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공업기술 100년간의 온고지신

2013.08.28 00:00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통화 개입을 통한 엔저 정책이 핵심인, 이른바 ‘아베노믹스’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망해가는 것처럼 보이던 일본의 기업들이 보란 듯이 회생했다. 일본 전자기업 상위 9개의 영업이익을 모두 합쳐도 삼성전자 단일기업의 영업이익에 미치지 않았던 2010년은 이제 옛일이다. 상황은 반전됐다. 한국이 저성장의 늪에서 허덕이며 일본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장률을 보인 반면 니케이 지수는 연일 기록을 경신하며 치솟고 있다. 한참 후발주자였던 한국의 추월을 허용할 정도로 장기간 불황의 늪에서 허덕이며 일본에 대한 회의론이 세계적으로 만연했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변화다.





사실 일본의 부진은 착시효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비교부터 불공정했던 것이, 전자, 조선, 철강, 자동차 등 한국이 나름 ‘잘 나가는’ 분야만 비교 대상으로 삼아왔다. 6배가 넘는 국내총생산 중 한국이 그나마 따라잡은 ‘일부’를 두고 일본을 넘어섰다거나 하는 형국이었던 셈이다. 


사실 일본 산업의 진정한 저력은 오랜 기간 다져진 시스템과 기계 등의 기초 체력에 있다. 전자, 자동차, 선박 등 제조업과 달리 철강, 기계 등 타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산업분야는 한국이 일본보다 절대적인 열세다. 철강 분야만 하더라도 철강 생산의 핵심인 고로가 한국에는 포스코와 현대제철, 두 군 데 다 있을 뿐이지만 일본은 5개가 넘는 고로를 보유하고 있다. 그나마 현대제철도 2000년대 들어 출범한 신생 기업일 뿐이다. 한국이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전면전을 벌이는 동안 일본은 얼굴에서는 피가 터지고 이가 나갈지언정 뒤에서는 든든한 코치진이 버티고 있었다.


산업기술과 운동은 비슷한 점이 많다. 운동은 지름길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을 짜고 실력 좋은 트레이너가 투입된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산업기술 역시 아무리 신기술을 도입하고 핵심 노하우를 타국에서 훔쳐온다고 하더라도 기술이 성숙하여 산업에 응용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나 게임에 등장하는 것처럼 시대를 초월한 기술이 뚝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기술을 이해하고 실현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인프라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한국과 일본의 기초 체력 차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근대 공업을 도입하고 발전시키는 데 소요된 시간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게다가 내수시장의 규모나 기업활동의 다양성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한국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반도체 분야만 하더라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DRAM과 NAND형 플래시메모리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는 있지만, 이는 반도체 시장의 일부일 뿐이다. 규모의 경제를 두고 삼성전자와 치킨 레이스를 벌이다가 엘피다와 도시바가 피를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동차용 반도체의 NEC, 촬상소자분야에서 정상을 지키던 소니, 히타치제작소와 미쓰비시 전기라는 두 거인이 합작하여 마이컴 분야를 장악한 르네사스 등이 버티고 있다. 이들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자동차, 전자, 선박 등에 반드시 필요한 부품이므로 부품시장에서 대일의존도를 여전히 높게 유지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기도 하다.

 



다른 점만큼이나 닮은 점도 많은 일본과 한국이 왜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일까.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면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나고 권력과 주권을 덴노에게 반납하는 데 동의했다. 이른바 ‘다이세이호칸(大政奉還)’이다. 같은 해 12월, 에도시대 말기 웅번(熊藩)으로 도쿠가와 체제 전복에 앞장섰던 사쓰마와 조슈의 군대가 교토로 진군했고 마침내 1868년, 바쿠후가 폐지됐다. 메이지 유신의 시작이었다.


