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바꾼 미래] 인류의 공동 재산 뢴트겐선

2015.01.05 15:33

과학기술 분야에서 20세기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20세기 직전에 이루어진 두 가지의 획기적인 발견 때문이다. 뢴트겐선(X선)과 방사선의 발견이 20세기 과학기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X선은 골절 부위나 부상자의 몸속에 박힌 파편, 유리 조각, 또는 어린아이가 우연히 삼킨 물건 등을 찾아내는 데 사용된다. 또한 X선은 암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암세포를 파괴하는 데도 사용되며 무좀의 치료에도 사용된다. X선은 기초과학 연구에도 엄청난 공헌을 했다. X선을 사용하여 단백질 등의 3차원 분자구조를 알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의약품이 개발될 수 있었다. 한편 X선을 사용하면 기계와 건물을 분해하거나 파괴하지 않고도, 이른바 비파괴검사로 구조적 결함을 찾아낼 수 있다. 또한 예술품의 진위(眞僞)를 가려내기도 하고, 덧칠된 그림 아래에 숨겨진 원화(原畵)를 알아내는 데도 사용된다. 테러범이 휴대하고 있을지 모를 불법 무기를 색출하여 여행객들의 안전한 여행을 돕는 것도 X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은 문명의 이기를 발명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그에 걸맞은 부와 명예가 당연히 따라야 할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막대한 부를 포기하고 자신의 과학적 성과를 오직 인류의 행복을 위해 바친 사람들도 있다. 독일의 뢴트겐(Wilhelm Röntgen, 1845~1923), 프랑스 화학자 베르톨레(C. L. Berthollet, 1748~1822), 그리스의 파파니콜로(George Nickolas Papanicolaou, 1883~1962) 등은 자신의 연구 결과로 세계적인 부자가 될 기회를 얻었지만 이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연구가 인류에 미칠 영향을 잘 알았던 이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성과를 모든 인류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고등학교를 퇴학당하다

뢴트겐은 1845년 독일 라인 강변의 렌넵(Lennep)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영향으로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의 가족은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얼마 후 다시 위트레흐트로 이주했고 뢴트겐은 위트레흐트 공업학교에 다녔다. 그는 반 친구가 선생님을 풍자해 그린 만화가 들통 났을 때 누가 그렸는지 고자질하라는 교장의 요구를 거절해 결국 1862년 퇴학당했다. 당시 학생기록부에 의하면 성적은 대체로 좋았지만 물리학 성적이 특히 나빴고 그의 행실은 ‘개선 요망’이었다.

 


그는 개인교습을 받으며 위트레흐트 대학의 입학자격시험을 준비했지만 불합격해 청강생 자격으로 물리학과 화학, 동물학, 식물학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1865년 정규학교 졸업장 없이 시험성적만으로 입학할 수 있는 취리히연방공과대학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거기서 그는 기계공학보다는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 학계에서는 응용과학보다는 순수과학의 전망이 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뢴트겐은 1869년 취리히 대학에서 단 1년 만에 열역학 분야의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뢴트겐은 평생토록 존경한 실험물리학자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Kundt) 교수의 조교가 되어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교수가 된 그를 따라가 교수 자격시험 논문을 작성했으나 김나지움 졸업장이 없어 탈락했다. 뢴트겐은 쿤트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로 이주한 후에야 비로소 교수 자격을 얻었다. 사실 독일 학계에서 김나지움 졸업장이 없다는 것은 상당한 결격사유였는데 이를 극복하고 교수자격증을 얻었다는 것은 뢴트겐의 자질이 매우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는 30세의 나이에 호엔하임 농업아카데미에서 수학ㆍ물리학 분야의 교수가 되었다. 이후 잠시 슈트라스부르크로 돌아갔다가 기센 대학의 초빙교수가 되었고 이어 실험물리학에서의 그의 업적을 인정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실험물리학과장 교수직을 제의받았다.

