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벤처가 살아남는 모범적인 방법

2013.04.26 14:05

모든 소비재 시장 중 가장 변화가 빠른 분야는 아마도 모바일 관련 시장일 것이다. 고작 5년 전인 2008년만 하더라도 스마트폰은 극소수 얼리어댑터들이 ‘갖고 놀기 좋은’ 기기 취급을 받곤 했다. 그러나 2013년 현재 스마트폰은 이동통신의 주력상품이자 IT 기술의 최전선으로 대접받는다. 최신 스마트폰은 2년 전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데스크탑에 필적하는 성능을 갖추는 수준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아예 모바일 기기용 프로세서를 이용하여 노트북 컴퓨터를 만들기도 하고 윈도 8 같은 최신 운영체제는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될 정도다.


이동통신 기기에서 통신 기능을 담당하는 통신 AP(Application Preocessor) 역시 모바일 기기의 발전과 함께 진화를 거듭해왔다. 1973년 모토로라가 휴대전화를 처음으로 발명한 이래 완만한 발전을 거듭하던 이동통신 기술은 1990년대의 2G. 2000년대 초의 3G를 거쳐 최근에는 5G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휴대전화가 단순히 먼 곳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게 된 데는 2G의 역할이 컸다. 이때부터 휴대전화는 음성통화 뿐 아니라 멀티미디어 메시지, 이미지 전송, 모바일 네트워크 접속이 가능해졌으며 다양한 기능을 부가하여 ‘피처폰’이라는 용어를 낳기도 했다. 지금이야 구식 전화기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피처폰이라는 말 자체는 통화와 메시지 외 다양한 기능(feature)을 수행하는 휴대전화라는 뜻이다.
2G 개통은 휴대전화에 멀티미디어 기능을 부여하였으며 3G는 상시적인 온라인 환경을 가능케 함으로써 모바일기기의 부족한 컴퓨팅 능력과 저장공간을 네트워크로 보완할 수 있게 했다. 4G에 이르러서는 휴대전화만으로 Wi-Fi와 같은 일반적인 무선 환경에 손색없는 데이터 통신이 가능해졌다. 결국 2G 기술의 개화는 이동통신기기가 ‘컨버전스 기기’로 진화하여 IT 시장의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지각변동의 주역 중 하나는 미국의 IT 기업 ‘퀄컴’이었다. 퀄컴은 미국 샌디에이고에 본사를 둔 무선통신 연구 개발 기업으로 CDMA 등 2G 관련 주요 기술은 물론, 3G 통신의 핵심 기술 특허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다. 이로 인한 특허료가 퀄컴의 주요 수익처로 퀄컴은 대표적인 ‘팹리스’ 기업 중 하나로 통한다. 현재 모바일 AP의 1인자로 삼성전자와 함께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퀄컴이 지금처럼 모바일 AP의 공룡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한국이었다. 한국인에게도 퀄컴은 휴대전화의 핵심 기술과 관련하여 기사에서도 자주 언급되어 친숙한 기업이다. 퀄컴에게도 한국은 의미가 매우 깊은 중요한 시장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CDMA 기술을 주로 사용하는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의 수익의 상당 부분을 원천기술을 보유한 퀄컴에서 가져갈 정도였다.
사실 퀄컴과 한국 기업들은 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서로 중요한 업무 파트너이기도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퀄컴이 한국 시장 덕분에 급성장했는데 악착같이 로열티만 챙긴다며 비난하기도 한다. 퀄컴 입장에서도 서로 아쉬워서 협력했던 마당에 직접 개발한 기술의 로열티 좀 챙겼다고 쓴소리 듣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퀄컴과 한국의 관계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퀄컴은 당시만해도 작은 벤처기업에 불과했다. 퀄컴은 1985년 UC 샌디에이고 교수로 재직중이던 어윈 M. 제이콥스와 MIT의 동창생인 앤드루 비터비가 주축이 되어 설립했다. 그러나 설립 당시 퀄컴이 직면한 시장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당시 세계적으로 이동통신의 표준은 GSM 방식이었다. 유럽에서 개발된 표준규격인 GSM은 기술적으로는 퀄컴의 CDMA에 비해 불리한 점이 많았으나 표준기술이라는 데 힘입어 사용국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이동통신표준기술로 시분할다중접속방식(TDMA)을 채용하여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인 CDMA는 설 자리가 없어 보였다. 실제로 1990년대 초 퀄컴은 거의 기업이 유지되기도 어려울 정도로 어려웠다.