흔히 도쿠가와 체제 전복과 메이지 유신의 시작점을 ‘흑선내항’으로 잡곤 한다. 1853년, 매튜 페리 제독의 미 해군 동인도 전대가 이즈국의 시모다 항(현재의 요코스카)에서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인 사건을 말한다. 흑선은 바로 목선과 대비되어 거무스름하게 보이던 서양식의 철선을 일컫는 말이다. 단 두 차례의 무력시위만으로 바쿠후는 쇄국정책을 포기했고 누가 보아도 불평등했던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 사건은 바쿠후가 사실상 무기력한 종이호랑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위정자들에게 서구에 대해 열등감과 선망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깊이 새겨놓았다. 압도적 무력의 흑선 앞에 수세적인 자세로 일관했던 바쿠후와 달리 야심만만한 메이지 정부의 요인들은 정파를 초월하여 ‘서구 야만인을 제압하려면 그들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쇄국을 깨고 세계의 각국과 경쟁하려면 바쿠후 말에 대충 체결됐던 불평등 통상조약을 바로잡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자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실력을 쌓아야 했던 것이다.


자연히 메이지 정부의 요인들은 유럽과 미국을 직접 돌아보곤 했다. 이들은 금세 유럽 국민국가들의 힘의 원천이 강력한 제조업과 무역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기도 다카요시의 경우, 1872년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면서 자신의 일기장을 ‘서양의 건축, 교육, 산업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한 성취를 이뤘다’는 감탄사로 채워넣을 정도였다.


메이지 국가의 최우선 국정과제인 부국강병의 길도 자연히 산업경제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조세개혁으로 재정을 확보한 메이지 정부는 곧 공공사업과 제도를 정비하는 데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정부가 앞장서서 해운업 발전을 위한 항만과 등대를 설치하고 전신망을 구축했으며 민간의 개인 투자자에게는 주식회사 설립을 장려했다. 모두 유럽 국가들의 제도를 모델로 한 조치였다.


메이지 정부의 정책 중 주목할만한 부분이 바로 철도망 확충이다.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보았듯, 철도는 산업경제를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 역시 민간인의 철도 투자를 장려하였으며 곧 구 다이묘와 상급 사무라이, 부유한 평민들이 철도 사업에 뛰어들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모든 과정에서 외국자본의 유입을 최대한 차단했다는 것이다. 대형 공공사업을 위한 차관 제공이 식민화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중동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사례로부터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내의 민간경제에 자율권을 부여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은 근대적 경제에 대한 경험이 짧고 지식이 짧은 민간의 투자가들이 서구식의 산업체를 운영하기에 적합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일본 최초의 근대적 사업체들은 대부분 국고를 투입하여 설립한 국영기업이었다. 이들은 ‘시범사업’의 성격이 강해서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민간에 매각되었지만, 여전히 산업경제의 동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상품생산량 증가의 근본 원인이 정부의 독려였다는 점을 실토했으며 1884년에 한 고위관리도 일본인들이 외국의 기계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기껏 들여온 기계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한다며 한탄했다.


자연히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정부 내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당시 국제 정세에서 일본의 위치만 보아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서로 경쟁하는 국민경제 집단들의 각축장인 세계에서 후발주자가 택할 수 있는 전략은 영국식의 자유방임이 아니라 독일식의 국가주도형 경제모델이었다.





1880년대까지도 민간 산업은 맥을 못 추고 있었지만, 메이지 정부의 노력은 1890년대 들어 본격적인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메이지 후기인 1890~1910년 동안 일본의 제조업 생산량은 세계 평균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철도교통망의 발전으로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민간의 투자규모도 많이 늘어났다. 물론 고통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갓 생긴 주식시장에 가산을 쏟아부었다가 재산을 날려 먹은 사람들이었다.


산업경제를 배우는 과정에서의 호된 신고식인 셈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기회기도 했다. 몇몇 기업들은 이 시기 정부와의 유대관계를 이용하여 연관 산업군 전반을 아우르는 ‘자이바츠(財閥)’로 성장했다. 현재 수백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미쓰이와 스미토모는 도쿠가와 시대의 상인 집안 출신으로 이 시기에 정부 요인들과 유착하면서 기업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미쓰비시는 메이지 시대에 출범하여 대전기의 핵심 군수산업체를 거쳐 현재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메이지 시대 일본 기업의 성장 배경에는 비교적 값싼 노동력시장이 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일본의 산업은 꾸준히 기계화되었지만, 노동생산성은 서구보다 한참 뒤졌다. 자연히 긴 노동시간과 낮은 임금으로 이를 벌충해야 했으며 아직 노동계급의 형성이 본격화되지 않은 동안에는 성장률을 높게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특성만으로 일본 기업의 도약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쇼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기술력은 꾸준히 향상하여 외견상으로나마 서구 국가들에 필적할 수준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경제주체가 바로 국가였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이 노동비용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 자본 집약적 테크놀로지 산업을 장려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철도 관련 산업이다. 1890년대만 해도 일본은 기관차와 선로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일본 내 믿을만한 철강회사나 기관차 제조업체가 거의 없었으며 그나마 있는 한 줌의 기업들도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다. 국내 경제에 해외 자본이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메이지 정부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움직였다. 1896년에 야하타 제철소를 설립한 것을 필두로 기관차 제작, 토목, 조선 등 주요 기간산업의 민간 제조업자를 보조하는 데 꾸준히 국고를 투입했다. 한편 우후죽순으로 민간자본이 유치되던 철도 산업을 국유화하는 작업도 진행하여 1906년에 이르면 대부분 철도 노선을 정부가 직접 운영했다.


