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의 관념을 바꾸어 놓은 무선통신

2013.09.10 10:29

저 점을 다시 보자. 여기 있다. 저것이 우리의 고향이다. 저것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봤을 모든 사람들,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삶을 영위했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이 총합,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적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의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의 지도자들,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저기 -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창백한 푸른 점> 중에서-


우주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극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 누군가에게는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을 하던 순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했을 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적인 순간은 꼭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가린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에 살던 토끼를 멸종시켜버리기는 했지만 과학적 성과로 따지면야 조용히 태양계를 횡단했던 보이저 호의 비행이 가장 극적이었을 것이다.


1977년 발사된 두 대의 보이저 위성은 화성부터 해왕성까지를 샅샅이 훑으면서 귀중한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목성형 행성이 하나같이 고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목성의 대적점이 거대한 태풍이라는 것도, 고리의 실체가 떼지어 모인 수많은 잡동사니들이라는 것도,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 대기가 있다는 것도, 목성의 위성 이오에서 화산이 폭발한다는 것도, 천왕성과 해왕성의 세세한 정보도 모두 보이저가 거둔 수확이다. 보이저가 보내온 정보들은 수많은 과학자와 SF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이후의 목성과 토성 탐사 프로그램이나 토성과 목성을 배경으로 한 SF 작품들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자’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두 대의 보이저 위성은 2013년인 지금까지도 지구에서 약 187억km 떨어진 곳을 쉴 새 없이 비행하며 36년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빛의 속도로도 17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다. 칼 세이건이 언급한 창백한 푸른 점은 바로 명왕성 근처에서 보이저가 찍은 사진에 나타난 지구다. 우리가 아옹다옹하는 세상이 푸른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찍은 사진을 우리가 볼 수 있고, 명왕성 궤도를 한참 벗어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보이저와 지구가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이런 놀라움은 더 작은 스케일이기는 하지만, 이미 백여 년 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12년 4월 14일 밤, 인류가 만든 최대의 이동수단, 타이타닉호가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다를 빠르게 항해하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시계가 영 좋지 않기는 했지만 바다는 평온했고 빙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순조로울 것 같던 항해는 밤 11시 40분에 재앙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발견한 빙산에 놀라 조타수가 급격히 방향을 틀었지만 얼음덩어리는 배의 수면 아래 부분에 치명적인 균열을 만들었다. 이 틈으로 쏟아져 들어온 물은 보일러실부터 들어차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결국 1시간도 지나지 않은 0시 15분에 조난 신호 CQD를 타전했다. 타이타닉이 내보낸 다급한 메시지는 대서양을 떠돌면서 수십 척의 배에 소식을 실어날랐다.


사고 장소에서 16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열 척의 배가 신호를 접수했다. 그러나 차디찬 북대서양 바다에서 당시의 증기 엔진으로는 달려가기에 너무 먼 거리였다. 캘리포니아호가 가장 가까운 20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타이타닉이 CQD를 타전하기 10분 전부터 무선원이 자고 있어 대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사고지점에서 90km 가까운 곳에 있던 카르파티아호가 요청에 응했지만 사고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시 55분, 배가 완전히 침몰하고 1시간 30분이나 지난 후였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큰 비극이었지만 무선통신이 본격적으로 활약한 장이기도 했다. 캘리포니아호는 타이타닉호에서 발사한 신호탄을 직접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지만 캘리포니아의 선원들은 이 신호의 의미를 명확히 알 수가 없어 대응하지 못했다. 타이타닉이 한참 침몰하는 중에 수평선 위로 보일 만큼 가까이 온 포경선이 있었으나 이 포경선은 타이타닉을 해양경비대로 오인하고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견시와 신호탄 같은 전통적인 신호는 정작 위급한 상황에서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선통신은 달랐다. 사람의 눈과 귀가 무력화된 상황에서 사건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은 무선통신이었다.


항해중인 배만 타이타닉의 절박한 메시지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타이타닉이 발신한 ‘우리는 선두부터 급속히 가라앉고 있다’는 소식이 1시 20분이면 대서양 양쪽에 모두 퍼졌다. 뉴펀들랜드의 무선 기지국은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고 있으며 여성들이 구명보트에 타고 있다는 메시지를 우연히 접수했고, 이외에도 대서양 연안의 수많은 무선기기들이 타이타닉의 최후를 지켜봤다. 한동안 수많은 무선국이 쏟아내는 다급한 타전으로 통신 주파수가 마구 엉키기도 했지만 4월 15일 아침에는 이미 유럽과 미국의 사람들이 타이타닉의 침몰사실을 알고 있었다. 규모가 꽤나 크기는 했지만, 북대서양의 망망대해에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한밤중에 벌어진 사건이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주요국가에 모두 알려진 것이다.


