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산업과 아타리 쇼크

2013.05.03 11:27

역시나 관건은 ‘콘텐츠’였다. 소니의 계열사인 SCE(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는 지난 2월 21일 미국 뉴욕에서 차세대 게임 콘솔, 플레이스테이션4(이하 PS4)를 발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 닌텐도의 위(Wii)와 함께 콘솔 게임계의 트로이카를 형성중인 SCE이 야심차게 첫 펀치를 날렸지만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성능과 기능은 확실히 진화를 거듭했음에도 콘솔 버전의 ‘디아블로 3’ 외에 눈에 띄는 타이틀이 없었다. 전작인 PS3가 출시 초반, 킬러 타이틀의 부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만큼 PS4의 성패가 기능이 아닌 콘텐츠에 달렸다는 이야기는 일본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기술 수준이 경지에 이르고 평준화된 이상, 차별화의 핵심은 바로 콘텐츠라는 얘기다.




지금은 수준 높은 개발사가 꾸준히 좋은 작품을 내 주는 콘솔 시장이지만 한때 시장이 붕괴 직전에 이른 일이 있었다. ‘아타리 쇼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요인도 바로 콘텐츠였다.

1970년대, 미국의 술집은 지역의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 공간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전문적인 게임센터나 인터넷 카페가 없을 때라 자연히 여럿이 즐길 수 있는 간단한 게임도 설치되어 오락거리를 제공했는데, 가장 인기를 끈 게임이 ‘퐁’이었다. 1972년 놀런 부쉬넬이 개발한 퐁은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비디오 게임으로 당시 술집마다 설치되어 있던 핀볼을 단번에 몰아내고 최고 인기 게임으로 자리잡았다.

부쉬넬은 퐁의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 ‘아타리’를 설립한다. 바둑광인 부쉬넬이 바둑 용어인 ‘아다리(단수, 외통수)’에서 따 온 이름답게 아타리는 자본금의 수백배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이며 비디오 게임의 전성기를 이끈다.

아타리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은 1977년 개발된 아타리 2600이다. 당시 비디오 게임은 술집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여러 사람들과 즐기는 것이 상식이었다. 부쉬넬은 퐁의 성공 이후 가정에서 비디오 게임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술집에나 가야 즐길 수 있는 스페이스 인베이더, 팩맨, 벽돌깨기와 같은 게임들을 집에서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이 매력적인 기획의 결실이 아타리 2600이다.

예상대로 아타리 2600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개발에 1억 달러가 넘는 비용이 투입되었지만 1980년 한 해만 20억 달러의 순수익을 올릴 정도였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40억 달러(약 5조 원)에 이르는 엄청난 액수다. 당시 가정용 비디오 게임 시장이 경쟁자가 없는 블루 오션이었기에 가능한 실적이었다. 아타리 2600의 성공 후 무선 컨트롤러, 발로 조작하는 컨트롤러, 전화로 결제하여 게임을 다운로드받아 이용하는 서비스 등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상용화되기도 했다. 사실상 지금 사용하는 콘솔 게임기의 거의 모든 기술이 기초 개념은 완성되었던 셈이다.




안타깝게도 아타리 2600의 성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아타리 2600의 개발을 위해 거대 미디어 기업인 워너브라더스를 끌어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1976년 퐁의 성공에 고무된 워너가 부쉬넬에게 접근하여 아타리 매각을 교섭했다. 부쉬넬은 회사를 공격적으로 운영하고자 워너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그와 워너의 경영진은 애초에 사고의 출발점이 달랐다. 부쉬넬은 전형적인 엔지니어이자 게이머였지만 워너의 경영진은 게임산업은 물론, 게임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콘텐츠 산업으로서 게임산업에서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훨씬 중요한데도 이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워너의 경영진과 불화에 시달린 부쉬넬은 결국 회사를 떠나고 만다.