정부가 철도망을 장악하면서 생산자에게 국산품을 사용하도록 압력을 넣기 수월해졌다. 야하타제철소와 철도산업 관련 기업들은 대규모 수요처를 거의 독점적으로 확보하여 설비와 기술투자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이 조치는 일본 중공업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약 철도 국유화 조치가 없었다면 근대적인 산업기반을 형성할 정도로 큰 중공업 시장을 확보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국가주도의 경제구조는 거의 선동에 가까운 ‘기업가 정신’과 결합하여 서구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독특한 경제관을 탄생시켰다. 대부분의 민간 기업들은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겠다는 야심만만한 청년들이 일구어내었으나 이들의 시장을 형성하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대규모 사업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음험한 이전투구에서 뒤를 봐 준 장본인은 바로 국가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재벌, 미쓰이만 하더라도 1876년 메이지 정부에서 공부경(工部卿, 산업부 장관에 해당)을 역임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주선하여 정부 소유의 미이케 광산에서 나오는 석탄을 독점 판매할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주문은 간단했다. “우리는 까다롭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귀사는 석탄을 생산원가에 가져가 곧장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지 정부의 유력인사들은 시장경제의 기본적 전제인 개인의 이기심을 통해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명제를 믿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핵심적인 실업가 중 한 명인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그 자신이 주식회사의 개념을 일본에 도입했으면서도 “사람들은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자리에 오르기를 갈망하지만, 만약 이기심만을 내세운다면 사회질서와 국가의 평온함이 무너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가 주도하여 핵심 기업에게 사업을 몰아주고 온갖 혜택을 제공하는 메이지 시대의 산업구조는 자본축적을 가속화시켜 빠르게 기술을 축적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했다. 이와 함께 기술의 핵심 주체인 숙련공들의 입지도 크게 변화했다.

한창 때 ‘종신고용’으로 유명했던 일본 기업들이지만 산업화 초기만 해도 일본의 숙련공들은 이직을 하는 데 익숙했다. 남성노동자가 숙련공으로 인정받으려면 여러 작업장에서 경험을 쌓고 스스로 공부하고 후원자를 확보하여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켜야 했다. 당시의 노동환경은 도쿠가와 시대 도제식 공업시스템과 비슷한 면이 많아서 이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자기 자신의 공장을 여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유연성이 높은 현대적인 노동시장처럼 보이지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이들은 제대로 된 교섭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직장을 전전했다는 점이었다. 자기 자신의 개발을 최우선에 두면서 직장과 자신을 1대 1로 결부시키지 않는 풍토는 역설적으로 이직률을 높여 노동계층의 조직화를 방해했다. 산업화 초기 태동했던 일본의 노조 운동은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과 함께 높은 이직률 때문에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해 1900년에 이르면 씨가 말라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환경은 불안한 긴장상태를 유지했다. 기술을 보유한 숙련공들은 자신들의 낮은 지위에 모멸감을 느꼈고 생활 수준 향상과 함께 ‘명예’도 요구했다. 메이지 시대 가장 조직적인 파업 중 하나였던 1899년 일본 국철 기관사들의 파업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 중 하나가 ‘자신들의 직함이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이 필요치 않은 사무원이나 역장보다도 지위가 낮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 바꿔달라는 것’일 정도였다.


