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브라운관 TV로 칼 루이스 보던 시절

2015.11.14 19:30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첫 회는 서울 올림픽 개막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온 가족이 작은 브라운관 TV 앞에 둘러앉아 잠실 종합운동장에 각국 선수단이 화려하게 입장하는 모습과 덕선이가 우간다 선수단 기수로 들어오는 장면을 옹기종기 모여 지켜보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작은 화면으로 스펙타클한 올림픽을 봤다니, 믿겨지지 않습니다.

 

드라마 속 TV의 화면 크기는 20인치 정도로 보입니다. 화면 보다 앞뒤 길이가 긴 브라운관 TV가 마루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네요. 화면은 넓고 두께는 한뼘도 안되는 현재 TV와 비교가 불가합니다.

 

tvN (응답하라 1988) 제공
tvN (응답하라 1988) 제공

 

88년에도 TV는 충분히 보급됐나 봅니다. 그렇게 부유하게 보이지 않는 ‘응팔’ 주인공 집에도 각각 TV가 한대 씩 보이더군요. 60~70년대 TV 처럼 여닫이 문이 달린 특별한 장식장 안에 ‘모셔’ 놓을 정도의 ‘부의 상징’ 지위에서는 내려온 시기인 것이죠.

 

1988년이면 1980년에 시작됐던 컬러 방송이 일반화되고, 1970년대 중반부터 컬러 TV 수상기를 생산해 수출하던 삼성전자, 금성(현 LG전자) 등 국내 기업 제품이 대부분 가정에 있을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 소니 TV 등 외산 제품은 높은 관세 장벽 등으로 인해 ‘선망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던 시절이기도 하죠.

 

● 88 올림픽, 그리고 TV로 엮인 세계

 

1988년 그 시절 TV는 12년 만의 지구촌 축제를 세계에 생생하게 보여주는 창 역할을 했습니다. 구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서방 국가들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고, 이에 맞서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도 1984년 미국 로스앤젤리스 올림픽에 불참했죠. 그 이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의미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불참한 바 있어 1988년 서울 올림픽은 12년 만에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온전히 참여하는 축제로 치뤄지게 되었습니다.

 

TV를 타고 세계에 전송된 서울 올림픽의 영상은 뜻하지 않게 동서 냉전 종식에 기여하는 결과도 낳았다고 합니다. 해외에 전쟁 폐허와 독재 등의 부정적 이미지로 굳어진 대한민국의 의외의 발전상을 세계인이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죠.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역동성을 목격한 동독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의 충격이 컸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실제로 서울 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20인치가 채 안 되는 브라운관 TV와 방송 영상 기술이 역사를 뒤흔드는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1988년 서울 올림픽은 TV 방송 기술 역사의 한 페이지도 장식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HD TV 방송이 이때 이뤄졌다는 것을 아시나요? 일본 NHK가 서울 올림픽에서 아날로그 HD 방식 시범 방송을 실시했었지요.

 

● 더 크게, 더 얇게 - TV 스크린의 진화

 

올림픽은 최신 방송 기술의 시험장이자 첨단 TV 제품 마케팅의 총아로 자리잡게 됩니다. 1984년 로스앤젤리스 올림픽은 방송 중계권 경매를 처음 시도하며 상업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올림픽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에 비싼 값을 감수하고 광고 시간을 산 광고주들은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였구요.

 

특히 장대한 스케일의 개막식을 실감나게 전달하고 육상 선수의 잘 단련된 근육과 땀방울 하나하나까지 손에 잡힐 것처럼 섬세하게 잡아내기 위한 TV 스크린전쟁은 올림픽을 무대로 불타 올랐습니다.

 

1950년대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이래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브라운관은 TV의 동의어로 여겨졌습니다. 화면 뒤가 한없이 불룩하고 무거운 전형적인 TV의 모습은 브라운관 때문인 것이죠.

 

브라운관의 본래 이름은 음극선관(cathode-ray tube, CRT)입니다. 음극선관을 개발해 제대로 된 TV 수상기의 길을 연 독일의 발명가 카를페르디난트 브라운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지요.

 

브라운관은 후면의 전자총에서 전자를 쏘면, 음극선관을 거쳐 앞 부분에 있는 삼원색의 형광 물질이 묻은 스크린에 부딫혀 빛을 내는 원리입니다. 전자가 날아가는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두께가 길어지고 무거워질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데요. 자연히 화면을 크게 만들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형광 물질이 전자를 맞아 직접 빛을 내므로 LCD에 비해 색 재현력이 좋고 화면 왜곡이 적으며, 반응 속도가 빠른 것은 장점입니다. 0.1초의 시간도 아쉬운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이 최근까지도 CRT 모니터를 고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브라운관 내부 구조. - 삼성디스플레이 블로그 제공
브라운관 내부 구조. - 삼성디스플레이 블로그 제공

 

브라운관 TV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까지도 TV의 왕자 자리를 지켰습니다. (LCD와 PDP 등 평판 스크린 기술은 일찍부터 등장하긴 했습니다.) 80~90년대에 걸쳐 두께는 브라운관의 5분의 1, 10분의 1로 줄이고 화면 크기는 2배, 3배 이상으로 키울 수 있는 평판 TV 연구가 이어졌으나 상용화의 길은 더뎠습니다.

