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 동영상 촬영해 물질의 3차원 구조 밝힌다

2015.01.16 00:00
"분자 동영상(molecular motion picture)을 촬영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할 계획입니다." 얼마 전 IBS 분자분광학 및 동력학연구단의 단장으로 선정된 고려대 화학과 조민행 교수는 연구단을 소개하면서 분자 동영상이란 말을 꺼냈다. 분자 동영상에는 사람보다 1억분의 1 또는 10억분의 1만큼이나 작은 분자들이 '배우'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분자는 포착하기 쉽지 않다. 작은 것도 문제지만, 작고 가벼우니까 빨리 움직이는 것도 동영상 촬영의 장애물이다. 조 단장은 이런 장애물을 뛰어넘고 분자 동영상을 찍을 실험도구를 개발하는 것이 연구단의 첫 번째 목적이라고 밝혔다. 연구단에서 분자 동영상은 왜 찍으려고 할까.
 
 
1조분의 1초의 분자 움직임을 보려면
맨 위에 조민행 단장이 2009년 저술한 '2차원 광학분광학(Two-Dimensional Optical Spectroscopy)'이 놓여 있다. 이 책은 다차원 분광학 분야에서 중요한 참고서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상현
"화학은 분자, 단백질, 핵산 등의 물질에 관심이 있는데, 물질의 기능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물질의 3차원적 구조를 아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구조를 규명하는 도구를 개발하는 것이 추세였다면, 앞으로는 생물학적 분자 같은 나노 규모 분자의 3차원 구조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그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연구가 중요해질 겁니다."
 
조 단장은 생물학적 분자가 고유한 기능을 하려면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데, 그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연구단은 이런 움직임을 보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를 개발할 계획이고, 이 실험 도구를 이용해 단백질, 핵산 등의 움직임처럼 중요한 생물학적 현상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
 
분자동력학이란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분자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순간 포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조 단장은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보려는 분자는 1조분의 1초라는 시간 규모에서 움직이는데, 이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짧은 시간 분해능을 가진 장비가 필요하다"며 "그래서 분자의 움직임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기 위해 1000조분의 1초 간격으로 '반짝이는' 펨토초 레이저 펄스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펨토초 레이저 펄스는 카메라에서 사진을 선명하게 찍기 위해 터뜨리는 플래시에 비유될 수 있다.
 
 
다차원 분광학의 개척자
조 단장은 국내 최초로 다차원 분광학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 분야를 개척한 권위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차원 분광학이란 무엇일까. "차원이란 우리가 보는 관점의 숫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코끼리를 본다고 할 때 왼쪽, 앞쪽, 위쪽에서 관찰하는 경우 눈에 보이는 형태가 다르잖아요. 이전에 1차원 분광학은 코끼리를 관찰하는 데 오로지 한쪽 측면에서만 했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다차원 분광학입니다."
 
다차원 분광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조 단장이 생각에 잠겨 있다. 배경에 있는 모니터에는 측정된 분자 스펙트럼이 보인다. ⓒ김상현
그는 또 "분광학적으로 분자 구조를 볼 때 하나의 변수보다 여러 개의 변수를 임의로 조절할 수 있으면 그 분자에 대한 정보를 많이 끄집어낼 수 있다"며 "즉 분자의 구조, 시간에 따른 변화(동력학)에 대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변수가 2개인 경우는 2차원 분광학이 적용되는 상황이다.
 
사실 다차원 분광학적 방법은 핵자기공명(NMR) 분광학 분야에서 먼저 시작됐다. 그런데 이 방법을 가시광선이나 적외선 분야로 확장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굉장히 어려웠다. 1990년대 펨토초 레이저 펄스를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돌파구가 열렸다. 1998년경 2차원 분광학 실험이 진행됐고, 그때쯤 조 단장은 다차원 분광학의 이론적인 실현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다차원 분광학은 화학 분야에서, 특히 분자 구조를 밝히는 데 있어서 굉장히 혁신적인 접근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야가 1990년대 시작됐다고 보고 있는데, 그 무렵 저도 다차원 분광학을 중요한 도구로 인지하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 단장은 2009년 다차원 분광학 분야에서 중요한 참고서 중 하나인 '2차원 광학분광학(Two-Dimensional Optical Spectroscopy)'을 출판했다. 그는 "과학에서 새로운 분야의 가지(branch)가 만들어지면 5~15년 동안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다가 어느 정도 성숙 단계로 접어들면 중요한 책이나 리뷰 논문이 출판된다"며 "이 책은 다차원 분광학 분야에서 출판된 첫 번째 책"이라고 설명했다. 그 다음에 나온 책은 2011년에 케임브리지에서 출판된 '2차원 적외선분광학의 개념과 방법(Concepts and Methods of 2D Infrared Spectroscopy)'이란 책이다. 조 단장은 2011년 책이 실험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기술적 측면에서 다차원 분광학을 다룬 반면, 자신의 책은 좀 더 이론 쪽에 가까운 측면에서 다차원 분광학의 원리를 조명했다고 밝혔다.
 