여기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 바로 한국의 전자통신연구원(ETRI)이다. 전자통신연구원은 당시 GSM 방식을 견제하고 원천 기술을 확보할 목적으로 2세대 이동통신 기술 개발에 참여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동통신 단말기의 1인자, 모토로라에 새로운 이동통신 표준을 공동개발하자고 요청했으나 무선통신기술 경험이 일천한 한국의 파트너십 제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모토로라와의 협상을 담당했던 이원웅 박사는 그냥 귀국하기도 애매하여 이동통신회사인 나이넥스에서 일하고 있는 옛 직장 후배, 오태원 박사에게 찾아갔다. 나이넥스 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자리잡은 오태원은 연구실을 구경시켜주면서 퀄컴이 CDMA를 뉴욕에서 필드테스트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사실 퀄컴의 CDMA는 당시 시장에서 생소한 기술이었다. 대세였던 GSM은 주파수분할다중접속방식(FDMA)와 TDMA를 조합하여 사용하고 있었으며 CDMA는 군용으로 제한적으로만 활용되던 기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술적으로 TDMA보다 한번에 통신가능한 회선도 많고 확장성도 큰데다 보안성도 뛰어났지만 광역 통신에 적용하는 기술은 확립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퀄컴은 CDMA를 지역 통신망에서 확장하여 전국 단위의 통신망으로 발전시키려 하고 있었다.
CDMA 기술은 이원웅 박사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일반 이동통신에 CDMA 기술을 적용한다는 것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기도 했지만 성공만 한다면 GSM 진영과 분명한 자별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발점이 군용 기술이라 신뢰성이나 품질도 믿을만한데다 퀄컴은 학계의 저명인사인 제이콥스와 비터비 교수가 직접 설립한 회사였다. 무엇보다 최근 그 복잡한 맨해튼에서 필드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첫인상은 ‘인상적이지만 끌리지는 않는다’였다. 퀄컴이 성공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테스트일 뿐, 실제 이동통신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광역 통신망을 구성할 때 필요한 시스템기술은 퀄컴에 전무한 상태였다. ETRI는 CDMA가 좋기는 하지만 아직은 먼 기술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공동 개발에 뛰어들어 세계 최초로 전국 단위 상용화에 성공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고전하던 중소기업 퀄컴에 한국의 ETRI가 구명밧줄을 던져준 것으로만 보인다. 그리고 흔히 국내에서는 한국 덕분에 퀄컴이 기사회생했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는 일부만 맞는 말이다. 한국 시장에서의 성공이 퀄컴이 급부상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회를 만들어낸 쪽은 퀄컴 자신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 퀄컴은 제이콥스와 비터비가 설립한 회사는 아니다. 물론 지금의 퀄컴을 두 사람이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회사 설립 자체는 1985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이콥스와 비터비를 퀄컴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은 퀄컴의 최초 설립자인 비터비의 MIT 제자, 앨런 살마시다. 두 사람을 영입할 당시 살마시는 위성을 이용해 차량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옴니트랙스라는 장비를 개발하고 있었다. 요컨대 위성통신을 기반으로 한 GPS 시스템을 개발하는 회사였던 것이다.
제이콥스와 비터비는 퀄컴에 빈 손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전에 ‘링커비트’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위성통신장비를 NASA 등에 납품하고 있었다. 1968년 설립된 링커비트는 폭발적인 성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중요한 통신기술들을 개발해냈다. 링커비트에서 파생되어 나온 회사만 해도 75개에 달하는데, 이는 실리콘밸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페어차일드반도체’가 탄생시킨 기업 숫자의 두 배에 달한다.