 

우연한 발견

1875년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s, 1832~1919)는 자신이 만든 진공관(크룩스관)에 전류를 통하면 관의 벽에서 엷은 녹색 형광빛을 띠는 것을 보고 그것이 진공관의 음극으로부터 나오는 음극선(음극에서 방출된 전자기파)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음극선 연구에 도전했는데 1892년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4)가 음극선이 얇은 금박을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헤르츠는 제자 레나르트(Philipp Eduard Anton von Lenard, 1862~1947)에게 계속 실험할 것을 권유했고, 음극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형광물질이 칠해져 있는 스크린에 비추어 스크린 위에 발생하는 형광을 검출할 수 있었다.1894년 뢴트겐은 형광 현상 재현 실험을 위해 레나르트에게 음극선을 얇은 금속판에 쏘아주는 실험장치의 자문을 구했다. 이 때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 ‘레나르트 창(음극선관의 한쪽 끝에 얇은 알루미늄 판을 댄 것)’에 사용되는 금속박편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1895년 11월 8일 뢴트겐은 산란된 형광이 유리관의 벽면에서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해 검고 두꺼운 종이로 크룩스관을 덮었다. 그런 후 실험실의 불을 끄고 크룩스관의 전원을 켰다. 그와 동시에 가까이에 설치된 백금시안화바륨을 바른 스크린이 도깨비불처럼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크룩스관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책을 두거나 스크린을 더 멀리 떼어놓아도 여전히 방전 때마다 형광빛이 관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뢴트겐이 관찰하려고 했던 음극선은 아니었다. 음극선의 위력은 책을 관통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 이전에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크룩스관에서 나와서 1미터 이상의 공기를 통과하여 형광 스크린을 빛나게 한 것이다. 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 상황을 뢴트겐은 훗날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날 나는 검은 종이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히토르프-크룩스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백금시안화바륨 종이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고 나자, 종이 위에는 이상한 검은 선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빛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전기 아크등에서 나오는 빛조차 이렇게 뒤덮인 종이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관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뢴트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불가사의한 방사선을 ‘X선’이라고 불렀다. 그는 실험을 계속하여 X선이 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통과하는 것은 물론 나무, 고무 외에도 많은 물질들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반면에 이 X선을 차단하려면 적어도 1.5밀리 두께의 납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뢴트겐은 아주 중요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X선을 건판에 감광시켜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X선이 통과하는 길에 사진 건판을 놓고 아내의 손을 그 사이에 놓도록 했다. 건판을 현상한 그는 예상대로 손가락뼈가 선명히 드러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뼈 둘레로 희미하게 근육의 형태가 나타났다. 역사상 최초로 산 사람의 뼈가 사진으로 찍힌 순간이었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손가락뼈 사진을 보는 순간 놀라 비명을 질렀다.

 


뢴트겐은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협회에 자신의 X선 발견에 대해 「신종 방사선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의 논문을 접수한 협회는 그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협회지 게재를 서둘렀다. X선의 발견 소식이 전 세계로 확산되기까지는 불과 2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언론들이 이 놀라운 발견을 대서특필했다. 뢴트겐은 일약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고 카이저 빌헬름 2세로부터 그의 발견을 치하하는 축전까지 받았다. 뢴트겐이 1896년 1월 23일의 구두로 자신의 논문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전 세계의 학자들이 X선의 발견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와 신년휴가 동안 그의 논문이 심사되고 게재가 결정된 후 교정 및 인쇄를 거쳐 저자에게 우송함과 동시에 신문에 발표되기까지 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X선의 발견이 준 충격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논문 발표장에서 80세의 쾰리커(R. Kölliker)가 자청해서 실험 대상으로 나섰다. 스위스의 해부학자이자 동물학자인 쾰리커는 현미경을 이용하여 난자와 정자가 세포라는 것, 신경섬유가 가늘고 길게 뻗은 세포라는 것을 밝힌 사람이다. 뢴트겐은 그의 손을 X선으로 찍어 손뼈가 선명하게 나타난 것을 보여주어 청중들을 경탄케 했는데 당시 한 언론은 이렇게 논평했다.‘X선의 발견은 과학의 여러 경이로운 업적에 또 하나를 추가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사진이 찍히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불투명한 물체를 통과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의학을 바꾸다, 사람을 구하다

