였다. 150명의 희생자가 한 살 이하의 영아였는데, 가해자 중 88명이 친어머니였다. 


게다가 영아유기는 직접적인 영아살해보다 더 흔할 것으로 추정된다. 아기를 쓰레기통이나 화장실에 버리는 식이다. 발각되지 않은 영아 유기는 추산할 방법조차 없다. 베이비박스에 넣거나 입양을 의뢰하는 경우는 ‘양호’한 케이스다. 사실 현대 사회의 세련된 영아살해는 주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 대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다. 그리고 카인의 차가운 칼끝은 종종 동생이 아니라, ‘자식’을 향한다.


재생산 가치

 

영아살해는 보편적이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자식을 죽이려는 부모보다는 그렇지 않은 부모가 훨씬 많다. 사실 친자식을 죽이는 관행은 상당수의 문화권에서 관찰되지만,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문화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번식 가치'라고 하면, 인간이 가축으로 취급되는 듯해서 불편하다. 재생산 가치라고 옮기기도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더 불편하다. 공장 기계가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왕자님, 공주님을 잘 낳아 키우는 아름다운 축복의 가치’라고 부를 수도 없다.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우리 연구실에서 쓰는 용어, 재생산 가치를 그냥 쓰자.

 

갓 태어난 자식의 현재 가치와 미래 가치를 고려하고, 이미 태어난 자식의 미래와 앞으로 태어날 자식의 미래 가치 사이에서 서로 저울질하는 비정한 행동이 진화했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살생부를 쓰는 냉혈한 부모를 연상하지 말자. 원초적인 감정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감정의 힘은, 이성보다 훨씬 강력하며 오래 지속된다. 거부하기 어렵다.

 

1950~1960년대 전후 한국은 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장남만 혹은 제일 똑똑한 자식만 공부를 시켰다. 한 놈만 고등학교를 보내고, 대학을 보냈다.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자식 중 한 놈이라도 출세해서, 형제와 조카를 돕기 바랬을 것이다. 손주 대에는 모두 원하는 공부를 실컷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말이다.

 

슬픈 이야기지만, 인류사 전체로 보면 호사스러운 고민이다. 교육은 생존의 문제라지만, 인류는 그보다 더 '직접적인' 생존의 문제에 시달려왔다. 플라이스토세 인류는 평균 4.8명의 자식을 낳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 명이 1세 이전에 죽었고, 또 다른 한 명도 요절했다. 자녀가 성공적으로 짝을 만나 손주를 안겨줄 가능성은 평균 1을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자칫하면 1 이하로 떨어진다. 구석기 시대 수많은 집안은 이렇게 점점 대가 끊겼고, 우리의 조상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의 직계 조상은 어떻게든 ‘재생산’에 성공했다. 때에 따라서는 자식에게 피와 살이라도 내어주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자녀를 차별하는 방식으로 재생산에 성공했다. 1950년 대 자녀의 대입 자격을 미리 집안 차원에서 사전전형했다. 최적의 자원 할당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조부모 세대, 아니 더 위 세대에서는 말 그대로 부모가 자식의 ‘생사’를 결정했다. 많은 아기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었지만, 헤아리기 어려운 수의 아기는 부모의 손에 죽었다. 그런 비정한 선택을 한 조상의 후예가 바로 우리다. 1세 미만의 아이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삼칠일이 지나야 세상을 볼 수 있었고, 백일이 지나야 겨우 이름을 얻었다. 심지어 왕의 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돌이 지나야 겨우 세자에 책봉될 자격을 얻었다.

 

신데렐라 증후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기 자식이다. 영아 살해는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의 선택이다. 기쁜 마음으로 자녀를 차별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살해하는 부모는 없다. 설령 그런 이상한 형질이 있었다고 해도 아주 오래 전에 진화의 낫에 의해서 베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바로 신데렐라다. 

 

신데렐라는 원래 재투성이라는 뜻이다. 친어머니는 죽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들였다. 맨날 구박을 받으며 난로를 청소했다. 재투성이 아가씨는 온통 재가 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집안에서 일만 했다. 주변에는 호박과 시궁쥐 뿐이었다. 여기까지는 현실이다. 요정이 나타나 호박으로 마차를, 시궁쥐로 백마를, 누더기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주지만 여기부터 환상이다. 

 

횡문화적 연구에 따르면 영아살해의 가장 심각한 위험요인은 바로 의붓아버지와 의붓어머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경우는 강간이나 간통으로 태어난 자식이다. 수많은 전통 사회에서 아버지는 아내가 부정하게 낳은 자식을 죽였다. 재혼을 위해서 이전 남편과 낳은 아이를 죽여야 하는 사회도 있다. 많은 문화권에서 여자가 먼저 ‘정리’에 나선다. ‘백년해로’할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이가 아니라면 대개 조기에 처리되곤 했다.

 

강간이나 간통보다는, 재혼이 더 흔하게 문제를 일으켰다(아니면 더 쉽게 드러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재혼은 종종 의붓가정을 만든다. 아이는 어린 시절에 새어머니 혹은 새아버지를 맞게 된다. 1970년 대에 이루어진 한 연구에 의하면, 양부모 밑에서 사는 아이가 치명적 학대를 당할 위험은 친부모와 사는 아이에 비해 무려 100배에 달했다. 신데렐라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동화와는 뒷부분이 다르다. 현실 세계에는 요정도 없고, 왕자의 무도회도 물론 열리지 않는다.

