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바꾼 미래] 증기기관의 시대를 열다

2014.04.10 14:49

학자들이 영국의 산업혁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대문명의 단초가 산업혁명의 여파로 시작되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산업혁명을 이끌어 준 역군이 있었다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산업혁명이라면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의 증기기관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것은 와트의 증기기관이 등장한 후에야 비로소 각종 산업이 요구하는 여러 가지 기계화 작업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고 수요가 많더라도 이를 경제적으로 실용화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배보다 배꼽이 큰 생산 구조, 즉 제품의 생산원가보다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는 시스템으로는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데 와트가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놓은 것이다.

 


그런데 과학사에서 와트를 증기기관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가 증기기관을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와트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이 증기기관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실용화하는데 총력을 기우렸는데 그중 유명한 사람이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 1663~1729)이다. 토마스 뉴커먼에 의한 증기기관이 비로소 산업에 접목되기 시작했는데 와트는 뉴커먼의 증기기관이 갖고 있는 단점을 개선하여 진정한 증기기관 시대를 열었다고 인정받는다. 이미 발명된 기계라 해도 미흡한 점을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것 역시 최초의 발명보다 더 큰 업적이 되는 것은 물론 큰 부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사람이 바로 제임스 와트이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는 스코틀랜드의 클라이드 강변에 있는 그리녹(Greenock)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선주이자 조선업을 하는 사람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이었다. 와트가 소년시절을 아버지의 공장에서 보내는 동안 수세공(手細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마친 후 갑자기 집안이 기울어 20세의 와트는 1755년 런던에서의 기계공 견습 기간을 거쳐 1757년 글래스고(Glasgow) 대학 부속 공장의 기계공이 되었다. 그곳은 연구용 실험 기구나 기계를 제작ㆍ수리하는 곳으로, 와트는 주로 컴퍼스, 눈금자, 사분의(四分儀) 등과 같은 과학 도구를 만들었다.


와트가 새로운 증기기관을 발명하게 된 것은 아주 단순한 사건 때문이다.당시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수는 물리학(열역학) 분야의 앤더슨(D. Anderson)이었다. 앤더슨은 유명한 ‘화이어 머신(fire marchine)’으로 불리는 뉴커먼 엔진 모형을 사용해 증기기관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등 현장감 있는 강의로 학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강의 도중 강의 자료인 모형이 망가지자 앤더슨은 와트에게 수리를 부탁했다. 와트는 뉴커먼 엔진의 모형을 수리하기 위해 모형의 내부를 분해하여 살펴본 후 곧바로 엔진의 문제점을 파악했다.


모형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뉴커먼 기관을 단순히 축소해 작게 만들었기 때문에 열효율이 너무 떨어져 작동되지 않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열기관을 소형으로 만들면 실린더의 단위 면적당 열손실이 커져 그만큼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는 양이 줄어들어 열효율이 떨어진다. 와트는 뉴커먼 엔진을 면밀히 검토한 후 열효율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작게 만들려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뉴커먼 엔진은 석탄으로 보일러를 가열하여 얻은 뜨거운 증기로 피스톤을 밀어 올린다. 피스톤이 제일 윗부분까지 올라가면 이번에는 차가운 물을 집어넣어 실린더 안의 증기를 식힌다. 그러면 실린더 속의 증기가 액화하여 물이 되고 위로부터 대기의 압력을 받는 피스톤이 아래로 내려온다. 피스톤이 아래로 내려올 때 또 다시 보일러의 뜨거운 증기가 차가워진 실린더를 데워 다시 피스톤을 들어 올리는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다. 애써 물을 데워 증기로 만들었다가 다시 냉각시켜 물로 만들게 되므로 열이 낭비되는 것이 뉴커먼 엔진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와트는 실린더를 냉각하지 않는 대신 한 번 피스톤을 밀어올린 뜨거운 증기를 다른 곳으로 보내 거기서 냉각시키면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스톤 실린더를 교대로 가열하고 다시 냉각하는 과정을 제거하면 열효율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실린더에 따로 체임버(chamber)를 연결하고 여기에 응축된 증기를 모으는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뉴커먼의 기계는 피스톤이 오르내릴 때 대기압을 이용하는데 대기압의 크기는 1기압이므로 뉴커먼 기관에서는 기계를 상당히 크게 만들어야만 큰 힘을 낼 수 있다. 반면 와트의 기관은 증기압을 이용하므로 보일러가 폭발하지 않는 한 작은 기계로도 큰 힘을 낼 수 있다. 뉴커먼의 불완전한 증기기관이 와트에 의해서 비로소 완전한 증기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와트는 자신의 아이디어대로 강력한 보일러에서 나오는 증기력을 이용하면 광산의 양수 펌프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시범적으로 제작한 모형에 따르면 화력 기관의 연료 소비를 75퍼센트나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관의 실용화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와트의 기계는 당시 어떤 기관보다 훨씬 압력이 큰 증기를 이용하는 것이어서 피스톤과 실린더 사이의 증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밀착시키는 패킹이 관건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공작기계로는 정밀하게 기계를 깎는 일이 불가능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와트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무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패킹 문제가 관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에 도전하지 않고 시간 즉 누군가가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1766년 와트는 좀 더 안정된 직업인 측량사가 되어 8년 동안 스코틀랜드에 건설된 운하의 경로를 측정하는 일을 맡았다. 물론 측량사 업무를 보는 틈틈이 자신이 개발한 증기기관를 실용화할 수 있는 기자재에 개발 동향에 대해 관심을 기우리면서 자본가를 물색했다. 마침 캐런 제련소 소유주인 존 로벅(John Roebuck)이 개발비를 모두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발명가인 와트가 수익의 3분의 2, 자본을 부담하는 로벅이 3분의 1을 받기로 계약했는데 이 때의 분배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외국의 경우 발명가가 자본가보다 많은 분배율을 받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이와 반대이다. 많은 경으 10% 정도가 보통인데 이것이 어느 나라보다 발명의 실용화가 늦어지는 이유 중 하나다.

