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한가운데 삶의 현장을 만나다

2015.11.12 15:37
태평양해양연구기지를 찾은 열대해양체험단


‘충격과 공포’. 축주의 첫 인상은 꼭 그랬다. 숨이 턱 막히는 덥고 습한 공기는, 그래도 예상한 바였다. 짧기로 유명한 활주로에서 비행기는 문자 그대로 급정거했고, 활주로 옆 철조망에 다닥다닥 붙어 서서 일행을 뚫어져라 구경하는 현지인의 시선은 사뭇 두려웠다. “직업이 딱히 없는 현지인들이 많습니다. 하루 한 번씩 비행기에서 내리는 외지인을 보려고 저렇게 몰려드는 거예요.” 동행한 최영웅 해양과기원 선임연구원이 말했다.
뒤로도 첩첩산중이었다. 8km에 불과한 기지까지 가는 데 차로 40분이 걸렸다. 아스팔트로 대충 포장했던 길이 얼마 전 축주를 강타한 태풍에 깊숙이 패였기 때문. 도로변 곳곳엔 온갖 쓰레기와 폐차가 방치돼 있었다. UN 지정 최빈곤국이라는 말이 새삼 실감났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손잡이를 움켜잡으며 기자는 생각했다. ‘아냐, 이럴 리 없다. 무언가 엄청 아름다운 게 숨겨져 있을 거야.’ 의문은, 머잖아 풀렸다.

먼 섬에서 전쟁의 상흔을 마주하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답게 체험단원들은 기지에 도착하자마자 무선인터넷 접속 비밀번호를 물었다. 이순길 기지대장은 “XX 뒤에 우리나라가 광복한 해를 넣으면 된다”고 말했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친구들이 이내 기자를 쳐다봤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이야.” 일행은 곧 무선인터넷에 접속해 가족, 친구들과 안부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웨노섬을 포함한 축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격전지였다.
지금도 섬에는 벙커부터 해안감시탑까지 구 일본군이 남긴 방어시설이나 잔해를 종종 볼 수 있다.


축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한국인 3000여 명도 강제 징용돼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숨을 거뒀다. 그러고 보니, 기지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익숙한 양식의 석불좌상을 본 기억이 났다. 최 연구원은 “이 기지는 애초에 리조트였는데, 이를 지은 한국인 사업가가 한국인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위령비”라고 설명했다. 이석은 양(청심국제고 3)은 “이 아름다운 섬에 그토록 아픈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며 “한국에 돌아가면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해군은 축주에서 전쟁 마지막까지 연합군과 싸웠다. 축주의 자랑거리인 거대한 ‘환초’가 당시 연합군의 진입을 효과적으로 막는 방패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환초는 거대한 고리 모양의 산호초다. 바다에 우뚝 솟은 화산섬 주위로 산호가 자라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화산섬이 가라앉고 산호만 남은 것이다. 축 환초는 지름이 40km, 둘레가 무려 224km에 달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 태평양을 향해 단 한 곳만 열려있는데, 전쟁 당시 연합군이 이곳을 막으면서 일본군이 패했다. 그때 바닷속으로 침몰된 일본 함선에 산호가 자라면서 색다른 정취를 만들어냈다. 현재 축은 세계 3대 다이빙 포인트로 꼽힌다.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산호초지만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체험단은 축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바다에서 매일 스노클링을 하며 아픈 역사를 간직한, 그러나 더없이 아름다운 열대바다를 만끽했다. 온갖 종류의 산호가 눈을 사로잡았다. 최 연구원은 “산호는 해양동물들의 아파트”라며 “물 속에서 산호를 부수거나 물 밖으로 갖고 올라와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자포동물인 산호가 탄산칼슘으로 뼈대를 만들면, 식물 플랑크톤이 안에 들어가 산다. 식물 플랑크톤이 만들어내는 산소와 산호가 낳는 알(물고기의 먹이가 된다) 덕분에 산호 근처에는 다양한 해양생물이 모여 늘 북적댄다. 완벽한 수영 실력을 뽐냈던 강민주 양(백석고 1)은 해삼을 건져 올리기도 했다. 호두를 길게 잡아 늘인 것처럼 생긴 해삼은 두 손을 한 가득 메울 만큼 컸고, 예상과 달리 딱딱했다. 강 양은 얌전한 말투로 “너무 예쁘다”며 “사람 뇌를 떼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말해 듣는 이들을 놀래켰다.