기업들은 유연하게 대처했다. 노동자들의 정치세력으로 조직화하는 것은 교묘하게 방해하면서도 기업에 순응하고 유능한 숙련공들에게는 폭넓은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 많은 기술자가 기업의 후원으로 선진국에 파견되어 기술을 배워 왔으며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는 동시에 기업활동을 통해 국가에도 이바지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다. 서구식 고등교육기관이 설치되고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한다는 교육이념의 세례를 받은 젊은 인력들이 유입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숙련공들의 고급 지식과 전문기술이 기업에 집중되는 한편으로, 기업 자신들도 집중화됐다. 1920~1930년대 동안 일본을 뒤흔든 재정위기는 수많은 중소기업을 무너뜨렸다. 이들은 고스란히 정치력과 자본력을 보유한 재벌들에게 넘어갔다. 4대 그룹인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야스다를 비롯한 8대 재벌은 1918년에도 이미 제조업, 광업, 무역업 부문에 투자된 민간자본의 20%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1927년의 금융공황을 기회로 삼아 재벌기업의 은행들이 수많은 중소기업의 지분을 사들였다.


재벌들은 소규모 기업들이 감히 모방할 수 없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투입할 수 있는 자본과 노동력의 단위부터 달랐으며 정부와의 유착을 통해 각종 이권사업과 독점시장을 확보함으로써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했다. 이렇게 축적된 자산과 사업역량은 고스란히 기술축적으로 이어졌다.


재벌들의 기술축적은 역설적으로 대전기에 크게 발전했다. 2차대전 기간 동안 일본은 대부분의 서구 열강과 관계가 끊어져 이전처럼 적극적인 기술도입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때까지도 일본의 기술 수준은 서구에 필적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계기술만 하더라도 국산 가공 선반으로 채운 본토의 조병창보다 독일제 선반을 설치한 공작함(工作艦) 시나노의 생산성이 더 높을 정도였다. 교전상대들이 주력기를 두세 차례나 갈아치우는 동안 2차대전 내내 제로센으로 버텨야 했던 제국해군의 상황만 보아도 당시 일본 공업기술의 열악함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이 기간은 기술적 정체기에 가까웠던 셈이다.

 



그러나 재벌들의 시장장악력은 크게 확대됐다. 재벌들은 군부와 정부의 요인들과 연이 닿아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군수산업을 완전히 장악했다. 총력전 체제에 돌입한 일본으로서는 모든 사업 기반이 재벌의 수중에 있었던 셈이다. 자연히 민간 소비재가 중심인 석유화학과 가전은 크게 낙후됐지만 군수산업과 직결되는 조선, 철강, 기계, 화학산업은 비대할 정도로 덩치가 커졌다.


패전 후에도 이러한 구조는 변화하지 않았다. 패전 직후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 해외로부터 기술을 도입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특정 기업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충분한 산업기반과 경험을 보유한 재벌들에게 많은 혜택이 돌아갔다. 일본제국 시절의 관료들 상당수가 그대로 ‘새로운 일본’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일도 수월했다.

 



메이지 시대부터 추진해왔던 기술도입 정책들도 그대로 이어졌다. 도시바, 미쓰비시, 후지 등 주요 전기기업들이 GE, 지멘스 등 해외의 굴지 기업들과 기술제휴 협약을 맺어 신기술을 도입했으며 많은 기업이 기술진을 해외에 파견하여 선진기술을 배워오도록 장려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유럽과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기술현황과 비즈니스 동향을 살피게 했다.


한국전쟁 특수로 외화가 쌓이고 내수 소비력도 폭발적으로 증가한 1960년대에 이르면 신기술 도입과 고성장이 선순환을 이루는 메이지 시대의 상황이 재현된다. 일본 정부가 1960년 ‘무역외환자 유화 대강 정책’ 이전까지 해외 자본의 직접 투자를 제한하는 강력한 보호무역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거의 데자뷔처럼 느껴질 정도다. 요컨대, 현대 일본의 기술축적인 과거 메이지 시대의 경험을 고스란히 발판으로 삼은 결실인 셈이다. 일본의 공업기술 발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정치와 경제의 강력한 유착관계를 기반으로 한정된 자본과 기술을 특정 기업에 집중시킴으로써 연구개발 부문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식 산업화 모델은 이웃인 한국에서도 답습하여 그 결실과 폐해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지만, 이는 또 다른 이야기다.


* 본 콘텐츠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의 온라인 뉴스레터 KOITA IN 19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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