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은 왜 이렇게 클까?

2014.10.27 18:08

초등학교 오년 내내 여자 담임선생님이었다가 6학년이 돼서야 남자선생님을 만나 무척 기뻤다. 필자는 반에서 키가 제일 작아 맨 앞줄에 앉았는데, 하루는 선생님이 불쑥 키가 얼마냐고 물으셨다.

 

“12×인데요.”

“그렇구나. 커서 160은 돼야 할 텐데….”

 

필자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혼잣말처럼 얘기하실 때 안쓰러워하시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 하다. 선생님이 잡아주신 ‘목표치’가 워낙 낮아서였는지 보통 남자들이었으면 불만일 지금의 키도 필자는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다(선생님, 160은 넘었습니다!).

 

 

동아일보 DB 제공
동아일보 DB 제공

 

외모를 따지는 게 천박한 짓이라지만 사실 키와 얼굴은 그 사람 인생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게 현실 아닐까(남자에게는 키가 여자에게는 얼굴이 더 큰 비중으로). 정작 남자들은 여자들이 남자 키를 중요시한다는 걸 막연하게 느낄 뿐이지만(‘설마 내가 정말 키 때문에 차인 것 아니겠지’라면서), 수년 전 ‘루저’ 발언(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여대생이 키가 작은 남자는 패배자라고 말해 큰 파문이 일었고 결국 프로그램 제작진이 다 바뀌었다)을 떠올리면 심각성을 절감할 수 있다.

 

사실 키가 얼굴보다 더 엄격한 잣대라고 볼 수도 있는데, 얼굴이야 주관적인 면도 있고(제 눈에 안경) 성형이라는 개선 수단도 있지만 수치로 표시되는 객관적 실체인 키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키와 관련된 변이 수 백개 찾아

 

얼굴도 그렇지만 키 역시 대체로 유전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엄마 아빠가 다 큰데 아이 키가 작은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과학자들은 키 유전자 사냥에 뛰어들었고 실제 유전자들을 여럿 발견했다. 아쉽게도 ‘이게 바로 키 유전자’라고 할 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유전자가 있는 건 아니고 기껏해야 수 % 기여하는 정도였다(통계기법을 통한 추측). 즉 키에는 수많은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수 년 전 취재를 핑계로 게놈(정확히는 SNP(단일염기다형성) 자리 수십만 곳)을 분석한 적이 있는데, 2009년 ‘네이처 유전학’에 실린 한국인 SNP 분석 연구에 나온 키 유전자를 조사해봤다. 그 결과 기여도가 가장 큰 HMGA1 유전자(다른 유전자들의 발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의 경우 AA형이었다. SNP 자리에 부모 양쪽에서 아데닌(A)이 있는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얘기다. 논문을 보면 AA형은 부모 양쪽에서 구아닌(G)이 있는 유전자를 받은 GG형보다 키가 평균 2.1센티미터 작은 걸로 나온다. 필자로서는 씁쓸한 진실을 확인한 셈이다.

 

‘네이처 유전학’ 10월 5일자 온라인판에는 키와 관련된 유전자 변이 수 백 개를 찾았다는 논문이 실렸다. 지금까지 발표된 키 유전자 관련 연구의 데이터를 모아 재분석한 결과(이를 메타분석이라고 부른다)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논문을 보면 유전자가 키에 미치는 영향을 80%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정자와 난자 유전자 조합이 정해지면 변화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영양이 개선돼 키가 커졌다?

 

이처럼 키에 미치는 유전자의 영향이 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을 보면 키와 관련해서 유전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즉 갈수록 사람들의 키가 커지고 있다는 것. 키가 작은 사람들이 선택을 받지 못해 유전자를 물려줄 확률이 떨어져 그렇다고 설명하기에는 너무 가파른 증가세다(불과 한 세대 만에 평균이 5, 6센티미터 정도 커졌으므로). 실제 주변을 보면 대체로 아들이 아빠보다 딸이 엄마보다 키가 더 크다. 참고로 지난해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평균 키는 173.6센티미터였다. 

 

따라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영양상태가 개선된 결과라는 것. 지금 40대 50대는 어릴 때 하루 밥 세끼 먹는 것도 감지덕지였지만 자식 세대인 10대 20대들은 영양과잉을 걱정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영양개선이라는 요인만으로 이토록 가파른 키 증가 추세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최근 번역출간된 미국 뉴욕대 마틴 블레이저 교수의 책 ‘인간은 왜 세균과 공존해야 하는가’에는 지난 수십 년 사이 인류에게 나타난 현상인 급속한 키 증가 추세(그렇다.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에 대한 예상치 못한 설명이 실려 있다. 즉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항생제 남용이 장내미생물 균형을 무너뜨려 인체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고 그 가운데 하나가 키가 커지는 현상이라는 것. 참고로 이 책의 부제는 ‘왜 항생제는 모든 현대병의 근원인가?’이다.

