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바꾼 미래] 병든 도시를 건강한 도시로 바꾼 수세식 변기

2014.12.08 15:59

 

중국이 개방되었을 때인 1990년대 중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최근에 다시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가장 놀라면서 말하는 것이 있다. 바로 화장실 시설의 변화이다. 20년 전만 해도 중국의 일반적인 화장실을 보면 남녀가 분리되지 않은 것은 물론 칸막이도 없었다. 대도시의 공용 화장실 특히 거대 도시 기차역의 대형화장실도 거의 같은 형태였다. 수세식 변기에 익숙한 사람으로서는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화장실이 획기적으로 바뀐 것은 2008년 치러진 북경 올림픽의 영향 때문이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선진국 손님들이 칸막이도 없는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아연실색하고 뛰쳐나오는 모습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처럼 국제적 행사를 개최할 때 화장실의 설비 상태를 보는 이유는 화장실이야말로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개최할 정도의 국력을 가진 국가가 낙후된 화장실을 갖고 있다면 격에 맞지도 않거니와 위생적인 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배설도 중요하다. 쾌적한 배설을 위한 아이디어를 실용화하여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 사람이 명예를 얻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유럽 도시의 거리를 뒤덮은 오물

중세 유럽의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은 소위 개방식 배수 방식을 감수해야 했다. 말이 개방식 배수 방식이지 실제로는 오물을 아무데나 ‘함부로 버린다’는 의미이다. 하수구가 갖추어진 비교적 위생적인 도시라 할지라도 걸핏하면 하수구가 오물로 막히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위생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집 밖에 쓰레기 구덩이를 마련하는 정도였다.

 


산업혁명으로 도시 인구가 급격하게 늘면서 오물 처리 문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는데 16~17세기까지 1세기 동안 영국 런던의 인구는 거의 4배나 증가했다. 런던이 직면한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 용변을 비롯한 오물 처리였다. 복잡하고 좁은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은 건물 위에서 창 밖으로 쏟아버리는 인분이나 쓰레기더미에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의 휴양지 니스(Nice)의 구시가지는 오물세례가 가장 심했던 지역으로 악명이 높았다. 현재까지 과거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건물들에는 고층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배수관이 없다. 거주자들이 집 밖의 통행인에게 큰 소리로 경고한 후 모든 오물을 거리에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고대 로마제국의 배수관(De Aquae urbis Romae)에서 힌트를 얻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식수나 관개수를 운반하기 위해 아치형 다리 위에 수로를 놓은, 이른바 수도교(水道橋)를 건설했다. 로마의 토목공학을 대표하는 수도교는 기원전 312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기원 후 5세기까지 로마가 진출한 곳에 건설되었다. 여름에 무덥고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를 갖고 있는 로마의 전 지역에서 물의 공급은 더욱 중요했다.

 


생활하수 처리에 골치를 썩이던 유럽의 여러 도시들은 로마식을 본뜬 하수관을 설치하여 각 건물에서 나오는 오물들을 처리하려 했다. 영국 런던은 오물 처리를 위해 우선 20가구당 최소 한 개 이상 공중 화장실을 설치하도록 권장했다. 공중 화장실의 오물은 런던을 관통해 템스 강으로 흘러들어갔다. 하지만 오물을 그대로 버리는 바람에 배수처리가 원활하지 않아 하수관이 자주 막혔다. 오수 처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물이 잘 흘러야 하며 집안에서 악취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관건이었다.

 

도시의 위생을 바꾼 간단한 아이디어

당시 유럽인에게 가장 머리 아픈 문제인 배설물 처리방법을 해결해 낸 사람이 조셉 브라마(Joseph Bramah)다. 그는 영국의 공학자로 자물쇠 장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가 운영한 자물쇠 제작소는 영국 공작기계산업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의 발명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밸브식 브라마 수세식 변기’이다. 학자들은 그의 변기를 최초의 실용적인 화장실로 인정한다. 인간의 주거 공간을 보다 쾌적하게 만들어 진정한 의미의 건강과 복지를 가져다준 사람이 브라마라는 것이다.