기술적으로 중요한 회사인만큼 링커비트에 메이콤이라는 회사가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메이콤은 링커비트의 통신기술을 더 크게 사업화할 요량으로 마침내 회사를 통째로 사들였고 제이콥스는 모처럼 들어온 신규 자금과 새 대주주에게 제법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제이콥스와의 기대와는 반대로 메이콤은 조심스러운 연구개발 전략을 유지했다. 사실 제이콥스에게는 신기술을 통해 정보통신 시장에서 성공하겠다는 비전이 있었다. 정보통신기술계의 두 유명인사가 설립한 회사인만큼 허황된 꿈은 아니었다. 그러자면 연구개발에 공격적으로 투자해서 신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장을 선점해야 하는데 메이콤의 정책이 제이콥스의 성에 차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1980년 제이콥스와 비터비는 회사를 나오고 링커비트 매각시 ‘동종 업계에 5년간 근무하지 않는다’는 조항에 따라 1985년에야 퀄컴에 합류한 것이다.
당연히 제이콥스와 비터비에게는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되고 NASA와 군부대에서 실증을 거친 통신기술들이 있었다. 게다가 제이콥스는 유능한 연구자이자 세일즈맨이기도 했다. 당장 퀄컴의 사장 자리를 제이콥스가 차지했고, 그가 은퇴하자 아들인 폴 제이콥스가 자리를 이었다는 데서 제이콥스의 경영 수완을 짐작할 수 있다. 제이콥스와 비터비의 연구 경험과 경영 수완을 활용하여 군에서 사용되던 진일보한 무선통신 기술, CDMA를 대중화하는 것이 퀄컴의 중요한 비전이 되었다.
TDMA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 이동통신업계에서 CDMA는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CDMA는 소규모 네트워크에서는 그 가치가 입증되었지만 대규모 통신망을 구축한 적은 없었고 이동통신 표준을 담당한 국가기관들이 TDMA를 밀어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이콥스는 통신기술만 생각했지, 대규모 통신망을 운용할 때 필요한 시스템 구축 등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내 이동통신 표준에서도 TDMA에 밀려났다. 표준에서 밀려난 이상 어떻게든 자구책을 찾아 살아남아야 할 판이었다.
여기서 빛을 발한 것이 제이콥스의 영업력이다. 당시 미국 최대 통신기업인 AT&T에는 통신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7개의 자회사가 있었는데 이들을 AT&T의 전신인 벨의 이름을 따서 ‘베이비 벨’이라 일컬었다. 제이콥스는 기지를 발휘하여 베이비 벨 중 3개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쯤 되자 모기업인 AT&T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AT&T가 직접 퀄컴에 대한 투자를 발표하고 이어 경쟁사인 모토로라도 투자 의사를 밝혔다. 이렇게 모인 금액만 2,500만 달러. 아직 개발중인 기술을 두고는 파격적인 성과였다.
거액의 투자가 가능했던 데는 제이콥스와 비터비의 이름값도 한몫 했다. 제이콥스는 정보통신업계의 유명인사였고 비터비는 노벨상이 정보통신분야에도 주어진다면 수상 1순위로 꼽힐 만큼 뛰어난 연구자였다. 여기에 AT&T와 모토로라의 투자까지 겹쳐지자 그야말로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사실상 투자자들은 CDMA 기술보다는 제이콥스와 비터비라는 이름을 더 중요하게 여긴 셈이다. 요컨대 한국에서 흔히 오해하듯 ETRI와 접촉하던 시점의 퀄컴은 그저 그런 무명의 벤처회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드 테스트를 통과했음에도 CDMA의 진전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기지국과 기지국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기껏 테스트까지 성공해 놓은 무선통신 서비스도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으니 상용화는 요원했다. 투자자인 AT&T와 모토로라도 기술 자체보다는 투자가치에만 중점을 두었는지 시스템 기술 개발에는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CDMA 기술 중 70%가 시스템 기술이라는 것이었다. 자연히 상용화를 목표로 어떻게든 시스템을 함께 개발할 수 있는 곳을 찾는 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ETRI와의 접촉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원웅 박사의 미국 방문 이후 ETRI 강당에서는 미국의 이동통신 기업, ‘팩텔’의 부사장인 윌리엄 리가 이동통신기술의 흐름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었다. CDMA 홍보에 열심히던 퀄컴은 어떤 기회를 감지했는지, 윌리엄 리에게 살마시 부사장을 붙여서 보냈다. 세미나는 애초부터 CDMA라는 신기술을 홍보하는 장이었다. 정보통신계의 유명인이 당시 상용화를 눈 앞에 두고 있던 TDMA보다 CDMA에 비중을 두어 설명하고 이어 살마시 부사장이 직접 퀄컴과 CDMA에 대해 설명하자 세미나장의 연구원들은 CDMA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퀄컴이 제이콥스와 비터비의 회사라는 사실이 알고 난 후에는 아예 CDMA에 큰 기대를 거는 사람도 있었다. 이 방문으로 TDMA 기술을 어떻게든 확보하려던 ETRI의 분위기기 급반전한다.

