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권의 암흑물질 박테리오파지를 주목하라

2015.11.02 18:00

박테리아가 있는 곳 어디서나 박테리오파지가 있다.

- 펠릭스 데렐

 

필자가 예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다. 1960년대 미항공우주국(NASA)의 과학자들이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선 이글(Eagle)을 설계할 때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 이하 파지)의 모습을 참고했을까 하는 점이다. 달 표면에 착륙한 달착륙선의 모습과 박테리아 표면에 붙어 있는 파지의 모습은 꽤나 비슷하다.  달착륙선에서는 안에 있는 우주인들이 나와 달 표면을 거닐었다면 파지에서는 머리(캡시드) 안에 있는 게놈이 박테리아 세포막을 뚫고 세포 안으로 들어가는 게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까.

 

대장균 세포 표면을 덮고 있는 박테리오파지 T1의 모습을 담은 전자현미경 사진. 파지는 박테리아 세포벽 표면의 구조를 인식해 달라붙은 뒤 게놈을 세포 안으로 주입해 번식한다.  - 위키피디아 제공
대장균 세포 표면을 덮고 있는 박테리오파지 T1의 모습을 담은 전자현미경 사진. 파지는 박테리아 세포벽 표면의 구조를 인식해 달라붙은 뒤 게놈을 세포 안으로 주입해 번식한다.  - 위키피디아 제공

2015년은 파지가 발견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많은 사람들에게 파지는 중고교 생물 시간에 잠깐 들어본 게 전부일 것이다. 그리고 과학계에서도 파지는 분자생물학 초창기에 반짝 인기를 끌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파지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지구 생태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파지를 알아야하고 항생제내성박테리아로 골치를 앓고 있는 의학계에서도 파지를 구원투수로 생각하고 있다.

 

● 존재는 알았지만 실체는 몰라

 

파지는 1915년 영국 브라운동물연구소의 미생물학자 프레더릭 트워트가 처음 발견했다. 어느 날 트워트는 포도상구균을 배양한 콜로니(군집)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콜로니는 박테리아가 자란(증식한) 덩어리로 탁한데 곳곳에 투명한 부분이 있었던 것. 즉 박테리아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이다. 트워트는 여기에 박테리아를 죽이는 뭔가가 있다고 가정하고 이 부분을 다른 배지에 옮겨봤는데 예상대로 역시 자라지 못했다.

 

1915년 포도상구균을 배양하던 중 박테리오파지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영국의 미생물학자 프레더릭 트워트. 하지만 그 실체를 확신하지는 못했다. - 위키피디아 제공
1915년 포도상구균을 배양하던 중 박테리오파지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영국의 미생물학자 프레더릭 트워트. 하지만 그 실체를 확신하지는 못했다. - 위키피디아 제공

그는 이 부분을 마이크로필터로 거른 뒤 통과한 액체를 포도상구균과 접촉시켰고 그 결과 박테리아가 죽었다. 트워트는 같은 해 학술지 ‘랜싯’에 이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미지의 성분을 ‘용균제(bacteriolytic agent)’라고 불렀다. 그러나 전 해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연구의 맥이 끊겼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른 분야로 관심을 돌렸다.

 

2년 뒤인 1917년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미생물학자 펠릭스 데렐 역시 비슷한 현상을 발견했다. 트워트와는 달리 이 현상을 좀 더 깊이 파고든 데렐은 바이러스가 원인이라고 추측하고 ‘박테리아를 먹는다’는 뜻의 박테리오파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흥미롭게도 파지는 박테리아(세균)나 고세균을 공격할 뿐 진핵생물은 건드리지 않는다. 참고로 박테리아파지의 실체는 전자현미경이 발명된 1930년대에야 확인됐다.

 

그 뒤 생명과학의 연구가 분자생물학을 지향하면서 파지가 유용한 실험재료가 됐다. 박테리아 배양액만 있으면 키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증식하기 때문에 결과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지를 이용한 가장 유명한 실험은 유전물질(게놈)이 단백질이냐 핵산이냐를 두고 벌어진 오랜 논쟁을 끝낸 실험일 것이다.

 

탄저균 배지를 보면 콜로니(흰 부분) 중간에 동전처럼 생긴 투명한 부분이 보인다. 파지가 감염된 곳으로 탄저균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 위키피디아 제공
탄저균 배지를 보면 콜로니(흰 부분) 중간에 동전처럼 생긴 투명한 부분이 보인다. 파지가 감염된 곳으로 탄저균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 위키피디아 제공

1952년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는 파지 T2에 방사성동위원소표지법을 적용해 이 난제를 해결했다. 즉 한쪽에는 동위원소 황을 쓴(단백질 표지) 파지를 다른 쪽에는 동위원소 인을 쓴(핵산 표지) 파지를 준비한 뒤 대장균에 감염시켜 배양한 뒤 파지와 대장균을 분리해 동위원소가 어느 쪽에 있는지 조사했다.

