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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서재]"본캐는 연구원, 부캐는 독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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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서재]"본캐는 연구원, 부캐는 독서광"

2020.10.23 14:43
이정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의료정보연구실 선임연구원

 

 이정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대전 유성 집 거실 한켠에 마련한 자신의 서재를 소개하고 있다.
이정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대전 유성 집 거실 한켠에 마련한 자신의 서재를 소개하고 있다.

[편집자주]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버리는 것과 같다”는 속담처럼 과학에서는 과학자 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 학문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과학자 한명 한명이 학문의 다양성을 대표하고 이들이 사라지는 것은 곧 다양성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동아사이언스는 과학자들의 은밀한 사적 공간이자 창의성을 발휘하는 공간인 서재를 360도 촬영이 가능한 가상현실(VR)카메라를 들고 들어가봤습니다. 서양의 저택에 있는 거대한 서재를 기대하셨을 분도 있지만 과학자들의 일상 공간인 연구실 한 켠에, 또 집 거실 한 켠에 마련된 소박한 공간입니다. 과학자들은 이 단조롭고 소박한 서가에 꽂혀있는 책에서 연구를 계속할 창의성과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삶의 활력을 찾는다고 합니다. 다섯 명의 과학자들의 일상과 책 이야기를 VR사진과 동영상으로 소개합니다.

 

이정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선임연구원은 의사가 진단에 사용하는 컴퓨터단층촬영장치(CT)나 자기공명영상(MRI) 장치 같은 장비로 환자를 촬영하고 상태를 분석해 진단을 하는데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X선 영상 기술은 공항이나 항만 등에 보안 검색 기술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 선임연구원은 서울대에서 전자공학과 의공학, KAIST에서 신경과학을 공부했다. 주변에선 그를 전형적인 ‘공돌이’라고 부른다. 대학생 때는 보통의 공대생처럼 책을 좋아하지 않았고, 재즈, 락, 힙합 음악에 빠져있었다. 이 연구원이 독서에 매료되기 시작한 건 15년 전 대전에 정착해 독서 모임을 시작하고부터다. 지금은 이 독서 모임의 운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내 ‘ETRI 독서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9년 11월부터는 서울의 독서 클럽인 트레바리의 클럽장을 맡아 ‘내 인생의 조각 모음’이라는 모임을 이끌고 있다. 거실 한 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서재 앞 테이블에 앉아 이 연구원과 책과 서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인공지능을 연구한다. 취재 요청이 왔을 때 재밌는 기획이라고 생각했고, 한 번쯤 책을 소개하는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반가웠다. 거실 서재를 비롯해 올해 무지개색으로 책을 배열해 만든 ‘무지개 책장’을 소개할 수 있어서 좋은 추억과 기념이 될 것 같다.

 

Q. 나의 서재를 요약해서 소개하면


거실 서재와 무지개 책장을 비롯해 방 안팎과 베란다에도 책장이 있다. 거실 서재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이 집에 이사 오면서 만들었다. 집에 들어서면 서재가 먼저 눈에 들어오다 보니 인테리어적인 역할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책이 예뻐 보였으면 하는데, 책 위에 공간이 있으면 보기 싫고 앞 공간이 있으면 물건을 올려두게 되지 않나. 거실 서재의 경우 서재 칸을 책 판형에 맞게 직접 짰다. 무지개 책장은 컬러링에 일가견 있는 아내의 지도 아래 책을 색별로 모아 그라데이션이 되도록 배열해 만들었다.


책 권 수는 직접 세보진 않았다. 가끔 아이들이 재미 삼아 세곤 하는데 대략 2000권 정도 있는 것 같다. 꽂을 데가 없어 400권 정도 버려서 이 정도다. 책을 안 산지도 꽤 됐다. 요즘 책값도 비싸졌지만, 책을 위한 공간이 더 비싼 셈이다. 

 

▲360도로 '과학자의 서재' 를 볼 수 있습니다

Q. 언제부터 책을 좋아했나


학생 때까지 책을 많이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대전에 내려와 ‘백북스’라는 독서 모임에 갔는데 ‘생명 최초의 30억 년’이라는 책으로 토론하고 있었다. 책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진지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고 문화 충격을 받았다. 그전까지 30억 년이란 시간을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고, 그 시간 동안 발생한 생명의 역사에는 더더욱 관심 없었다. 내가 너무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아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Q. 주로 어떤 책을 읽나


시기마다 천차만별이다. 뭔가에 꽂혀있을 때 그것과 관련된 책을 모으기 때문에 다양한 장르를 읽는다. 거실 서재를 보면 위에는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진화, 신경과학 분야이고, 밑에는 심리학 중에서도 행복에 관한 책, 그 밖에 수학, 음악, 철학, 역사, 문화유적답사, 미술에 관한 책도 있다. 요즘에는 과학사나 과학철학 관련 책을 읽고 있다. 