 

 


새로운 무선통신방식을 간절히 원했지만 GSM을 포함한 TDMA 진영으로부터 찬밥 취급을 당한 ETRI, 통신 기술은 개발했지만 시스템이 없어 상용화를 못하던 ETRI는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졌다. 퀄컴은 CDMA 시스템을 공동 개발하면 기술을 팔겠다고 제안했다. 기술은 무슨 기술이냐며 완제품만 사가기를 원했던 TDMA에 비하면 이나마도 좋은 조건이었다. 1990년, 마침내 ETRI와 퀄컴은 양해각서에 서명하고 협력에 들어갔다.
사실 양해각서는 그저 ‘잘 해 보자’는 정도의 의미지만 당황스럽게도 퀄컴은 ETRI에게 불과 1년만에 공동개발협약을 들이밀었다. 그만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성공가능성이 불투명한 CDMA를 두고 ETRI와 당시 담당부처인 체신부 내에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과감하게 자체 기술을 개발하는 데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CDMA 기술은 오랜 진통 끝에 마침내 1996년, 세계 최초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이 상용화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 퀄컴은 한국이동통신이 상용화를 위해 시행착오를 거치는 동안 이미 다음 수순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술이 완성된 마당에 CDMA시장 확대를 더 이상 미루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퀄컴은 TDMA 진영을 피해 중국과 일본 등 신흥 시장을 노리는 한편 CDMA 휴대전화와 네트워크 설비를 제조하는 데 뛰어들었다.
퀄컴으로서는 후발주자로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치였다. 협력사 등에 장비 개발을 맡겨두었다가는 언제 전체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무엇보다 퀄컴 자신의 의욕을 타 기업들이 쫓아올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드웨어 제조사업은 재앙에 가까웠다. 하드웨어 제조에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투입되었고 퀄컴의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시가총액이 얼마나 낮아졌는지 당시의 삼성이 마음만 먹으면 퀄컴을 통째로 인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국가적 기밀 수준에 해당하는 군용통신기술을 지닌 기업을 삼성이 매입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 시점에서 퀄컴은 다시 한 번 과감하게 모험수를 둔다. 1998년 하드웨어 제조 부문을 모조리 매각해버린 것이다. 이로서 퀄컴은 순수하게 CDMA 통신칩 설계와 기술을 통한 라이센스 사업에 역량을 집중했다. 이 때 내놓은 하드웨어 부문은 얄궂게도 주요 경쟁사 중 하나인 에릭슨이 매입하여 나중에 퀄컴의 발목을 제대로 잡게 되겠지만 이는 또 다른 얘기다.
퀄컴의 ‘팹리스’ 전략은 보기좋게 들어맞았다. 퀄컴은 포트폴리오를 확장하여 CDMA 관련 기술을 독점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QTL(Qualcomm Technology Licensing)을 설립하여 자사의 특허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지식재산권을 핵심 자산으로 삼는 기업으로 변신하고 나서 가장 달라진 점은 시장장악력이었다.
QTL은 퀄컴이 개발한 기술에 대한 특허를 관리할 뿐 아니라 시장 상황에 따라 관련 기술을 사들여 지식재산권을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단순히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꾸준한 지식재산권 관리를 통해 타 업체에 대한 장벽을 형성한 것이다. 덕분에 CDMA는 전 세계 시장의 20% 남짓한 몫만 차지했음에도 퀄컴은 독보적인 시장장악력을 이용하여 최대의 모바일 AP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퀄컴의 성장세는 스마트폰 시대 이후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스냅드래곤’ 시리즈를 통해 여전히 시장 1위를 고수하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퀄컴은 엔지니어 중심의 벤처기업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기업이 개발한 기술은 그 기술적 완성도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CDMA 기술이 개발되는 동안, TDMA에 비교했을 때 명백해 보이는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초기 투자자 중 누구도 기술 개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데서 잘 엿볼 수 있다. 퀄컴은 보유한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ETRI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울 기회를 얻고 도약의 발판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일단 시장이 형성되고 나자 퀄컴은 철저한 수성 전략을 고수했다. 한때 하드웨어 생산에 눈길을 돌리기도 했지만 퀄컴은 자신들의 강점이 기술에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직원의 50% 이상을 엔지니어로 유지하고 연구조직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장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기술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특허 관리를 통해 경쟁자를 물리쳤다. 요컨대 퀄컴은 기술적 우위를 어떻게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모범답안을 보여준 셈이다. 이 과정에서 ETRI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국 시장이 발판 역할을 한 것도 맞지만 퀄컴의 적극적인 전략이 없었다면 CDMA도, 지금의 모바일 AP 기업 퀄컴도 없었을 것이다.


김택원

twkim@donga.com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댓글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