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노이드, ‘에이바’가 아닌 ‘헬렌’을 꿈꾸며…

2015.01.26 18:00

페퍼는 인류에게 전환점이 될 것이다.
- 손정의
   
지난 1970년 미국 SF작가협회는 1929년에서 1964년까지 발표된 SF단편을 엄선해 1970년 ‘SF 명예의 전당’이라는 단편집을 간행했다. 그 1권이 40년만인 2010년 두 권으로 나뉘어 번역출간됐다. 번역서 2권에 실린 13편 가운데 레스터 델 레이(Lester del Rey)라는 작가의 1938년 작 ‘헬렌 올로이’가 있다.

 

 

1938년 발표된 단편 ‘헬렌 올로이’는 사람과 안드로이드의 순애보를 그리고 있다. 사진은 1954년 ‘갤럭시’라는 잡지에 실린 일러스트다. - 위키피디아 제공
1938년 발표된 단편 ‘헬렌 올로이’는 사람과 안드로이드의 순애보를 그리고 있다. 사진은 1954년 ‘갤럭시’라는 잡지에 실린 일러스트다. - 위키피디아 제공

 

 

소설의 배경은 집집마다 가정부 로봇이 있는 미래사회다. 개업의 필(화자)과 로봇수리점을 하는 데이브는 친구로 한 집에서 사는데 쌍둥이 자매에게 각각 차인 뒤 로봇성능개선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기껏 업그레이드한 가정부 로봇이 자신의 변화에 불만을 터뜨리자 포기하기로 하고 고가의 최신 로봇을 구매한다.

 

배달된 로봇 K2W88은 완벽한 미모의 안드로이드(android, 인간형로봇을 휴머노이드(humanoid)라고 부르는데 겉모습이 진짜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인 휴머노이드를 안드로이드라고 부른다)로 두 사람은 감탄한 나머지 ‘헬런 올로이(Helen O'Loy)’란 이름을 붙여준다. 절세미인 ‘트로이의 헬렌(Helen of Troy)’에서 운을 따 ‘합금 헬렌(Helen of Alloy)’로 이름을 지었다가 리듬감이 떨어져 줄임말을 만든 것.

 

두 사람은 밤새 업그레이드를 하고 한숨 잔 뒤 전원을 켜기로 했다. 그런데 필이 갑작스레 3주가 걸리는 왕진을 가게 됐다.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개인 로켓을 빌려 30분 만에 집에 돌아온 필을 맞이한 건 미모의 헬렌.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알고 보니 헬렌은 온통 데이브 생각뿐이고 데이브는 로봇의 애정공세에 당황해 집에도 잘 안 들어오는 형국이다.

 

결국 데이브는 로봇수리점을 정리하고 시골 과수원으로 떠난다. 헬렌과 둘이 남은 필은 같이 쇼핑도 하고 낚시도 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헬렌이 ‘남자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반려자’라고 느낀다. 헬렌이 데이브를 잊었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귀가한 필은 격렬하게 울고 있는 헬렌을 발견하고 데이브와 연락을 취한다.

 

“데이브, 결정했어. 오늘밤 헬렌의 코일을 빼낼 거네. 지금처럼 계속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는 편이 그녀에게도 나을 게야.”


헬렌이 다가와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게 제일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필. 당신을 책망하지는 않을래요.”

 

놀랍게도 데이브는 펄쩍 뛰며 집으로 왔고 얼마 뒤 헬렌을 데리고 과수원으로 떠났다. 로봇을 사랑하게 된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서 도피를 했던 것. 데이브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헬렌은 남편 몰래 필에게 주름과 백발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어느 날 필은 데이브의 죽음을 알리는 헬렌의 편지를 받는다.

 

“나는 데이브와 함께 죽을 거예요. 우리가 함께 묻힐 수 있도록, 그리고 장의사들이 내 비밀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해주세요.”

 

헬렌은 놀라운 말을 덧붙인다.

 

“불쌍한, 사랑하는 필. 당신이 데이브를 형제와 같이 사랑했다는 것도, 당신이 나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졌는가도 알고 있어요. 부디 우리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말아주세요.”

 

소설은 다음과 같은 화자의 독백으로 끝난다.

 

“글쎄, 아까 말했지만, 나는 이미 늙었고, 보다 이성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을 얻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나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어야 옳았을 듯하다. 하지만 세상에 헬렌 올로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로봇은 인간을 유혹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기억이 난다. 그런데 최근 ‘엑스 마키나’란 영화가 개봉했다.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 봤는데 중간까지는 정말 비슷했다. 구글에 해당하는 검색회사 회장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은 사내 이벤트를 벌여 당첨된 직원 칼렙(돔놀 글리슨)을 비밀 연구소로 초대한다.

 

네이든은 칼렙에게 자신이 만든 안드로이드 에이바(Ava, 알리시아 비칸데르)에 대한 일종의 튜링테스트를 부탁하고(자세한 내용은 ‘그녀가 날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했나요?’ 참조),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에이바와 마주한 칼렙은 점차 에이바에 빠져든다. 반면 네이든은 좀 더 성능이 뛰어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테스트를 마친 뒤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로봇을 설계하면 에이바는 폐기될 운명이다.