 

여덟 어머니

 

부모는 다 똑같은 부모가 아니다. 자신의 여건, 그리고 아기의 여건에 따라 ‘내리사랑’의 정도가 달라진다. 한 끝에는 헌신적인 부모가, 다른 끝에는 아기의 생명을 직접 종결하는 부모가 있다. 게다가 친부모만 부모가 아니다. 계부모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계부의 약 절반, 그리고 계모의 약 25%만 의붓자식에게 부모로서의 정을 느낀다고 했다. 사랑한다는 계부모는 더 적었다. 부모의 사랑은 분명 위대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차가운 진실은 너무 차가운 것일까? 친부모가 아니어도, 친부모로 간주하려는 문화가 있다. 자녀를 입양하여 키우는 훌륭한 분이니, 묻지도 따지지 말고 무조건 친부모의 자격을 주어야 한다는 것일까? 분명 입양은 정말 위대한 선택이다. 그러나 친부모와 똑같다고 ‘취급’해버리면 곤란하다. 앞서 말한대로 양부모를 둔 아이가 심각한 학대를 당할 가능성은 친부모를 둔 아이에 비해 100배에 이른다. 입양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 시대에는 친모(親母) 이외에도 여덟 종류의 어머니가 있었다. 먼저  적모(嫡母). 첩의 소실에게 아버지의 정실부인은 적모다. 계모(繼母)는 어머니가 죽은 후, 뒤를 이어 아버지의 아내가 된 어머니를 말한다. 요즘에는 흔히 새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리고 양모(養母)는 양자가 되면서 얻은 어머니를 말한다. 서모(庶母)란 아버지의 첩이다. 자모(慈母)는 아들이 자식이 없는 아버지의 첩을 어머니처럼 모시는 경우를 말한다. 첩이 적실의 아이를 키워주는 경우를 말한다. 가모(嫁母)란 아버지가 죽은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한 어머니를 말한다. 출모(出母)는 집안에서 쫓겨난 어머니다. 유모(乳母)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젖을 주며 키워준 어머니다. 

 

왜 이렇게 복잡한 ‘어머니 제도’가 있었을까? 우리는 친모만 '진짜' 어머니로 생각하지만, 세상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혼도 하고, 재혼도 하고, 입양도 하고, 파양도 한다. 축첩제도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아기가 불륜의 결과로 태어난다. ‘다양한’ 어머니가 생긴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다양한 어머니를 모두 ‘어머니’로 대우했다. 하지만 여덟 어머니에 대한 대우가 같지는 않았다. 낳아준 어머니, 키워준 어머니, 입양된 집안의 어머니, 아버지의 아내로서의 어머니,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어머니, 아버지의 첩으로서의 어머니, 집을 떠난 어머니, 심지어 보수를 받고 젖을 주며 키워준 어머니. 모두 어머니지만, '다른' 어머니다.

 

학대로 숨진 정인이는 생후 8개월에 입양됐다고 한다 그리고 생후 16개월이 되던 지난 해 세상을 떠났다. 정말 슬픈 일이다. 양부모는 법의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양부모를 악마화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아동학대와 영아살해는 인간성의 본성이다. 욕한다고 없어지지도 않고, 외면한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인간 본성에 기반한 입양 제도가 필요하다. 친자 확실성과 아기의 건강 상태, 부모의 사회경제적 여건과 가족 구조, 혼인 상태 등 검증된 진화인류학적 요인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입양 가정에 대한 심사와 감시를 강화하면, 입양률이 줄어든다는 걱정이 있다. 일부 사례를 전체로 확대하면, 양부모에 대한 편견이 강화된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양부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우려가 정말 현실적인 것인지 양부모에게 물어본 적 있는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온몸으로 거스르며 입양이라는 위대한 결정을 내린 양부모라면, 오히려 입양 가정에 대한 엄격한 사전 심사와 지속적인 모니터링에 찬성할 것이다. 자신이 입양한 한 명의 자식 외에도, '수많은 다른 자식’을 보호하는 효과적 방법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인류가 아직 인류가 아닌 시절부터 영아 살해는 늘 있었던 ‘생물학적 현실’이다. 자연의 세계에 만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이 원인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는지 조금은 알고 있다. 영아 학대와 살해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도 많고, 관련된 책도 많다. 다만 ‘부모가 자식을 살해한다는 사실’이 불편하여 잘 읽히지 않을 뿐이다. 

 

‘희생적인 부모님’이라는 낭만스러운 이상화된 이미지에 의존해서 누구나 입양 아동을 잘 돌볼 것이고, 잘 돌봐야 한다고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그동안 사랑만으로 아이를 입양한 수많은 양부모가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관심과 지원은 아주 부족했다. 한국에선 그간 수많은 아이들이 '수출'됐다. 그러다가 갑자기 분노해서 ‘사형하라’를 외치는 얄팍한 심리는 아쉽다. 우리는 모두 여건이 나빠지면 아이를 학대하거나 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진화적 소양’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는 많은 종류의 ‘어머니’가 있다. 그런데 현대인의 마음속에서는 정신세계는 그냥 ‘위대한 친어머니’라는 이상화된 심상으로 모두 뭉뚱그려지고 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성녀 같은 어머니다. 아기를 낳으면 자동으로 부여되는 자격이자 의무다. 거부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 '고귀한' 의무를 내버리면 곧바로 천인공노할 나쁜 어머니, 모성애를 내다버린 사이코패스다. 터무니없는 신경증적 이분법이다. 

 

조선시대에는 여덟 어머니가 있었다. 각각의 어머니에게 기대하는 사랑도 달랐고, 보여주는 관심도 달랐다. 물론 어머니 각각의 의무와 권리도 모두 달랐다. 모두 귀한 어머니지만, 분명 똑같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인류학 및 진화의학을 강의하며, 정신장애의 진화적 원인을 연구하고 있다. 동아사이언스에 '내 마음은 왜 이럴까' '인류와 질병'을 연재했다.  번역서로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행동과학》,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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