부쉬넬의 빈 자리는 레이 키사르가 꿰어찼다. 키사르는 경영자로서 마케팅에 집중하여 아타리 2600을 괴물로 키워낸다. 아타리 2600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도 실은 부쉬넬이 아니라 키사르였던 셈이다. 문제는 이 전성기가 겉모양만 화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선 개발자에 대한 처우가 너무나도 열악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이 확대되면서 게임 타이틀은 수백만 장씩 팔려나갔지만 개발자의 몫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아직 IT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던 시절이라 워너의 경영진이 개발자의 가치를 낮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게임 개발에 대해 이해하기는커녕 자신의 제품인 게임을 즐겨본 적도 없는 경영진들에게는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손에 잡히는 실물, 기계 자체였지 그 속을 채운 무형의 콘텐츠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1980년대 초반의 이쪽 업계 분위기가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에 수반되는 부록 같은 취급이었던 터라 워너 경영진들의 인식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기발하고 흥미로운 체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게임에는 자유분방하고 기발한 상상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게임 업계는 전통적으로 개발자들에게 별로 제약을 가하지 않고 근무시간이나 복장, 업무 중 규율 등도 매우 느슨하다. 개발자 본인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라야 시장에서 팔릴 수 있다는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아타리도 아무 때나 출퇴근하고 회사 내에서 마리화나를 피워댈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워너는 아타리를 인수한 후 사내의 기강을 철저하게 단속하고 복장과 근무 시간을 꼼꼼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게임은 이전보다 자주, 더 많이 나왔고 생산성도 향상됐지만 이전의 참신한 아이디어는 점차 사라지고 구태의연한 게임들이 양산됐다.

결국은 게임 개발자들이 폭발하고 말았다. 초창기 아타리의 개발자였던 앨런 밀러는 게임 개발자를 하찮게 여기는 경영진에게 반발하여 협상을 벌였지만 자존심 상하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었다. 결국 밀러는 1980년 4월 아타리를 떠나 액티비전을 설립하여 걸작 게임들을 여럿 출시했다. 액티비전은 훗날 ‘콜 오브 듀티’ 프랜차이즈로 대박을 내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 시리즈로 잘 알려진 블리자드와 합병하여 게임업계의 공룡으로 성장했다.

핵심 개발자가 회사를 떠났는데도 워너 경영진은 이전의 방침을 고수했다. 여전히 개발자에 대한 대우는 형편없었으며 콘텐츠의 질보다는 양에 의존했다. 아타리가 유일한 절대 강자였을 때는 이 전략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타리 직원들은 자신이 업계 최고라고 자신했으며 게임은 만드는 족족 팔려나갔으니까. 심지어는 “쓰레기를 카트리지에 넣어서 백만 개는 팔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을 전후하여 경쟁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어려워졌다. 아타리 2600이 성공한 이후 여러 회사가 게임 콘솔 개발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게임 콘솔을 고를 때 고작 3가지 중에서 고민하면 그만이지만 당시에는 10종에 달하는 제품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 등장한 콘솔들이 괜찮은 게임들을 개발해내자 아타리는 다급해졌다. 시장 장악력을 유지하려면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전략을 펼쳐야 했던 것이다.

워너의 경영진은 뭐든지 게임으로 만들어서 내놓기만 하면 몇 백만 장씩 팔려나갔던 경험에 기대어 이번에도 질보다 양에 의존했다. 그저 덩치를 불려놓으려는 목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B급 게임이라도 일단 출시하고 보았다. 당시 게임업계에 제대로 된 개발사라고는 액티비전밖에 없었던 것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게임 시장이 크게 성장하자 게임과는 전혀 연관 없던 기업들이 게임제작에 뛰어들었는데, 이들도 업계 1위인 아타리의 전략을 그대로 답습하여 저질의 게임들이 범람했다. 이 때의 상황을 한 게임 평론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게임기 고르는 데 1주일, 다시 게임 고르는 데 1주일, 게임을 하는 데 1시간, 후회하고 욕하는 데 1년.”




