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경영, 예술까지, “이렇게 재미있게 살다니”

2016.01.07 18:00

 

검은 스웨터 위로 가지런히 놓인 셔츠 깃, 뿔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선한 눈매. 5일 대전 서구 둔산대로에 위치한 식당 ‘구르메’에선 만난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생명연) 책임연구원(50)은 ‘댄디’ 그 자체였다.

 

정 연구원은 1991년 생명연에 입사해 최첨단 연구 분야인 ‘합성생물학’을 연구하고 있다. 24년, 인생의 절반가량을 생명연에서 보낸 ‘생명연 사람’인 셈이다.

 

초면에 대뜸 그의 첫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될 ‘생명연’으로 3행시를 지어달라고 했다. 잠시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더니 그는 곧 “생사의 갈림길에 서 계십니까 명령만 주십시오 제가 연구하겠습니다”라는 재치 있는 답변을 내놨다.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생명공학자로 시작해 기업을 만들고, 기술이전전문가로도 활약하는 등 다채로운 이력을 가졌다.  - 대전=신선미 기자, vamie@donga.com 제공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생명공학자로 시작해 기업을 만들고, 기술이전전문가로도 활약하는 등 다채로운 이력을 가졌다.  - 대전=신선미 기자, vamie@donga.com 제공

●생명공학자, 기업인, 기술이전전문가…‘다채로운 경력’을 말하다

 

“조용히 이야기할 곳을 찾다 보니 여기가 생각났어요. 지금은 한정식집이지만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 시절부터 이곳을 즐겨 찾았습니다.”

 

정 연구원이 미리 주문해 둔 메뉴가 나왔다. 색과 모양이 다채로운 찬들이 한 상 위에 펼쳐졌다. 오이와 해파리가 층을 이룬 냉채와 자그마한 녹두전, 반듯한 사각형을 그린 떡갈비 등 찬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은 느낌이었다.

 

상을 향한 눈길도 잠시, 상차림보다 더 다채로운 정 연구원의 인생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KAIST에서 석사 학위를 마치고 생명연에 입사한 그는 프랑스에서 미생물생명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연구에 빠져 살던 그는 2000년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국내에서 진행한 연구로는 처음으로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 논문을 발표한 뒤, 이 기술을 백신에 적용한 연구로 2000년 같은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기술에 확신을 가진 그는 동료 연구원과 함께 2000년 ‘제노포커스’를 창업했다. 상업용 효소를 개발하고 제품화하는 회사다.

 

2001~2004년에는 아예 연구소에 휴직원을 내고 회사 일에 매달렸다. 제노포커스는 ‘효소’ 아이템 하나로 성장해 지난해 코스닥 상장 기업이 됐다.

 

연구자에서 사업가로 ‘변신’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정 연구원은 “신념이 있었다”며 “기술을 바탕으로 회사가 성장할 수 있고, 실험실 속 기술이 산업과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을 꼭 보이고 싶었다”고 밝혔다.
 
생명연에 돌아와서도 기업을 끌어 온 경력을 살려 연구원의 기술을 산업과 잇는 ‘TLO(기술이전전담조직)’를 맡았다. 이내 ‘억’소리 나는 기술 이전을 성공시키며 화제가 됐다. 치료용 항체를 만드는 기업에 연구원 기술을 건 당 20억에 기술이전한 것이다. 바이오센서 기술을 반도체 세정 공정 기업에 연결해 창업을 도운 일도 있다. 
 
때마다 필요한 분야를 공부하다보니 학위가 늘었다. 명함에도 ‘공학박사’ 옆에 ‘MBA’ 학위가 나란히 붙었다. 그 MBA가 맞냐는 물음에 정 연구원은 “경영학적인 관점도 필요하더라”며 “생명연 30년 역사상 연구원 중에 MBA를 마친 사람은 처음일 것”이라고 쑥스럽게 웃어 보였다. 이밖에 기술가치평가사, 기술거래사, M&A컨설턴트 자격도 얻었다.
 
●파리와 예술, 와인과 맥주…‘다채로운 인생’을 꿈꾸다

 

그는 프랑스와 인연이 깊다. 1990년대 프랑스 꽁피엔느공대에서 유학했고 2014년부터 1년 동안은 파리에서 다국적 제약기업인 ‘사노피’ 중앙연구소에 머물며 글로벌 기술사업화에 대한 경험을 얻었다. 

 

예술의 나라에서 지냈던 덕분일까. 예술은 과학, 경영과 더불어 그의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 연구원은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으로 ‘십자가 처형’을 꼽았다. 
 

“프랑스 알사스 지방 꼴마의 인텔린덴 미술관에서 봤어요. 그림 속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으로 처절함과 고통스러움이 그대로 전해졌죠. 성경 내용이 떠오르며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큰 감동을 받아서 이 그림을 두 번이나 보러 갔지요.”

 

정 연구원이 꼽은 명화
정 연구원이 꼽은 명화 '십자가 처형'.   - 위키미디어 제공

그림 감상과 더불어 정 연구원은 스스로를 커피와 와인, 맥주 애호가라고 밝혔다. 프랑스 와인은 맛이 풍부해서 다 좋지만 브르고뉴 지방의 삐노노아가 부드러우면서도 가볍고, 우아한 맛을 낸다고 추천하기도 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흑맥주의 강한 맛, 와인의 묵직한 바디감 같은 ‘무거운 맛’을 좋아했어요. 요즘은 부드럽고 섬세한 맛이 좋더라고요.”

 

다채롭고 풍부한 삶은 ‘재밌게 살자’라는 그의 인생철학과 일맥상통한다. 과학자에서 출발해 기업가로, 또 다시 예술을 사랑하는 과학자로 살아온 지난 삶을 함께 돌아보다 문득 미래가 궁금했다. 10년 뒤의 인생을 10글자로 표현해 달라는 요청에 돌아온 답 또한 그 다웠다.

 

“이렇게 재미있게 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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