 


로벅의 자본 투자는 와트에게 날개를 달아주어, 1769년 증기기관에 관한 최초의 특허(영국특허 913호)를 받았다. 1773년 로벅이 파산하여 더 이상 자금을 지원할 수 없게 되었지만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와트의 기계에 대한 소문을 들은 매튜 볼턴(Matthew Boulton)이 그의 특허권을 인수하면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동업자가 되어 ‘볼턴-와트 회사’를 설립했다. 버밍엄에 있는 볼턴의 금속 공장은 당대에 이미 직공이 600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장이었다. 직공이 한두 명이던 당시 대부분의 공장과 달리 전 세계를 통틀어 최초의 공장다운 공장이었다.


와트에게 남은 문제는 개폐가 정확한 실린더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1774년 와트는 볼턴의 친구인 윌킨슨(John Wilkinson)이 내면굴착용 선반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와트는 그 선반을 이용하여 완전한 원통형 실린더를 제작할 수 있었다. 1775년 3월 브룸필드의 탄광에서 와트의 첫 번째 증기기관이 가동되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같은 양의 석탄으로 뉴커먼의 것보다 3배나 더 오래 일할 수 있었다. 마케팅의 귀재였던 볼턴은 ‘전세계가 원하는 것, 즉 동력을 팝니다’라는 구호를 정했다. 기술과 자본이 분리되어 각자 전문 분업이 빛을 발했는데, 볼턴이 동력을 팔았다면 와트는 효율성과 신뢰성을 팔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 기술 산업의 모형을 보여 준 것이다.


효율이 좋은 와트의 기계는 곧 폭발적인 수요로 이어졌다. 뉴커먼 증기기관의 문제점은 실린더를 가열하고 식히는 과정에서 엄청난 연료(석탄)을 사용해야 하므로 주로 탄광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소형으로 제작이 가능해진 와트의 증기기관은 탄광용 펌프뿐만 아니라 제분기나 직조기 등에도 사용될 수 있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꾸는 엔진을 고안했다.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크랭크’가 바로 그것이다.


와트에게도 특허 시련이 닥쳤다. 와트가 크랭크의 아이디어를 제자에게 얘기했는데 그의 말을 귀동냥한 제자가 재빨리 먼저 특허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먼저 제출된 특허에 대항할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와트는 두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첫째는 고육지책으로, 거의 비슷하게 작동하는 행성식 기어(맞물린 한 쌍의 톱니바퀴에서 한쪽을 고정시키고 다른 톱니바퀴는 고정된 톱니바퀴의 둘레를 행성처럼 도는 기구)로 특허를 얻어 장착한 것이다. 둘째는 배신한 제자를 상대로 특허 전쟁을 벌였다. 다행하게도 와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제자의 특허는 도용한 것이 인정되어 특허가 허가되지 않았다. 와트가 곧바로 자신이 처음부터 고안한 크랭크를 장착했음은 물론이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소형화가 가능한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어느 분야에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다행하게도 와트의 증기기관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또 다른 발명가인 윌킨슨이 1776년 와트 기관을 송풍기로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증기기관이 탄광에서의 배수 펌프 외의 다른 용도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이후 와트의 증기기관은 대형이든 소형이든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공급될 수 있었다. 와트의 기관은 폭발적으로 보급되어 18세기 말에 이미 500대가 그의 회사에서 출시될 정도였다. 탄광의 양수기에 지나지 않았던 뉴커먼의 증기기관이 와트의 손에 의해 만능 동력원으로 탄생된 것이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의 중요성을 인식한 영국 의회는 1785년 와트에게 15년 간 특허권을 연장해주는 특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화가 난 경쟁업자들이 벌떼 같이 일어났지만 와트의 특허에 한해 연장이 승인되었다. 당시의 특허권 기간은 15년이었는데 이를 연장해 주었다는 것은 와트의 증기기관이 산업계에 기여한 공로가 얼마나 컸는가를 말해준다. 와트의 성공은 비교적 순탄하게 아이디어를 도출하여 산업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와트가 도출한 아이디어는 당대에 볼 때 차원을 달리하는 생각의 소산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래스고 대학 부속공장 기계공이라는 낮은 직급으로 일하던 와트가 처음 뉴커먼의 엔진 모형을 보았을 때 그는 모형의 고장 여부만 본 것이 아니라 엔진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그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냈다. 그는 나무만 본 것이 아니라 숲을 보았다. 단순 기계공이 당대 최첨단 과학기술인 증기기관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대학의 기계공은 직급도 급료도 낮은 1년 계약직에 불과했다. 업무는 교수가 지시한 대로 실험 도구나 기계를 도면대로 제작하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당대 최첨단 과학기술을 접목한 증기기관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전문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개 기계공에 불과했지만 독학으로 과학 지식을 공부하며 앤더슨, 블랙(J. Black)과 같은 당대의 초일류 학자들과 신분에 맞지 않은 교류를 하면서 첨단 지식을 접할 수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켰다.