타이타닉의 소식은 큰 충격과 함께 경이로움도 전해주었다. 4월 21일자 <뉴욕타임스>에는 무선통신의 힘에 대한 놀라움이 잘 드러난다.


연중 밤낮없이 육지에서는 수백만 명이, 해상에서는 수천 명이 공기를 잡아채서 (통신에) 사용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만들어진 어떤 회선이나 망보다도 인간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지난주에는 745명이 무선으로 구조되었다. 만약 우리가 공기를 통신에 이용하지 못했다면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바다 깊이 도사리는 신비로운 비밀로 묻혀버렸을 것이다.


745는 타이타닉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숫자다. 한편 <런던 타임스>는 4월 16일자 사설에서 무선통신으로 경험의 범위가 확대됐다고 논평했다.


상처 입은 거인의 고통이 대서양을 가로질러 울려 퍼졌다. 사방에서 거인의 형제들이 서둘러 구조에 나섰다. …우리 모두가 거함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인식한다.


사실 타이타닉이 침몰하던 당시, 무선통신은 보편적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었다. 이전에도 해상구조에서 종종 활약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타이타닉이라는 거대 함선의 침몰은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간격 없이 소식을 접하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가장 절박하고 외로운 상황에서도 확실하게 연락 가능한 무선통신의 힘을 경험하고 나서 무선통신은 모든 선박의 의무사항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쥘 베른이 1888년의 작품에서 상상했던 ‘전화 언론’이 라디오라는 더 발전된 모습으로 현실화되면서 무선통신은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




19세기는 아직 유선통신의 시대였다. 당시 가장 확실한 무선통신 방법은 프랑스 혁명기 개발된 광학적 통신기로, 미리 약속된 신호를 망원경으로 관찰하여 다음 관측소로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매우 간단한 원리지만 이전의 봉화와 같은 방법보다 훨씬 정교한 신호를 알릴 수 있었으며 날씨의 제약도 덜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러 차례 중계하여 소식을 전하는 형식이었던 탓에 메시지가 중간에 왜곡될 위험도 컸고, 중계소 중 몇 곳만 제 기능을 못해도 전체 통신망이 마비되는 문제가 있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유선통신망에 비하면 신뢰성을 보장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19세기 말은 미국인 사업가, 사이러스 필드Cyrus Field가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해저 케이블을 설치하는 데 성공하여 대서양 양안의 통신도 얼마든지 가능해진 시점이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무선통신은 당시 막 태동하던 최첨단 분야로 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작동할지 확실치 않은 신기술이었지만 실용화에 성공한다면 전선에 의존하던 당시의 통신환경을 크게 진일보시킬 것이 분명했다. 


현대적인 무선통신의 가능성은 스코틀랜드의 과학자 제임스 클럭 맥스웰이 열었다. 맥스웰은 1886년 발표한 논문에서 전기장과 자기장이 상호작용하면서 무한히 퍼져나가는 ‘전자기파’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예측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독일의 물리학자인 하인리히 헤르츠는 전자기파를 검출하는 장치를 개발해내어 맥스웰의 이론을 검증하고 전자기파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헤르츠의 연구는 전자기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확고하게 자리잡아 훗날 양자역학으로까지 연결되는, 물리학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정작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전자기파의 존재 자체보다는 검출장치였다. 전자기파가 공기 중을 직진하여 퍼져나가고 이를 검출기로 확인할 수 있다면 전자기파를 펄스처럼 발송하여 모르스부호를 전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전자기파 자체가 전류를 유도할 수 있으니 제대로 된 검출기만 있으면 기존의 유선전신기에 적용하기도 수월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눈이 빠져라 쌍안경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얼마든지 무선통신이 가능한,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전자기파를 이용한 무선통신의 가능성을 모색한 사람들 중 단연 두각을 보인 사람이 이탈리아 출신의 구글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였다. 마르코니는 어렸을 때부터 물리학과 전기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과학자라기보다는 사업가이자 발명가였다. 마르코니는 헤르츠의 실험에 크게 고무되었지만 전자기파에 대한 해석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키기는 방향은 아니었다. 실존한다는 사실이 증명된 전자기파를 어떻게 이용하여 무선통신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가가 마르코니의 흥미를 끌었다. 과학자보다는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했던 셈이다.


마르코니는 1894년, 전자기파를 이용하여 전선 없이 메시지를 보내는 소규모 실험에 성공했지만 정작 고국에서는 이 신기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는 육군력에 의존한데다 식민활동에서는 후발주자였던 탓에 딱히 무선통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탓이다. 무선통신을 실용적인 수준으로 발전시키려면 대규모 투자와 인프라 구축이 필요했고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절실했기에 마르코니는 영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명성답게 여러 식민지와 함선들을 시간지연 없이 연결해 줄 무선통신의 가능성을 금세 인식했다.