“태평양 바다 색깔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해양조사선 ‘라군드림’을 타고 나가서 만난, 보다 깊은 바다는 태평양의 아름다움을 함축해 보여줬다. 일렁이며 햇빛을 반사하는 짙푸른 수면은 마치 고운 비단 같았다. 수평선에 걸린 흰구름과 검은 섬 그림자를 배경으로 은빛 날치들이 햇빛을 부수며 수면 위를 날았다. 일행을 통틀어 호기심이 가장 많고 대담했던 김아영 양(강서고 1)은 “바닷물 색깔이 꼭 포카리XXX 음료수 같다”며 “마셔보면 안되냐”고 물었다.

바다 밑바닥에 빽빽히 깔린 산호의 잔해 위로 스노클링을 즐기는 체험단원들


처음엔 스노클링을 무서워하던 단원들도 날이 갈수록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잠영을 배운 뒤부터는 ‘물 만난 고기’ 마냥 바다를 누볐다. 공기통 없이 맨몸으로 잠영했기 때문에 기포에 물고기들이 놀라 달아나는 일도 없었다. 짧은 양 지느러미를 빠르게 흔들어 ‘정지유영’을 하면서 사람을 똑바로 쳐다봤다. 손을 뻗으면 새침하게 산호 속으로 숨었다.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경북 울진군에서 온 서인혜 양(울진고 2)은 “바다 근처에 살지만 스노클링이나 다이빙을 배우는 친구들은 거의 없다”며 “태평양 바다의 아름다움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유성은 양(경남 거제고 3)도 “예쁜 바다에 숨통이 트여 집에 가기 싫을 정도”라고 했다. 곧바로 중간고사라며 가방 잔뜩 갖고 온 책은, 물론 꺼내지도 않았다.

배를 타고 찾은 맹그로브 숲


맹그로브와 잘피도 관찰할 수 있었다. 맹그로브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바닷물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열대 나무다. 육지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오는 오염 물질을 1차로 걸러 바다를 깨끗하게 유지해준다. 깨끗한 물에서만 살 수 있는 산호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인 셈이다. 잘피는 일종의 조류로, 맹그로브에 이어 2차로 육지의 오염물을 거른다. 최 연구원은 “잘피밭은 새끼 물고기들의 인큐베이터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저녁에는 세미나가 이어졌다. 낮에 거대 그물로 건져 올린 물고기를 해부했다. 여학생 남학생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물고기 내장을 하나하나 분리하고 새끼손톱보다 작은 뇌를 척척 찾아냈다. 특히 늘 말이 없고 얌전했던 정의원 군(강원 정선 여량고 2)이 몹시 열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시종일관 장난을 치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던 한정협 군(제주 대기고 1)도 섬세한 손재주를 뽐냈다. 최 연구원은 “해부하는 솜씨를 보면 실제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단원들은 바다에 나가기 어려운 밤에는 물고기를 해부하거나 플랑크톤을 관찰했다.


한밤중 플랑크톤 관찰도 이어졌다. 김종훈 해양과기원 기술원이 비커 한 가득 바닷물을 담아 흰 천에 걸렀다. 플래시를 비추자, 발광기관을 갖춘 동물 플랑크톤을 맨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플랑크톤은 바다 생태계의 근간이다. 식물 플랑크톤이 광합성을 통해 바닷물 속 무기물을 유기물로 바꾸면 초식동물이 그걸 먹고 산다. 식물 플랑크톤은 동물 플랑크톤의 먹이다. 체험단원들은 현미경을 한참 들여다보며 다양한 형태의 동물 플랑크톤을 하나하나 따라 그렸다.

바다를 아끼고 지키는 사람들이 이곳에 있다
최 연구원은 “태평양 바다를 연구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며 “그래야 해양과학이 더 발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정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일행의 안전을 책임지며 스노클링과 잠영을 가르친 정대훈 국립영덕청소년해양환경체험센터 교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바다가 우리와 결코 멀지 않다는 걸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서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해양생물학자가 꿈인 최세진 군(경기 파주 한민고 1)은 “인터넷으로는 알 수 있는 게 제한적인데, 이곳에 와서 눈으로 해양생물을 보고 궁금한 점은 박사님께 직접 여쭤볼 수 있어서 정말 값진 시간이었다”며 “연구원 생활은 내가 꿈꿔온 미래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최 군은 최 연구원의 노트에 “박사님은 제 롤모델이에요. 나중에 꼭 다시 봬요”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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