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더 고통의 시간 보내야 하나” 말기환자들 긴 한숨

2016.01.11 18:03


[동아일보] [웰다잉法 통과 이후]<上>혼란 커지는 연명의료 현장

《 8일 국회를 통과한 웰다잉법(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에 대한 기대가 높다. 말기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줄 것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많다. 하지만 세밀한 후속 조치가 이어지지 않을 경우 생명 경시를 부추길 수 있다는 경계론도 적지 않다. 앞으로 넘어야 할 과제들과 현장의 목소리, 바람직한 해법을 상·중·하 3회에 걸쳐 진단한다. 》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이 오면 2018년 웰다잉법 시행 전이라도 연명의료를 받지 않고 품위 있게 가고 싶다.”

경기의 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안모 씨(78)는 지난해 7월 방광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항암 치료가 불가능해 서울의 한 호스피스 병동에서 산소호흡기, 영양제, 진통제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3개월 남짓. 2년 후인 2018년 웰다잉법 시행은 그에게 너무 먼 이야기다. 안 씨는 “침대에 묶여 영양제에 의지해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게 너무 고통스럽다”라며 “법 시행 이전이지만 연명의료를 거부할 것이다. 영양제도 당장 끊고 싶다”고 말했다.

○ 연명의료 중단 요구 급증할 듯

웰다잉법 통과로 안 씨처럼 연명의료를 중단하려는 말기 환자들이 크게 늘 것으로 예상된다. 법 시행 전 ‘2년의 유예기간’ 동안 일선 병원들이 혼란을 겪을 가능성이 큰 이유다.

현재도 임종기 환자는 사실상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 2009년 김 할머니 사건 당시 연명의료를 중단했던 의료진이 무죄 판결을 받은 뒤부터 관행적으로 연명의료 중단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의사 1명의 판단과 가족의 동의만으로도 임의로 연명의료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박상근 대한병원협회장은 “2018년 웰다잉법 시행 전까지 연명의료 절차가 병원마다 달라 혼란이 클 것이다”라며 “오히려 법 시행 이전에 연명의료 중단이 과잉돼서 일어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정부가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 ‘식물인간’ 환자들의 여전한 한숨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대상을 ‘임종을 앞두고 있는 환자’로 한정한 것도 논란거리다. 연명의료를 가장 많이 시행하고 있는 뇌사상태(식물인간)는 대상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아버지가 교통사고 후 뇌사상태에 빠진 김모 씨(35)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호흡이 불안하다는 연락을 받아가며 치료비 마련을 위해 일하는 가족 입장에서는 이번 웰다잉법 통과가 아쉽다”라며 “임종 직전 환자뿐 아니라 다른 환자들에 대한 연명의료도 조심스럽게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종교계는 식물인간의 연명의료 중단만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뇌사상태는 뇌는 죽어 있지만 신체 기능은 유지되는 상태이기 때문. 확률은 극히 낮지만 다시 의식이 돌아오는 기적이 생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센터장은 “지금도 현장에서는 식물인간 환자의 연명의료를 중단해 달라는 가족의 요구가 가장 거세다. 앞으로 웰다잉법의 적용 대상에 식물인간을 포함시킬지가 첨예한 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 불효자의 진술 입맞춤 막을 방법 없어

웰다잉법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도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환자 본인이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라는 의사를 물증으로 남기지 않았을 때가 가장 문제다.

웰다잉법에 따르면 가족 중 2명이 “환자가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와 같은 증언을 해야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 당초 종교계는 본인이 사전의향서, 일기장, 유언장 등을 통해 실증적 증거를 남겼을 때만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토록 해야 한다고 반박해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족 2명의 진술을 물증과 비슷한 증거로 인정한 셈이다. 최악의 경우 가족 2명이 위증을 했을 경우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는 셈이다.

환자가 회생 가능성이 없고, 사망에 임박했다는 판단을 ‘해당 분야의 전문의 2명’으로 규정한 것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대학병원의 경우 대개 환자 상태는 주치의가 가장 면밀하게 살핀다. 하지만 주치의가 전문의 이상(전임의, 교수)이 아닌 전공의(레지던트)일 가능성도 크다. 이럴 경우 환자를 드문드문 봤던 의사가 회생 불가능 판정을 해야 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정통령 보건복지부 생명윤리정책과장은 “상위 법에 너무 강한 규정을 하면 병원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라고 전제하면서도 “앞으로 2년 동안 하위 법령으로 논란 지점들을 보완하겠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말기 중증환자에 대해 너무 쉽게 포기하는 분위기가 확산될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박 회장은 “웰다잉법은 현재는 임종기 환자로 한정돼 있지만, 전체 중증환자 치료 경향에 큰 영향을 줄 공산이 크다”라며 “환자 가족들이 패배주의로 흐르고, 자칫 ‘늙으면 죽어야 돼’라는 인식이 커질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 판사 “법 마련됐으니 더는 혼란 없어야”… 의사 “연명의료 환자 고통 덜게 돼 다행” ▼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 당시 1심 판사-의사 “늦었지만 다행” 한목소리


19년 전 ‘환자의 죽을 권리’ 논란을 촉발했던 서울 ‘보라매병원 사건’의 당사자인 의사 A 씨와 그에게 1심에서 살인죄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던 권진웅 전 서울지법 남부지원 부장판사(60)는 웰다잉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데 대해 10일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A 씨는 보라매병원에 파견돼 레지던트로 근무 중이던 1997년 12월 뇌출혈 수술을 받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던 김모 씨를 퇴원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신경외과 전문의 B 씨 등과 함께 기소됐다. 권 전 판사는 A 씨와 B 씨에게 이듬해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퇴원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살인죄로 처벌된 것은 처음이었고 거센 논란이 일었다. 2004년 대법원이 A 씨 등의 죄목을 살인방조로 바꾸고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감형한 뒤에도 논쟁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현재 경북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A 씨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의료진이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결정할 때 참고할 만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혼란이 컸다”며 “인공호흡기와 혈액 투석 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무의미하게 생을 이어가야 했던 환자들의 고통도 이제는 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인 권 전 판사는 “환자의 연명의료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진행돼 진작 실질적인 법령과 제도가 마련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털어놓은 뒤 “법이 마련됐으니 같은 논란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판결 이듬해인 1999년 법복을 벗었다.

권 전 판사의 어머니는 수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현재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연명의료의 대상인 셈이다. 초기에는 자가 호흡이 어려워 인공호흡기를 달았지만 고비를 넘긴 뒤에는 호흡기를 다시 달지 않았다. 권 전 판사는 “수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다른 환자들을 본 뒤로는 환자 가족들의 현실적 어려움도 절실히 느껴졌다”며 “어머니는 워낙 고령인 데다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다시 호흡기를 달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권 전 판사와 A 씨 모두 웰다잉법을 반겼지만 법정에서의 아픈 기억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듯했다. A 씨는 “나를 비롯한 의료진은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의료진을 살인범으로 내몬 판결 탓에 억울하고 분노도 들었다”고 말했다. 반면 권 전 판사는 “당시 환자는 계속 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가능성이 많은 상태였기 때문에 의료진이 퇴원시키지 말았어야 했다는 판단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건희 becom@donga.com·임현석 기자
유근형 no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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