 

4_1952년 허시와 체이스는 방사성동위원소표지법을 써서 유전물질이 핵산임을 입증했다. 즉 박테리아 세포 표면에 달라붙은 파지는 박테리아의 세포막을 뚫어 내부의 핵산을 보내 증식한다. - 위키피디아 제공
1952년 허시와 체이스는 방사성동위원소표지법을 써서 유전물질이 핵산임을 입증했다. 즉 박테리아 세포 표면에 달라붙은 파지는 박테리아의 세포막을 뚫어 내부의 핵산을 보내 증식한다. - 위키피디아 제공

동위원소 황을 머금은 파지에 감염된 대장균에서 방사능이 검출된다면 단백질이 유전물질이라는 뜻이고, 동위원소 인을 머금은 파지에 감염된 대장균에서 방사능이 검출된다면 핵산이 유전물질이라는 뜻이다. 결과는 후자였고 이 업적으로 허시는 196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한편 이를 바탕으로 왓슨과 크릭은 DNA결정구조를 밝히는 연구에 뛰어든다. 

 

● 최초로 게놈이 해독된 생명체

 

한편 가장 먼저 유전자와 게놈이 해독된 생명체도 파지다. 벨기에 켄트대의 분자생물학자 발터 피어스 교수는 1972년 박테리오파지 MS2의 표피단백질 유전자 염기서열을 해독했고(아미노산 129개를 지정), 1976년 RNA 염기 3569개로 이뤄진 파지 MS2의 게놈을 완전히 해독했다. 참고로 파지 MS2의 게놈은 단일가닥 RNA로 3569개는 바이러스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크기다.

 

한편 이듬해 영국의 생화학자 프레더릭 생어는 단일가닥 DNA(염기 5386개)로 이뤄진 박테리오파지 ΦΧ174의 게놈을 해독했다. 1982년 생어는 1980년 노벨화학상 수상 업적인 다이데옥시법을 써서 전형적인 달착륙선 모양인 람다파지의 게놈(이중가닥 DNA 염기 48502개)을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파지는 간접적으로도 생명과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박테리아에서 발견된 제한효소는 분자생물학의 ‘양자도약’을 가능하게 한 유용한 도구다. 제한효소는 DNA에서 특정한 염기서열을 인식해 자르는 효소다. 박테리아가 제한효소를 갖고 있는 이유는 세포 안으로 침입한 파지의 게놈을 파괴하기 위해서다. 과학자들은 파지의 대한 방어수단인 제한효소를 이용해 특정 유전자를 실은 DNA구조(플라스미드)를 만들어 세포생물체에 넣어 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이 과정을 클로닝(cloning)이라고 부른다).

 

최근 생명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게놈편집기술의 발전에도 파지가 한 몫 했다. 즉 3세대 유전자가위로 불리는 CRISPR(크리스퍼) 시스템 역시 원래는 박테리아가 파지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획득면역시스템이다.

 

● 지구는 파지 세상

 

이런 기술적인 측면뿐 아니라 지구생태계의 관점에서도 파지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메타게놈, 즉 수많은 생명체가 섞여 있는 시료의 게놈을 통째로 분석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파지의 게놈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결과 지구에는 그 어떤 생명체보다 파지가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지구에 ‘살고 있는’ 파지의 숫자는 10의 31승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계 인구를 100억 명이라고 쳐도 10의 10승이고, 한 사람이 100조개의 세포로 이뤄져 있다고 쳐도 모든 사람의 세포 개수는 ‘고작’ 10의 24승이다. 지구상에 있는 파지를 일렬로 세우면 그 길이가 지구에서 60번째로 가까운 은하에 이른다고 한다.

 

바닷물에도 파지가 득실득실한데, 박테리아가 풍부한 바닷물 1밀리리터(주사위 하나 부피)에는 최대 9억 개의 파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에서는 파지 감염이 매초마다 10의 23승 번이나 일어나고 그 결과 수많은 해양 박테리아가 죽는다. 또 파지에 감염된 박테리아가 파지로부터 독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받을 경우(이를 유전자의 수평이동이라고 부른다) 새우나 심지어 고래 같은 동물들도 치명상을 입게 된다. 파지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해양생태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육지에서도 상황은 비슷해서 토양 1그램에 파지가 10억 개쯤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일 파지가 없었다면 박테리아와 진핵생물 사이의 관계는 전혀 다른 국면에서 전개됐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파지를 ‘생물권의 암흑물질(dark matter of the biosphere)’라고도 부르는데, 우주에서 물질보다 5배 이상 질량이 많은 암흑물질이 최근에야 조명을 받듯이 파지도 그렇다는 의미에서다.

 

● 다시 떠오르는 파지요법

 

기초과학자들만이 파지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다. 사실 파지연구 초창기에는 오히려 응용 쪽이 더 활발했다. 트워트와는 별개로 1917년 파지를 발견한 펠릭스 데렐은 곧바로 병원균을 죽이는데 파지를 이용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1919년 사람을 대상으로 첫 임상을 실시했다. 파지요법(phage therapy)으로 알려진 이 새로운 치료법은 곧 유럽에서 화제가 됐다.