와트는 어떻게 보면 매우 건방진 청년이었다.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영국 최고의 대학에서 기계공이 교수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제시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기구를 제작할 때도 그 원리를 납득해야만 비로소 제작에 들어갔다. 어느 틈엔가 와트는 유능한 실험 조수로 평가되었고 대학에서도 신망이 쌓여갔다. 좀 건방지긴 해도 애송이 와트가 만든 제품은 최고였으므로 교수들도 차츰 그의 식견과 재주를 인정했던 것이다. 와트가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보자마자 곧바로 대안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도 해박한 이론적 지식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와트가 당대의 학자들이나 알 수 있는 증기의 힘을 이해했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그는 섭씨 100도에서 물이 증기로 변할 때 의외로 대량의 열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평소 자주 접촉하는 블랙 교수를 찾아갔다. 블랙은 와트에게 물질이 상태 변화할 때, 이를 테면 고체인 얼음이 액체인 물로 되거나 액체인 물이 기체인 수증기가 되고, 아니면 그 반대의 상태변화가 일어날 때 발생하는 열의 이동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사실 블랙이 와트에게 설명한 것은 오늘날에는 상식에 속한다. 물이 기체로 변하게 되면 무려 1,700배로 부피가 증가하므로 그것을 조그마한 통에 넣는다면 대단히 큰 압력을 갖는다는 것은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에 의해 이미 알려진 내용이었다. 그러나 와트는 실험을 통해 경험적으로 알게 된 과학 원리를 전문가들로부터 재확인할 수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효율성 있는 증기기관을 만들 수 있었다.

 


와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우선 좋은 아이디어를 이끌어낸 후에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방법을 차근차근 쌓아갔다는 점이다. 그의 아이디어를 실용화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본이 드는 것이 문제였다. 발명가 자신이 직접 자본을 투입하여 샘플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힘든 일이다. 더구나 그의 아이디어를 제조하는 증기기관은 조그마한 발명기계가 아니라 거대 자본이 있어야만 가능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가난한 발명가가 집념으로만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 상황과 엇물려 그의 아이디어가 빛을 보았지만, 여기서 그가 추진한 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와트는 뉴커먼 증기기관의 단점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도출했음에도 패킹이 큰 관건이 된다고 알자 서두르지 않았다. 이 경우 많은 발명가들이 자신의 발명을 위해 패킹 개발을 독려하기 마련이다. 이때 왕왕 발명 아이디어가 노출되기 마련인데 와트는 누군가가 패킹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생각하고 꽁꽁 숨기고 다른 일에 몰두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또한 자본가를 수배했다. 와트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이를 실현화시키기 위한 ‘기다림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와트는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가 1790년까지 벌어들인 특허권 사용료만 해도 7만6천 파운드(요즘 가치로 350억 원 이상)에 달했다.


와트를 기쁘게 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그의 과학적 업적을 영국의 학계가 인정해 주었다는 점이었다. 보수성이 강한 영국 학계는 1785년 와트와 볼턴 두 사람을 영국학술원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와트는 버밍엄의 진보적 과학자들의 ‘달의 모임’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1806년 글래스고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814년에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외국인 준회원이 되었다.


와트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는데 J. 프리스틀리와 만나고부터 화학에도 관심을 갖고 화학 반응, 재료의 강도, 에너지 변환 등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그 밖에도 특수잉크를 사용해 교신문서와 송장의 사본을 원본과 똑같이 기록하는 복사인쇄기도 발명했고 조각 흉상을 재생하는 방법도 고안했다. 그는 사망 후 버밍엄 근처의 핸즈워스(Handsworth) 교회에 동업자인 볼턴의 옆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그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세워졌는데 역대 영국 국왕들을 비롯해 명망이 높은 사람만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에 제임스 와트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은 모두 인류를 위한 그의 발명 덕분이다. 현대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 과학용어인 전력의 단위 와트(watt)는 그를 추모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곧바로 위대한 발명품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수많은 후속 혁신 작업들이 앞선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뒷받침함으로써 기술이 보다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뉴커먼이라는 선두 주자가 있었기 때문에 와트의 증기기관이 드디어 개발될 수 있었는데 다행한 것은 뉴커먼, 와트 모두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는 점이다. 과학기술로 거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후 폭발적인 아이디어 도출이 이어졌고 이것이 현대 문명을 이루는 견인차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종호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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