 

‘이런 책을 읽으면 연구에 도움이 되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뇌과학에 관심이 많아 예술과 신경과학을 융합하는 책을 읽고 강의도 하지만, 독일 화학자 아우구스트 케쿨레가 꿈에서 영감을 받아 벤젠 고리를 발견한 것처럼 책에서 ‘영감’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속마음을 파악하고 동기부여 하는 방법처럼 연구 프로세스에 필요한 점을 배운다. 

 

예컨대 심리학 관련 책을 보며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이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할 수 있지만 여러 선택지 중에 고른 결과인지 파악하는 법을 배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한정적이고 궁금한 점을 속속들이 물어볼 수도 없으니 과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어요’라는 말이 퍼진 걸 보면 책으로 배운 지식이 웃음거리가 되는데 배울 수만 있다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 책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고 내 방식대로 적용해보는 걸 좋아한다. 책은 실용적으로 읽는 편이다. 

 

Q. 책을 읽을 때 자기만의 철칙이 있다면.


일상을 기록할 때나 책을 읽을 때나 ‘밀도’를 높이는 일을 즐긴다. 책에 담긴 정보 중 내게 필요하거나 공감되는 정보를 골라 몇 개의 목록으로 만들어 부피를 줄이면 두꺼운 책도 30분이면 내용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 때문에 펜으로 줄을 치며 읽는다. 지금까지 읽은 책을 보면 전부 똑같은 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다. 줄을 안 치면 불안하다. 


또 하나는 한 주제에 관한 여러 책을 읽는 거다. 근거가 충분해야 설득되는 편이라 어떤 주제에 대해 평가가 좋은 책을 한꺼번에 사서 여러 관점을 살펴본다. 

 

Q. 자녀가 책을 왜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아직 자신이 없어서 설득하지 않고 있다. 책 이외에도 지식을 전달하는 좋은 수단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분명 책만이 가지는 깊이가 있어서 뭔가를 깊이 공부하고 싶을 때 책을 읽으면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보통 책 한 권을 3시간, 긴 책은 6시간이면 읽는다. 보통 30년 정도 고민한 지식이 담긴 책이 굉장히 많은데 그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시간은 짧은 편이다. 이렇게 정보의 밀도가 높기 때문에 가볍게 읽거나, 하나하나 따져가며 볼 수도 있어 내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뭔가 깊이 공부하고 싶으면 책을 읽는 게 효과적인 것 같다. 

 

Q. 앞으로의 계획은

 

거창한 꿈이나 계획이 없다. 재밌는 게 많고 그때그때 할 일도, 찾는 사람도 너무 많다. 지금은 그것만 해도 즐거운 상황이라 나중은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있다. 'ETRI 게임이론연구회(GTA)'를 만들 정도로 바둑이나 카드 게임 '마이티’ 같은 퍼즐과 게임을 좋아하는데, 마이티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일을 하고 싶다. 

 

트럼프로 즐기는 마이티는 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과 논리적인 대화가 필요한 세상에서 가장 전략적인 게임이라 워낙 좋아한다. 과거 마이티 매니아들과 함께 삼청동에 있는 과학책방에서 마이티에 관한 워크샵을 한 적도 있다. 인공지능을 이용해 마이티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홈페이지를 하나 만들어놨고 관련 논문도 썼다. 올해 말 한국게임학회에서 출판되길 기다리고 있다.

 

Q. 나를 바꾼 책

 

고민이 많이 되는데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를 꼽겠다. 잘 쓴 책과 내게 영향을 준 책은 다르다. 잘 쓴 책은 읽는 시간 동안 영향을 주지만, 영향을 주는 책은 행동을 바꾼다. 이 책은 의미 있는 일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습관을 만들어 준 책이다.

 

이 책은 러시아 물리학자인 알렉산드르 류비셰프의 유고에서 나온 '시간 통계'라는 노트 시간을 잘 관리하기 위해 고안한 '시간통계' 노트를 토대로 류비셰프의 철저한 시간 관리 비법을 알 수 있는 책이다. 류비셰프는 과학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진 않았지만, 적어도 자기가 예술과 문학을 비롯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풍부하게 하는 위대한 삶을 살았다. 비결은 56년 동안 자기가 쓴 시간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나도 10년째 매일 겪은 의미 있는 경험 10~15개를 목록으로 정리한다. 이 목록을 1년 치 모아보면 많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많고 나 스스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긴 시간을 돌아보면 짧게 느껴지지만, 이 목록을 보면 내 인생을 풍요롭게 회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헛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 드는 허망한 마음을 위로가 된다. 이 책은 10년 동안 지속한 습관을 만들어준 책이다. 

 

이정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대전 유성 집 거실 한켠에 마련한 자신의 서재를 소개하고 있다.

이정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대전 유성 집 거실 한켠에 마련한 자신의 서재를 소개하고 있다. VR카메라로 이 선임연구원의 서재를 촬영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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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실감형기획취재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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