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십팔번

2015.12.26 18:00

나의 선친이 34세 때 내가 태어났고 내가 34세 때 나의 아들은 첫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태어날 때 울었는지 웃었는지는 내 기억에는 없지만 그날 선친은 웃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 기억에 남은 선친이 웃는 모습은 많지 않다. 늘 당신에게 엄격했고 새벽이슬처럼 가족에게 조용히 헌신했던 선친의 생활은 오늘을 넘어가고 내일을 걱정하는 연속되는 긴장감으로 웃음을 꺼내놓을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아내는 종종 내게 말한다, 왜 표정이 없냐고. 이 말은 왜 밝은 표정으로 생활하지 않느냐는 뜻이리라. 하루에 한 번 면도할 때 말고는 거울을 보지 않아 내 낯빛을 살피지 않으니 나는 딱히 뭐라고 답변할 수 없다. 다만, 온종일 집에서 PC 화면의 활자와 책장(冊張)만 들여다보고 있는 어느 날에는 오후가 되어 누군가에게 걸려온 전화 통화를 하면서 잠긴 목소리로 첫말을 꺼낼 때 “자고 있었어?”라는 물음에, “아니, 오늘 처음 말해서……”라고 답변하고 나서야 그때까지의 내 응결된 표정을 상상할 수는 있다.

 

 

억새 - pixabay 제공
억새 - pixabay 제공

 

표정도 유전되는가? 아침에 세면대 거울 앞에 서면 세월이 갈수록 내 선친의 모습이 그곳에 있다. 그 모습의 아이콘은 표정이리라. 가까운 곳을 응시하면서도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텅 빈 시선이 그렇다. 또한 돌이켜보면, 필요한 말이 아니면 늘 묵중했던 선친의 육성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감감하다. 그럼에도 선친의 침묵의 언어는 저녁식사 때 반주로 드시던 소주 한두 컵에서 가끔 해방되었다.

 

그런 날은 막내아들인 나는 유리컵에 대병들이 소주병을 기울였고, 선친은 밥과 반찬을 안주 삼아 차를 마시듯 소주를 마시고는 당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빈 솥뚜껑을 시끄럽게 여닫았다는 부뚜막 도깨비들의 소란이며, 선친의 큰집에서 제사를 마치고 캄캄한 밤길을 홀로 귀가하던 산길에서 만난 푸른빛의 귀화(鬼火)며, 일사후퇴(一四後退) 때 극도의 굶주림에서 후각으로 찾아낸, 빈집 마루 밑 살얼음 낀 양푼 속의 불은 밥알 이야기가 된장찌개 수증기처럼 밥상 위에 풀어졌다.

 

 

wikipedia 제공
wikipedia 제공

 

 

여러 번 들어도 재밌는 구연동화 같은 그 이야기들은 내 귓바퀴를 발갛게 만들고 내 눈 앞에 환한 영상이 되어 소년을 몰입시켰다. 그렇게 선친의 입은 어쩌다 거침없이 열렸고 사이사이에 싱거운 유머까지 곁들여져 웃으실 때는 보철해놓은 은빛 치아가 번쩍였다. 그런 달뜬 밤, 간혹 선친의 친구분들이 어디선가 1차 술자리를 마치고 흥을 돋워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느닷없는 방문에 서둘러 동태찌개라도 끓여 술상을 봐야 했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늘 나의 할머니 앞에서 큰절을 올린 선친의 친구분들은 술잔이 서너 순배 돌아가고 나면 어느새 젓가락을 집어 들고는 돌아가며 노래 한 곡조씩을 뽑기 시작했다. 선친의 차례가 되면 내내 손사래를 치시던 아버지는 결국은 언제나 같은 곡을 부르셨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로 시작되는 고복수의 「짝사랑」을. 가창력이 좋지는 않으셨지만, 아버지의 탁한 음성으로 참 구슬프게 불려나온 그 노래는 절정에 이르러서는 가사 그대로 정말 목이 메는지 선친의 눈에는 살짝 발간빛 물기가 번졌다.

 

“지나~친” 삼십여 년의 세월이 가고, 한 해가 저무는 동짓날 귀갓길에서, 그때 그 시절 선친의 나이가 돼버린 나도 조용히 혼자 불러본다. “가앙물도 출렁출렁 목이 …니이이이다.” 차마 목메는 이 노래는 이후 또 삼십여 년이 흘러간대도, 내게서 끝날 것이다.

 

 

※ 저자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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