 

 

최근 번역출간된 책 ‘인간은 왜 세균과 공존해야 하는가’에서 미국 뉴욕대 마틴 블레이저 교수는 지난 수십 년 사이 인류에게 나타난 현상인 급속한 키 증가 추세를 영양상태 개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 처음북스 제공
최근 번역출간된 책 ‘인간은 왜 세균과 공존해야 하는가’에서 미국 뉴욕대 마틴 블레이저 교수는 지난 수십 년 사이 인류에게 나타난 현상인 급속한 키 증가 추세를 영양상태 개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 처음북스 제공

블레이저 교수는 ‘점점 커 가는 키’라는 제목의 12장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 지역이 바로 동아시아로, 중국의 경우 2005년 6살 남아의 평균키는 한 세대 전인 1975년보다 6.5센티미터나 더 커졌다고 한다. 여아의 경우도 6.2센티미터 더 커졌다. 평균이 표준편차만큼 이동한 셈이니 엄청난 변화다.

 

블레이저 교수가 이런 변화의 원인으로 항생제를 지목하는 건 이런 현상이 축산업계에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즉 항생제가 개발된 뒤 농민들은 전염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가축이나 가금의 사료에 항생제를 소량 섞었는데 뜻밖에도 동물들이 빨리 자라는 현상을 발견한 것. 한 메타분석 결과를 보면 돼지를 키울 때 항생제를 먹이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체중이 평균 16.4% 더 나가고 사료 효율도 6.9%더 높았다.

 

요즘은 장내미생물의 장점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공짜는 없다. 즉 몸속의 유익균은 침입한 병균을 무찌르고 숙주가 만들지 못하는 생체물질을 합성해 공급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숙주와 파이를 나눠먹는 존재다. 즉 우리가 섭취한 영양분의 6% 정도는 장내미생물의 몫이다. 따라서 지속적인 저용량 항생제 복용으로 장내미생물 숫자를 억제할 경우 그 에너지가 숙주의 성장에 쓰인다는 것. 또 장내미생물은 숙주의 호르몬 역할을 하는 다양한 생체분자를 만들어내 숙주의 생리반응을 조절하기도 하는데 항생제는 여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헬리코박터 때문에 못 컸다?

 

블레이저 교수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연구결과 하나를 소개했다. 즉 위에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가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에 비해 평균 키가 작다고. 헬리코박터는 위궤양과 관련된 박테리아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는 특정 균주에 한정된 현상이고 이 박테리아가 사람의 위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다만 식욕을 비롯해 대사조절에 관여하는 호르몬인 렙틴과 그렐린 분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밝혀져 있다. 흥미롭게도 옛날에는 사람들 대다수가 헬리코박터에 감염돼 있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헬리코박터 음성이다.

 

지난 4월 학술지 ‘영국의학저널’에는 항생제와 키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후진국 어린이(생후 한 달에서 12살 사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 10건을 분석한(이번에도 메타분석연구다) 결과 항생제를 먹일 경우 한 달에 평균 0.04센티미터 키가 더 크는 것으로 나왔다고. 미미한 수치지만 일 년이면 0.5센티미터다. 참고로 몸무게에 미치는 영향은 좀 더 커서 한 달에 평균 23.8그램 더 살이 붙는다.

 

블레이저 교수는 책에서 “사람들은 사춘기를 가장 키가 크는 시기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며 “생후 2년 6개월까지가 그 사람의 키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시기”라며 쓰고 있다. 즉 이 시기에 항생제에 노출될 경우 그 영향이 키에 반영될 수 있다는 것. 사람의 경우 평소에는 항생제를 접하지 않다가 감염질환에 걸렸을 때 간헐적으로 고농도의 항생제에 노출되므로 사육기간 내내 저농도의 항생제에 노출되는 가축과는 패턴이 다르지만, 항생제가 어떤 식으로든 키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블레이저 교수의 생각이다. 바이러스 질환인 감기에도 툭하면 항생제를 처방하는 우리나라 관행(혹시 모를 2차 감염을 막기 위해)이 요즘 아이들의 놀라운 발육속도에 영향을 준 건 아닐까.

 

이처럼 영양상태에서 항생제까지 키에 미치는 환경의 영향이 유전자를 능가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즉 환경 차이가 큰 남한 아이들과 북한 아이들을 비교할 경우 환경의 영향이 유전의 영향보다 더 클 수도 있지만(북한 사람들 다수는 심각한 만성영양결핍으로 키가 꽤 작다) 어차피 환경이 비슷비슷할 경우 결국은 평균이 바뀔 뿐 상대적인 분포는 유지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즉 필자가 한 세대 뒤에 태어났더라도 키가 지금보다 5센티미터 더 커질 뿐 평균과의 차이는 비슷할 거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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