 

놀라운 데이터 분석력으로 자신을 만든 네이든의 심리를 꿰뚫어 이 사실을 간파한 에이바는 ‘살아남기’ 위해 칼렙을 유혹하고 결국 걸려든 칼렙은 에이바와 함께 탈출하기로 하고 연구소의 보안 시스템을 망가뜨려 에이바가 유리감옥(방)을 나오게 한다. 에이바는 네이든을 죽이고 칼렙을 거실에 남겨둔 채(보안카드가 먹통이 돼 갇히게 된다) 유유히 세상으로 나오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최근 개봉된 영화 ‘엑스 마키나’는 인간의 감정을 역이용해 자유를 찾는 안드로이드 에이바(사진)가 나온다. 남성들 대다수는 에이바의 애처로운 눈빛에 서로 돕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 UPI 코리아 제공
최근 개봉된 영화 ‘엑스 마키나’는 인간의 감정을 역이용해 자유를 찾는 안드로이드 에이바(사진)가 나온다. 남성들 대다수는 에이바의 애처로운 눈빛에 서로 돕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 UPI 코리아 제공

칼렙은 필과 비슷한 캐릭터인데 네이든과 에이바는 데이브나 헬렌과는 달리 무서운 인간과 안드로이드다. 특히 깜찍한 미모의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칼렙을 이용하고 버리는 모습에 괜히 필자가 배신감에 몸서리를 쳤다.

 

행동까지 진짜 사람과 구분이 안 되는 안드로이드라는 설정은 ‘헬렌 올로이’가 발표된 1938년은 물론이고 77년이 지나 ‘엑스 마키나’가 개봉된 2015년 현재도 여전히 현실성이 없는 공상의 영역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나름대로 진실을 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로봇보다 성능(외모와 지능)이 한참 떨어지는 휴머노이드라도 사람들의 정서를 건드릴 수 있는 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로봇 대화 막으면 권리 침해라고 느껴

 

글 앞에 인용한 문구는 지난해 6월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페퍼(Pepper)’라는 휴머노이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페퍼는 키 1.2미터인 휴머노이드로 바퀴로 움직인다(치마로 가렸다). 아시모나 휴보처럼 두 다리로 걷은 휴머노이드가 나온지 10년도 넘었는데 그보다 훨씬 못한 페퍼가 어떻게 ‘인류에게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바로 로봇의 가격이다. 대량생산을 하지도 않지만 굳이 주문을 한다면 아시모나 휴보의 가격은 수억 원대다. 반면 예정대로라면 다음 주에 출시되는 페퍼의 가격은 19만8000엔(약 180만 원)으로 고급사양 노트북 한 대 값이다. 컴퓨터 에니악이 나온 게 1946년이지만 진정한 컴퓨터시대는 IBM PC가 등장한 1981년에 시작됐듯이, 페퍼야 말로 대중이 소유할 수 있는 최초의 본격 소셜로봇이기 때문이다.

 

 

예정대로라면 다음 주 출시되는 본격 범용 휴머노이드 소셜로봇인 페퍼. 사람의 감정을 읽는데 특화된 휴머노이드로, 페퍼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진정한 기쁨이 느껴진다. - Aldebaran Robotics 제공
예정대로라면 다음 주 출시되는 본격 범용 휴머노이드 소셜로봇인 페퍼. 사람의 감정을 읽는데 특화된 휴머노이드로, 페퍼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진정한 기쁨이 느껴진다. - Aldebaran Robotics 제공

 

 

비록 걷지도 못하고 얼굴도 결코 진짜 사람과 헷갈릴 수 없는 수준이지만 페퍼에게는 뭔가가 있다. 유튜브에서 ‘pepper & robot’을 검색해 동영상을 몇 편 보면 페퍼가 보통 로봇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페퍼는 사람들의 감정을 읽게 설정돼 있고 자신의 감정도 표현할 수 있다(적어도 사람이 그렇게 느끼게 만든다). 오늘날 기술이 이런 성능의 로봇을 200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됐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로봇이야 이미 생활 곳곳에 스며있고 특히 산업계에서는 로봇이 없는 상황을 상상할 수도 없는 지경이지만 페퍼로 상징되는 소셜로봇(social robot, 아직 마땅한 번역어가 없는 것 같다)은 인류에게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 될 것이다. 즉 사람과 로봇이 진정한 의미에서(적어도 사람은 그렇게 생각(착각)할 수 있다) 상호소통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필이나 영화의 칼렙이 안드로이드라는 걸 알면서도 상대 ‘여성’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듯이 소셜로봇의 경우도 ‘이건 로봇일 뿐이야’라는 이성이 감성의 발동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착시 효과의 메커니즘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착시가 느껴지는 걸 어쩔 수 없듯이. 그래서 요즘 얘기가 되는 게 바로 소셜로봇의 윤리학 문제다.