"저 나름대로는 다차원 분광학을 모르는 대학원생이나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적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주는 이론을 완성했다고 평가합니다. 1990년대부터 10~15년간의 연구를 정리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정표를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많은 연구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복잡하고 정교한 실험방법, 또는 이론적 도구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한편 NMR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리하르트 에른스트(1991년 노벨화학상), 쿠르트 뷔트리히(2002년 노벨화학상) 등도 자기 분야에서 중요한 책을 출판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에른스트는 고분해능 핵자기공명 분광학을 개발해 NMR 분야를 개척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화학, 물리학, 생명과학 분야의 학제간 연구 꿈꾼다
서울대 화학과 석사과정에서 유기 화합물을 합성하는 실험 연구를 한 그는 미국에 유학 갔을 때 화학 현상의 근본원리를 규명하는 데 관심이 컸기 때문에 사카고대 그레이엄 플레밍 교수 밑에서 극초단분광학을 연구했다. 1996년 국내에 들어와 고려대에 자리를 잡을 때 다차원 분광학이라는 방법이 생명 현상에 관여하는 복잡한 분자들의 연구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다차원 분광학 연구를 시작했다. 그동안 '네이처'를 포함한 국내외 학술지에 약 20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다차원 분광학 장비로 측정한 스펙트럼 신호를 어떻게 분석하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 이론적 모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론적 모형이라는 '번역기'를 통해 분자의 구조, 움직임(동력학), 자기적․전기적․광학적 특성 등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대 화학과에 있는 레이저 실험실에서 연구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 단장. 연구단 ⓒ김상현
2009년에는 광학이성질체의 분자 구조, 즉 키랄 구조를 규명하기 위한 측정법을 개발해 '네이처'에 발표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생물학적 분자, 인체 속 분자는 일정한 입체성을 띠는 구조인 키랄 구조(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겹치지 않는 구조)를 갖는데, 이런 입체구조는 굉장히 짧은 시간에 달라지고 그 신호도 너무 작아 문제였다. 조 단장은 "과거에는 분자들의 평균적인 움직임만 볼 수 있을 뿐, 각 분자를 실시간으로 보지 못했다"라며 "펨토초 레이저를 이용해 생체 분자의 3차원 구조를 실시간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도구를 개발했다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 논문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은 "다차원 분광학 분야에서 새로운 가지(branch)를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조 단장은 "자연과학에서는 실험 도구나 실험 방법(분석방법, 측정방법)을 새로 개발하는 것이 영향력이 크고 많은 기여를 한다"며 "다차원 분광학 분야에서 개발한 도구가 화학 분야뿐 아니라 전혀 다른 분야의 심오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분자의 입체구조를 밝혀낼 수 있는 실험 도구인 라만 광학활성(ROA) 측정장비를 화성에 보내 생명체 탐사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연구단은 작은 분자를 실시간으로 관찰하기 위한 실험 도구들을 개발할 계획이다. 조 단장은 "앞으로 2, 3년 후 5개 정도의 독자적 연구그룹을 연구단 내에 만들고 싶다"며 "화학 분야뿐 아니라 물리학, 생명과학 분야에서도 부단장급을 뽑아 긴밀한 네크워크와 토론을 통해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 단장이 이끄는 연구그룹은 다차원 분광학이란 도구를 개발하는 데 집중할 예정이며, 다른 분야의 연구그룹은 2014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던 분야인 분자 이미징 등을 활용해 연구할 계획이다.
 
연구단에서 개발한 도구는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세포 내부의 구조와 기능 등 여러 가지 생명 현상을 분자가 움직이는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현재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는 줄기세포의 경우 특정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이해하는 데 이런 실험 방법들이 적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에 이렇게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하는 조 단장은 "좀 더 세밀한 관점에서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데 이런 방법이 응용됐으면 좋겠다"면서도 "사실 연구할 때는 이런 걸 염두에 두지 않고 연구 자체가 재밌으니까, 안 해봤으니까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충환

cosm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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