 

● LCD와 PDP의 발전

 

LCD는 말 그대로 고체와 액체의 중간 성질을 지닌 액정(liquid crystal)을 활용한 디스플레이 기술입니다. 전압을 받은 액정 분자가 기울어지는 정도에 따라 패널 후면의 형광등(CCFL)이나 LED 조명 소자에서 나온 빛이 통과하고 이 빛이 편광필름에 의해 조정되며 삼원색 형광 물질이 묻어 있는 컬러필터를 거쳐 색상과 모양을 만들어 냅니다. PDP는 두 장의 패널 사이에 플라즈마를 발생시키고, 이 플라즈마의 전압으로 패널 내부의 형광체를 자극해 색을 내게 하는 원리입니다.

 

LCD와 PDP 내부 구조 및 작동 원리  - LG디스플레이 블로그 제공
LCD와 PDP 내부 구조 및 작동 원리  - LG디스플레이 블로그 제공

 

LCD는 밝기가 좋고 전력 소모가 적은 반면 응답 속도가 느려 잔상이 생긴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시청자의 위치에 따라 화면이 잘 안 보이는 시야각 문제도 있습니다. 전자계산기나 노트북PC 화면 등 소형 디스플레이부터 적용되기 시작했으며 초기에 대형화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PDP는 색 재현성이 좋고 응답 속도가 빠르며 대형화도 상대적으로 쉬웠던 반면 전력 소모가 큰 것은 단점으로 꼽혔구요.

 

2000년대에 들어 드디어 LCD와 PDP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선 샤프와 소니 등이, 국내에선 필립스와 합작한 LG전자와 삼성전자가 평판 디스플레이 패널 생산에 나섰습니다. 디지털 방송에 평판 디스플레이가 더 적합한 것도 TV 세대교체 노력의 이유가 됐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처음으로 HD로 중계되면서 평판 TV 확산에 속도가 붙었습니다. 삼성, LG 등 세계 주요 가전 업체가 HD급 평판 TV를 쏟아냈구요. 2006년에는 풀HD TV가 나왔고, 이어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풀HD TV 보급의 호기가 됐습니다.

 

브라운관에서 평판 스크린으로, 아날로그 방송에서 디지털 방송으로 TV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삼성전자, LG전자가 소니 등 기존 TV 최강 기업을 물리치고 세계 1등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삼성전자의 세계 TV 시장 선두권 진입 계기가 된 ‘보르도 LCD TV’  -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의 세계 TV 시장 선두권 진입 계기가 된 ‘보르도 LCD TV’  - 삼성전자 제공

 

이러던 중 LCD와 PDP의 경쟁은 LCD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LCD가 기술적 약점을 빠르게 해결해 가며 응답 속도와 시야각 등의 문제를 개선해 나간 반면 PDP 발전 속도는 상대적으로 더뎠습니다.

 

LCD는 대형 스크린뿐 아니라 휴대폰이나 노트북PC에 쓰이는 소형 제품도 판매할 수 있어 생산 업체 입장에서 원가를 절감하며 유연하게 경영 전략을 짤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주요 전자 업체들이 LCD를 선택하면서 PDP는 시장에서 퇴출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삼성SDI와 LG전자도 지난해 PDP 사업에서 철수했습니다. 50년 간 시장에서 군림한 CRT가 시장에서 사라진 후 몇해 지나지 않아 PDP도 같은 운명을 밟은 것 같습니다.

 

● OLED와 플렉서블 화면 시대

 

현재 TV 업계의 관심은 OLED와 플렉서블 디스플레이에 쏠려 있습니다. OLED는 유기 형광 물질이 스스로 빛을 내며 화면을 구현하는 디스플레이입니다. LCD와 달리 백라이트가 없어 두께가 얇고 자체 발광이라 색 재현성이 좋습니다. 전력 소모도 적고 휘어지는 디스플레이 생산에 적합합니다.

 

당초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 때에는 차세대 TV의 주류로 떠오를 것이란 기대가 컸지만 생각보다 대중화가 더딘 편입니다. 대형화 및 재료의 안정성 문제가 개선되고, LCD에 대규모로 투자한 기존 업체들의 이해 관계가 정리돼야 본격적으로 활성화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는데요.

 

LG전자의 77인치 4K 플렉서블 OLED TV - LG전자 제공
LG전자의 77인치 4K 플렉서블 OLED TV - LG전자 제공

 

2016년 리우데자네이로 올림픽은 대형 OLED TV나 플렉서블 디스플레이가 달린 휴대폰으로 볼 수 있게 될 지 한번 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 필자 소개
한세희. 연세대를 졸업하고 전자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인터넷, 소셜 미디어, 모바일 등의 분야를 열심히 취재했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발달 속에서 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크다. 기술과 세상의 변화를 따라다니며 쉽게 풀어쓰고 싶어한다. 요즘은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잉여 인간 체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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