5_실질적인 파지의 아버지인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펠릭스 데렐. 1917년 파지를 재발견한 데렐은 이를 임상에 적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 1919년 처음으로 파지요법 임상에 들어갔다.  - 위키피디아 제공
실질적인 파지의 아버지인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펠릭스 데렐. 1917년 파지를 재발견한 데렐은 이를 임상에 적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 1919년 처음으로 파지요법 임상에 들어갔다.  - 위키피디아 제공

 

한편 당시 러시아의 미생물학자 조지 엘리아바는 오늘날 조지아(그루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에서 연구하다 1918년 파스퇴르연구소에서 연수할 기회를 얻었고 3년간 머물렀다. 이때 데렐을 만났고 파지요법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1923년 엘리아바는 트빌리시연구소(1988년 창립자를 기려 ‘조지엘리아바연구소’로 개명했다)를 세워 조지아의 미생물연구를 이끌었다. 1926년 다시 파스퇴르연구소에 체류하게 된 엘리아바는 제대로 파지요법을 배웠고 이듬해 귀국한 뒤 본격적으로 파지요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 철권통치 체제 아래에서 엘리아바는 사소한 스캔들에 연루돼 1937년 45살 한창 나이에 처형됐지만, 트빌리시연구소에서는 파지요법 연구를 계속했고 오늘날 세계 최고의 파지요법 연구소가 됐다. 원조인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를 제치고 엘리아바연구소가 파지요법을 대표하게 된 건 1940년대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서구에서 파지요법이 잊혔기 때문이다. 반면 냉전체제로 항생제요법에서 소외된 동구권은 파지요법을 계속 추구했다. 그 결과 오늘날 서구 의료계에서는 파지요법을 아직 허용하고 있지 않지만 조지아와 러시아, 폴란드 등에서는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항생제 내성이 갈수록 심해지고 내성균으로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파지요법을 받으려고 조지아로 가는 유럽 환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서구 의학계에서도 파지요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프랑스의 제약회사 페레시데스 파마는 지난 9월 9일부터 ‘파고번(phagoburn)’으로 부르는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화상(burn) 부위의 세균 감염을 파지로 치료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이름이다. 대장균과 녹농균을 공격하는 파지 여러 종을 섞은 파지칵테일을 화상 부위에 발라 감염억제에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는 이 임상에는 화상 환자 220명이 참여한다.

 

파지요법은 파지칵테일이 들어 있는 용액을 먹거나 환부에 뿌려주면 되는 간단한 치료법이다.  - 조지엘리아바연구소 제공
파지요법은 파지칵테일이 들어 있는 용액을 먹거나 환부에 뿌려주면 되는 간단한 치료법이다.  - 조지엘리아바연구소 제공

파지요법이 주목받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먼저 엄청난 다양성을 들 수 있다. 즉 우리 주변 어디서나 파지가 널려있기 때문에 웬만한 병원균은 천적이 되는 파지를 찾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물론 박테리아가 변이를 일으켜 내성을 가질 수도 있지만 파지도 그에 맞춰 변이를 일으킬 수 있고 또 여러 종류를 쓰는 파지칵테일요법도 가능하다.

 

다음으로 파지의 숙주 특이성을 꼽을 수 있다. 파지는 특정 균주에만 감염할 수 있기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항생제에 비해 인체의 유익균이 피해를 볼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리고 박테리아가 아닌 진핵생물(사람을 포함해)은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

 

한편 식품업계에도 파지 적용이 활발하다. 식중독을 비롯한 다양한 식품안전사고가 박테리아 오염에서 비롯되는데, ‘식품첨가물’로 파지를 쓰면 이런 위험성을 크게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2006년부터 이런 용도로 파지를 쓸 수 있게 허가가 나 육류나 치즈의 박테리아 오염을 막는 목적으로 첨가하는 파지가 첨가물로 나와 있다.

 

국내에서도 파지를 식품에 적용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 식품․동물생명공학부 유상렬 교수팀은 학술지 ‘응용․환경미생물학’ 최근호에 크로노박터라는 박테리아를 죽이는 파지를 발견해 게놈을 분석하고 식품에 적용한 연구결과를 실었다. 크로노박터가 오염된 분유를 먹은 아기들은 균혈증, 뇌수막염, 괴상성장염 등 심각한 질환에 걸려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유 교수팀은 발견한 박테리오파지 CR5는 유전자가 231개나 되는 다소 큰 바이러스로 크로노박터를 공격하는 기존의 알려진 파지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논문 말미에 “산업화가 되려면 파지를 정제하고 농축하는 비용을 떨어뜨려야 한다”면서도 “다만 일반소비자들이 파지가 들어있는 분유를 선택할지는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은 파지가 낯선 존재이지만 의학계와 산업계에서 널리 쓰일 날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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