 


다른 많은 발명품의 경우처럼 브라마 역시 맨 처음 밸브식 변기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아니었다. 일찍이 16세기경 발명가로 유명한 존 해링턴 경(Sir John Harrington)이 최초로 아이디어를 내어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헌정했으나 너무 시대를 앞서간 발명품이라 실용화되지 못해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200년 후인 1775년경 런던의 시계공인 알렉산더 커밍(Alexander Cumming)이 수세식 변기 아이디어로 특허를 획득했다.

커밍의 밸브식 변기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획기적이었다. 변기 손잡이를 위로 올리면 물통에서 물이 흘러나와 오물이 배수관으로 씻겨 내려감과 동시에 변기 밑에 있는 밸브가 다시 닫힌다. 하수관과 집 안의 배관에는 S자형 트랩이 설치되어 악취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다. 커밍의 수세식 변기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일을 돕던 브라마는 16세가 되던 해 점프 경기에서 복사뼈를 다치는 바람에 가구 제작자 겸 판매상으로 직업을 정했다. 그런데 집집마다 다니며 커밍의 변기를 설치하면서 불만족스런 점을 알게 되었다. 직접 해결책을 찾아나선 브라마는 경첩으로 작동하는 수세식 변기를 개발하여 1778년 특허를 획득했다. 그의 수세식 변기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위생 배관 시스템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1797년까지 6천 개가 팔릴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수세식 변기는 호황을 누리며 브라마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당시 도시의 모든 가정에 그의 변기가 한 대씩 보급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실내에 화장실을 설치할 때는 냄새가 문제였다. 그래서 가능하면 실내 주 공간에서 먼 곳에 화장실을 설치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화장실(그때는 변소라고 불렀다)을 집 밖에 설치했기 때문에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을 무서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브라마의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화장실 하부에 밸브를 두어 냄새가 역류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단순한 이 아이디어가 인류의 건강과 복지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수세식변기는 1851년의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대대적으로 소개된 후 영국의 도시를 중심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당시의 전단지에서 수세식 변기를 설치하는 전문 업자들도 성장했음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브라마 변기’도 하수도 시설이 취약한 곳에서는 불결한 가스와 분뇨의 적체를 해소할 수는 없었다. 이는 당시의 도시 기반시설로서는 위생적인 배관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이 위생 배관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성행한 콜레라 때문이었다. 이때 개발된 것이 현재와 같은 모양으로, 물탱크와 S자 모양의 굽은 관을 연결해 만든 수세식 변기이다.

 



시대를 앞서간 발명왕

브라마는 수세식 변기로 유명해졌지만 정작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한 것은 ‘브라마 자물쇠’였다. 그의 자물쇠는 견고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어 열쇠가 없이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 자물쇠로 알려졌다. 자신의 자물쇠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브라마는 실제로 열쇠 없이 브라마 자물쇠를 여는 사람에게 200기니를 주겠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현상금을 탄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현상금을 내건 지 67년이 흐른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참석했던 한 미국의 자물쇠 제조공이 도전하여 성공했는데 그것도 무려 51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브라마는 잇달아 금속 선반을 발명하여 ‘기계-공구의 선구자’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획기적인 사무용품도 개발했다. 필기구로 사용하는 날개 깃털을 길이 방향으로 4등분하여 펜촉으로 활용하는 필기도구였다. 펜촉은 별도의 펜대에 꽃아 쓸 수 있었으며 펜촉만 갈아줘도 펜을 항상 새 것처럼 유지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필기용 깃털을 수입해야 했던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또한 그는 당대 최첨단 선박에 사용되던 외륜(外輪) 대신에 사용할 수 있는 프로펠러를 고안하기도 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그가 죽은 지 60년 후에 영국의 선박 엔지니어인 킹덤 브루넬(Kingdom Brunel)이 설계한 대영국호(Great Britannia)에 처음으로 장착되었다. 조셉 브라마의 활약은 그야말로 분야에 관계 없이 펼쳐져 한 세기 후의 에디슨에 맞먹었던 것이다.


이종호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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