서서히 곪아들어가던 게임시장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1982년, 아타리는 당시 크게 흥행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E.T.의 판권을 구입하여 게임으로 제작했다. 전대미문의 흥행을 거둔 영화인만큼 못해도 중박은 갔어야 할 E.T. 게임은 게임 시장을 붕괴시키는 도화선이 되고 만다.

워너는 2,0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을 들이고도 게임 제작에는 개발팀에 고작 5주의 시간을 주었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출시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개발팀은 이 정도 타이틀이라면 최소 5개월은 필요하다고 항변했지만 아타리의 목줄을 쥔 워너의 경영진은 요지부동이었다. 당연하게도 최종 출시된 게임은 습작인가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그래픽, 테스트는 마쳤는지 의심될 정도로 넘쳐나는 버그, 굳이 시간 내서 할 가치가 있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게임성 등 어느 것 하나 칭찬할 구석이 없었다.

아타리는 이 형편없는 게임을 야심차게도 400만 장이나 출하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썰렁하다 못해 냉담했다. 히트해야 당연할 E.T.를 소재로 돈이 제법 풀릴 크리스마스 시즌에 내놓았음에도 팔린 양이 고작 150만 장에 불과했다. 기대작 E.T.는 어마어마한 물량이 반품되어 악성 재고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황당하게도 아타리는 넘쳐나는 E.T.의 재고를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몰래 뉴멕시코의 사막 한가운데 구덩이를 파고 싹 묻어버렸다.

E.T.의 재앙에 가까운 실패를 계기로 미국의 비디오 게임 시장은 단번에 무너졌다. 지속적인 품질 하락에 지쳐버린 소비자들은 게임에서 마음이 떠나버린 것이다. 당시 3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되던 시장은 이듬해인 1983년, 1억 달러 규모로 급격히 축소됐다. 어찌 보면 과열된 게임 시장의 거품이 꺼지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분쇄’라고 표현해도 될만큼 극적인 변화였다.

‘아타리 쇼크’, 또는 ‘1983년의 비디오 게임 붕괴’라고 부르는 이 사건 이후 게임 개발사들 대부분이 사업에서 철수했다. 시장 규모가 더 이상은 커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타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하드웨어를 출시하고 있었지만 활력을 잃어버린 시장은 침체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완구 업계에 비디오 게임이 독자적인 엔터테인먼트라기보다 여러 완구 중 하나의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좋은 게임기와 게임이 출시되더라도 매장에서 제대로 진열되기 어려웠다. 닌텐도가 이후 패미컴을 발매하여 미국 시장에 진출할 때도 게임기가 아닌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을 상표명으로 내세워야 했다.

아타리는 어떻게든 재기하려 했지만 결국은 프랑스의 인포그램에 매각되어 소규모 게임 개발사로 전락해버렸다. 아타리 쇼크로 황폐화된 미국의 가정용 콘솔 게임기 시장에는 닌텐도나 세가와 같은 일본 업체들이 무혈입성했다. 일본 업체들은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가 나오기 전까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얻고 절대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때 얻은 시장장악력을 바탕으로 일본은 게임대국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타리 쇼크는 게임 시장에서 기술 이상으로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였다. 실제로 미국은 컴퓨터와 반도체, 프로그래밍 등 여러 분야에서 일본보다 기술적으로 우월했으면서도 아타리 쇼크 이후 가정용 콘솔 게임에서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게다가 콘텐츠산업은 그 속성상 대체재가 풍부하다. 이 때문에 주요 소비자들의 충성도가 높기도 하지만 한 번 실망한 소비자들이 다시 마음을 돌리는 일도 드물다. 붕괴된 시장을 회복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타리 쇼크는 콘텐츠 산업 전반에서 곱씹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기술적 차별화가 점점 어려워지는 지금의 시장에서는 더더욱.



김택원 기자

tw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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