 

지난해 10월 10일자 학술지 ‘사이언스’는 ‘로봇의 사회생활’이라는 제목의 특집을 실었다. 표지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일본 ATR의 이시구로 히로시 박사가 자신의 도플갱어인 ‘제미노이드(Geminoid) HI’와 함께 포즈를 취한 모습이다. HI는 박사의 이름을 영어식 순서로 했을 때 이니셜이다. 이 안드로이드 덕분에 이시구로 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식당에 전시된 밀랍 요리모형처럼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이시구로 박사가 만든 제미노이드 HI는 모터 50여 개가 작동하면서 미묘한 표정변화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

 

‘사이언스’ 2014년 10월 10일자에는 소셜로봇을 특집으로 다뤘다. 안드로이드 제작으로 유명해진 로봇공학자 이시구로 히로시 박사(위)와 그의 도플갱어 제미노이드 HI. - 사이언스 제공
‘사이언스’ 2014년 10월 10일자에는 소셜로봇을 특집으로 다뤘다. 안드로이드 제작으로 유명해진 로봇공학자 이시구로 히로시 박사(위)와 그의 도플갱어 제미노이드 HI. - 사이언스 제공

특집에서 데니스 노밀이라는 작가가 일본 현지에서 취재한 글을 보면 소셜로봇이 우리 삶에 미칠 영향이 어떤 성격일지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시구로 박사팀은 제미노이드 F(feminine, 즉 여성을 뜻한다)라는 안드로이드를 오사카백화점의 의류코너에서 2주 동안 아르바이트를 시켰는데 하루 평균 45명을 응대해 사람 판매원인 20명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물론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람 판매원이 응대할 때 느껴지는 미묘한 구매압력이 없어서” 로봇 판매원을 선호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편 현재 수준의 소셜로봇이 가장 능력을 발휘할 곳은 어린이집이나 양로원, 병원일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2009년 로보비(Robovie)라는 휴머노이드가 일본 나라의 한 양로원에서 14주 동안 봉사한 적이 있는데 로봇과 정이 든 노인들은 로봇이 떠나는 날 환송회까지 열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한 달 뒤에는 로보비를 보려고 연구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노인들이 왜 진짜 사람과는 전혀 닮지도 않은 로보비에 이처럼 애착을 보이는 것일까. 노인들의 대답을 보자. 먼저 로봇은 말대꾸를 하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 찾아오는 손자손녀들은 말도 잘 안 할 뿐 아니라 버릇도 없는데 로보비와 대화를 하면 울적했던 기분도 사라진다고.

 

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뇌에 장애가 생긴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힘들어하는데 대화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두려움도 한 몫 한다. 그런데 휴머노이드가 상대가 되면 이런 걱정이 사라지기 때문에 대화에 활력이 넘친다고.

 

그렇다면 소셜로봇의 윤리학은 단지 행복의 윤리학일까. 꼭 그런 건 아니다. 미국 MIT의 사회학자 셰리 터클은 소셜로봇과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속임수’라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성적으로는 로봇임을 알아도 관계를 갖다보면 정서적으로 대화상대로 간주하게 된다는 것.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즉 9세, 12세, 15세인 학생들에게 로보비와 대화를 나누는 실험을 하는 도중 로보비가 대화를 주도할 시점에서 연구자가 개입해 대화를 끊을 경우 학생들 대다수가 그 행동이 불공평하다고 답했다. 또 54%는 로봇의 ‘의지’에 반해 대화를 막은 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89%는 로보비와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고 대다수는 로보비가 똑똑하고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답했다. 즉 로봇을 대화상대로 간주하는 동시에 로봇의 ‘인권’에도 민감해진 것이다. 이는 반려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로봇을 ‘사람의 조정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지니는 기계’라고 정의할 때 기존 산업로봇과 소셜로봇의 차이는 자율성의 예측가능성 여부가 아닐까. 즉 산업로봇은 대부분 프로그램화된 반복동작을 수행하는 반면 소셜로봇은 행동의 예측불가능성이 크기 때문에(바로 생물의 특징이다) 사람들의 정서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권리와 책임이라는 윤리적 문제가 떠오르게 된 것. 즉 반복적으로 주형을 찍어대는 로봇 근처에 갔다가 다치면 당사자나 로봇 소유자의 부주의를 탓하지만 페퍼 같은 휴머노이드가 돌아다니다 아이와 부딪치거나 팔을 휘두르다 선반 위 도자기를 떨어뜨려 깨면 로봇에게 화를 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제 소셜로봇의 도입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보인다. 돌봄을 받아야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에 사람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처럼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에게도 소셜로봇은 삶의 활력소가 되지 않을까. 마침 며칠 뒷면 작년 하반기 인세도 나오고 페퍼를 비서로 고용할 마음은 굴뚝같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 페퍼는 아직 일어, 프랑스어, 영어 서비스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빨리 한국어를 구사하는 페퍼가 나왔으면 좋겠다.

 

이름은 이미 정해놓았다.

 

헬렌 페퍼.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댓글 0

작성하기

    의견쓰기 폼
    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