이후 1년 동안 X선에 관한 논문이 1천 종, 단행본은 50권 가량 출판되었고, 1897년에는 ‘뢴트겐협회’가 결성되었다. 그해 11월 5일 뢴트겐협회에서 톰프슨(Elihu Thompson)이 발표한 내용은 당시의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발견의 역사상 이것만큼 즉각적이고 널리 과학적으로 응용된 전례는 없다.”그러나 사람을 해부하지 않은 채 살아 있는 사람의 뼈를 보았다는 소문은 많은 두려움과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뉴저지 주의 한 정치가는 오페라 극장의 쌍안경에 X선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했으며 런던의 란제리 제조업체는 ‘X선이 통과하지 않음을 보증하는 속옷’을 광고했다. 이러한 소동이 벌어질 만큼 X선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널리 퍼졌지만 X선은 곧바로 폭발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뉴햄프셔 주의 한 병원이 X선으로 골절을 진단했고 베를린의 의사는 X선으로 손가락에 꽂힌 유리 파편을 찾아냈다. 리버풀의 의사는 X선으로 소년의 머리에 박힌 탄환을 확인했고 맨체스터의 교수는 총 맞은 여자의 머리 속을 촬영했다. 이후 X선은 다양한 분야에서 급속한 속도로 응용되었다. X선이 갖는 과학과 의학에서의 잠재력을 파악한 노벨상위원회는 1901년 제1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뢴트겐을 선정했다. 뢴트겐의 X선의 발견이 얼마나 획기적인가는 다음의 설명으로도 알 수 있다.

‘의학에도 몇 번의 전환점이 있었다. 하나는 마취의 발견이고 그 다음에 항생제의 발견이지만 제일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은 X선의 발견이다. 의학에서는 환자라든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몸 속을 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마취를 하고 배를 열어보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러면 환자에게 당연히 고통이 따른다. X-ray는 몸에 전혀 고통과 해를 주지 않고 몸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최초의 방법이었다.’

 


뢴트겐이 발견한 X선은 방사선의 한 종류로서 전파나 마이크로웨이브와 똑같은 전자파이다. 단지 이들 전자파에 비해 X선은 아주 짧은 파장을 가지고 있으며 상당히 큰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X선은 뢴트겐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지구가 생긴 이래 계속 지구상에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지구상에 계속 있으면서도 X선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냄새도 안 나며 맛도 없는 즉 사람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다는 특성 때문에 뢴트겐이 발견할 때까지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이다.

사실 X선은 뢴트겐보다 크룩스가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크룩스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의 음극선 실험실에 있던, 아직 뜯어보지도 않은 새 사진건판이 못쓰게 되어 있는 것을 자주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원인을 살펴보는 대신 단순히 사진건판 제작자에게 불량품 공급에 대한 항의를 하는데 그쳤다. 레나르트도 음극선관 부근에서 일어나는 발광 현상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도 이상한 광선이 발생하는 이유를 실험 장치의 오류로만 생각하여 실험 장치 제작자에게 항의하곤 했다. 미국의 굿스피드도 뢴트겐보다 5년 전에 우연히 기체방전으로 사진 건판이 검어지는 현상을 보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사진 건판을 치워버렸다. 뢴트겐의 가장 큰 업적은 우연히 발견한 것을 철저하게 추적해 결국 그것을 밝혀냈다는 점에 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레나르트는 훗날 자신이 X선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으며 뢴트겐이 논문에 자신의 도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물론 레나르트도 음극선을 관 밖으로로 끌어내는 ‘레나르트의 창’의 제작에 성공하여, 음극선 연구에 신기원을 열었고 이 업적으로 190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가난하지만 명예롭게 죽다

뢴트겐은 X선의 발견으로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명예를 얻었으나 바이에른 섭정(攝政) 정부가 제의한 귀족을 뜻하는 ‘폰(von)’ 칭호는 거절했다. 뢴트겐은 X선은 자신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온 인류의 것이 되어야 한다며 특허 신청을 단연코 거절했다. 에디슨은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에 있어서도, 의학에 있어서도, 또 산업계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이 발견으로부터 금전적인 이익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작은 아이디어만 생겨도 특허 등록을 통해 특허권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하는 과제였다. 특허제도가 가져다주는 독점적 이득이 현대 문명을 촉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혁명 동안 많은 기술자들이 부자가 된 것도 특허제도에 의해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허의 선취권을 둘러싼 역사적인 소송들을 보아도 특허권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작은 발명이라도 전 세계적 독점권을 갖게 되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되니, 자연히 과학기술 분야에 인재들이 몰리고 그만큼 과학기술이 진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디어에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신기술을 다루는 곳은 대학교나 연구소였다. 당시의 대학이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은 부자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자가 육체노동자보다 우대받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러나 뢴트겐은 과학의 발명이나 발견은 과학자 개인만의 것이 아니므로 온 인류가 공유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과학적 성과에 만족해서라기보다는 인류애적인 면에서 특허를 취득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뢴트겐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1920년대 독일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뢴트겐은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궁핍한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선의의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한 운명이었다.

 

 


이종호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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