그러나 마르코니의 구상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당시에는 전리층의 존재가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과학자들은 무선통신의 유효거리가 160~320km에 불과하리라고 예상했다. 전자기파는 직진하는데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곡률을 고려하면 그 정도가 전자기파의 신호가 직접 닿을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당연한 결론이었지만 이래서는 망망대해에 듬성듬성 떨어진 식민지와 함선들을 본국과 연결시키기란 불가능했다. 100여km마다 중계기를 설치해야 한다면 그저 거리 제약이 조금 덜한 광학 신호체계에 불과할 뿐, 전통적인 무선통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르코니는 이를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방법으로 정면돌파했다. 영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얻어낸 그는 결과에 대해 의심하기보다 밀어붙이기를 선택했다. 영국에 건너간 지 일 년 만에 마르코니는 동료 데이비스와 함께 세계 최초의 무선전신회사인 무선전신신호회사(Wireless Telegraph and Signal Company. 1900년에 영국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로 변경)를 설립하고 무선통신의 작동거리를 꾸준히 늘려나갔다. 마르코니의 실험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898년에는 도버 해협을 가로질러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교신에 성공했다.


바다를 건너 전선 없이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었다. 제국주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수많은 식민지를 운영하던 영국에게는 특히 그러했다. 먼 바다를 건너서까지 무선통신이 가능하다면 식민지와 본국은 물론, 시시각각으로 위치가 바뀌는 함대들끼리도 더욱 긴밀하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시험해보는 무대가 바로 1900년 시작된 영국과 미국간의 무선통신 실험이었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과학적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무모한 시도였다. 지구가 평평하다면 모를까, 5,000km가 넘게 떨어진 곳까지 중계 없이 전자기파를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실험을 시작한 지 1년여가 지난 1901년 12월 12일, 마르코니는 캐나다 동쪽의 세인트존스 수신기지에서 영국으로부터 발신된 모스 부호를 수신하는 데 성공했다. 마르코니의 성공으로부터 2년 후에는 영국의 에드워드 7세와 미국의 테오도를 루즈벨트 대통령이 무선통신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1910년에는 무선통신으로 제공된 정보를 이용하여 미국에서 도주한 살인범이 영국 런던에서 체포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무선통신이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얻었다. 2012년에 이르면 무선통신이 국제 통신망의 필수 요소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무선통신이 대서양을 처음으로 횡단한 지 불과 12년 만이었다.




마르코니의 무선통신은 20세기를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대로 만들었다. 무선통신이 사람들의 인식에 준 영향은 철도에 필적했다. 철도가 개인의 생활공간을 크게 넓히고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분 단위까지 고려해야 할 정도로 단축하여 국제적으로 표준시를 도입할 단초를 제공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선통신은 의사소통을 공간적으로 크게 확장시키는 한편 시간적으로는 거의 동시에 가깝도록 단축시켰다. 사람들은 말 그대로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몇몇 사람들이 유선전화와 전신기를 통해 그런 놀라운 경험을 했겠지만 무선통신은 그 경험을 전지구적인 수준으로 확장시켰다.


타이타닉호의 침몰과 그 소식이 퍼져나가는 과정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충격은 현재의 우리가 명왕성 궤도에서 창백한 푸른 점으로 간신히 보이는 지구의 사진을 접했을 때 느끼는 경이로움과 다르지 않다. 큐리오시티가 생생하게 보여주는 화성의 풍경을 볼 때 느끼는 생경한 신기함과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비유가 썩 와닿지 않는다면,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핸드폰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놀라움, 웹 브라우징이 자유로운 스마트폰이 처음 선보였을 때의 신기함을 생각해보면 어떤 느낌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기파를 이용한 무선통신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꾸준히 인류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미국과 영국을 오가던 전파는 출력을 높여 정지궤도의 위성과 지상을 연결해주는가 하면, 극초단파의 영역에서는 우주공간의 탐사선과 지구의 관제센터를 연결해주기도 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자, 보이저는 160bps의 속도로 지구와 지속적으로 교신하면서 지구로부터 명령을 받아들이고 수집한 자료들을 지구로 쏘아보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외롭게 헤치고 날아온 전자기파 신호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지만, 그 신호가 의미하는 바는 다분히 감성적이고 철학적이다. 적어도 현재 수준에서, ‘인간은 태양계 어디라에라도 존재할 수 있다.’

지금 무선통신이 당연한 서비스로 인식되고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시간간격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듯, 언젠가는 지구를 넘어선 곳까지도 자유롭게 교신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 최근 여러 나라에서 연구중인 양자통신이 그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신기술이 도입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새로운 통신기술은 사람들의 생각의 지평을 또 한 번 확장시킬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새로운 생각의 지평에 익숙해지는 순간,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 본 콘텐츠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의 온라인 뉴스레터 KOITA IN 21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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