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루텐을 위한 변명

2014.07.07 17:18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밀 프리앙의 유화 ‘뫼르트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1888). 오른쪽 끝에 커다란 빵을 자르는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공기가 80%인 빵이 만들어질 수 있는 건 밀에 들어있는 글루텐 때문이다. - 위키피디아 제공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밀 프리앙의 유화 ‘뫼르트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1888). 오른쪽 끝에 커다란 빵을 자르는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위키피디아 제공

  에이커당 더 많은 칼로리를 생산하고(옥수수, 쌀) 재배가 더 쉬우며(옥수수, 보리, 호밀) 영양소가 더 많은(퀴노아) 곡물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밀의 세계정복은 믿기 어렵고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성공 비결이 뭘까? 바로 글루텐이다.
- 마이클 폴란, ‘요리를 욕망하다’
 
  요즘 필자는 매주 두세 편씩 쓰는 에세이를 준비하는 시간을 빼면 번역 작업에 매달려 있다(어제 본문 번역을 끝냈다!). 책을 번역한다는 건 분명 ‘언제 다 하나…’라며 한숨짓게 만드는 지루한 작업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씩 깨달음을 주는 뭔가가 있다. 물론 이제 겨우 번역서 두 권을 낸, 오역을 줄이는 게 당면과제인 초보가 주제넘은 말을 한 것 같기는 하지만.

 

  번역을 할 때 어려움이자 잔재미(약간의 어려움이 없으면 재미도 없다!) 가운데 하나가 문화가 배어있는 단어나 표현을 번역할 때다. 예를 들어 ‘On a corner of her desk sat a 1915 microscope that her brother found in a junk shop.’이라는 문장에서 ‘her brother’는 책 다른 곳에 추가 정보가 없을 경우 정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번역이 불가능하다.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자 형제’라고 번역하면 정확하기야 하겠지만 자연스러운 표현은 아니다.

 

  최근 한 번역서를 읽다가 오역을 발견했는데, 앞과 비슷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역자가 깜빡한 경우다. ‘밀, 옥수수, 쌀처럼 식용 풀을 주로 재배하는…’이라는 문장으로, 원서의 ‘rice’를 무심코 쌀로 번역한 것 같다. 영어에서는 식물과 열매(씨) 모두  rice이지만 우리는 엄연히 ‘벼’와 ‘쌀’로 구분한다. 이건 우리말이 좀 특이한 경우로, 우리말에서도 다른 곡물은 이런 식으로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학에서는 어떤 대상을 세분해 다르게 부르는 경우 그 대상이 그 문화에서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개인보다는 집단(관계)을 중시했던 우리는 호칭이 발달했고 쌀을 주식으로 했기에 벼와 쌀로 나눠 부른 게 아닐까.

 

  최근 ‘사이언스’에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는데(5월 9일자), 서구인과 동아시아인 사이에 나타나는 심리적, 문화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가설을 제안하고 있다. 소위 ‘벼농사 이론(rice theory)’으로 불리는 이 가설에 따르면, 동아시아인들이 관계지향적이고 통합적 사고를 하는 이유가 벼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주의이고 분석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은 밀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밥을 먹건 빵을 먹건 어차피 주성분은 탄수화물인데 이게 어떤 경로로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

 

  물론 뭘 먹었느냐가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핵심은 농사짓는 방법의 차이다. 즉 벼농사는 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규모 관개시설이 필요하고 농사를 지을 때도 이웃 간에 물을 잘 나눠 써야 한다. 또 피(잡초)를 뽑는 작업 등 밀농사에 비해 두 배 이상 손이 많이 간다. 결국 벼농사는 개인(부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 결과 벼농사권에서는 상부상조하는 관습이 이어져왔고 ‘나보다는 우리’를 앞에 둘 수밖에 없었다.

 

  반면 밀농사는 자연 강우에만 의존하면 되고 일이 고되기는 해도 나 혼자 힘으로 내가 먹을 걸 얻는 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농사의 독립성이 컸고 그만큼 다른 사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는 것. 이런 생활패턴이 수천 년 이어져오면서 동아시아인과 서구인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생겼다는 것. 결국 ‘brother’와 ‘오빠 남동생 형 동생’의 차이도 밀과 벼(쌀)에서 비롯된 셈이다. 그런데 왜 우리 동아시아 사람들은 쉬운 밀을 놔두고 고생고생하면서도 굳이 벼를 재배한 걸까.

 

  답은 쌀이 다른 것들과는 격이 다른 곡물이라는 데 있다. 도정한 쌀로 밥을 하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이 된다. 즉 도정 외에 아무런 추가 작업 없이 알곡 그대로 익혀도 식감이 뛰어난 유일한 곡식이 바로 쌀이다. 반면 밀은 굳이 이렇게 먹겠다면 못 먹을 거야 없지만 식감은 쌀밥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꽁보리밥을 생각하면 감이 올 것이다(진화상으로 보리는 벼보다 밀에 가까운 식물이다.)

 

  그럼에도 밀은 벼, 옥수수와 함께 세계 3대 작물로 건재하고 있다(옥수수는 대부분 사료나 시럽, 기름채취용이므로 사실상 밀과 벼 양자구도다). 물론 벼에 비해 일손이 덜 들고 재배조건이 까다롭지 않다는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류가 알곡을 먹는 대신 가루로 빻아 반죽을 해 면을 뽑거나 빵을 만들어 먹는 방법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건, 밀에는 쌀에는 들어있지 않는 ‘글루텐(gluten)’이라는 단백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글루텐이 인류 건강의 적으로 지목돼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글루텐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일일 것이므로, ‘보들보들한 빵을 사랑하는’ 필자가 글루텐의 변호인으로 한 번 나서보겠다.

 

●면과 빵 등장의 일등 공신

 

밀알에는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이라는 단백질이 있다. 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하면 이 두 단백질이 섞이면서 단백질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이를 글루텐이라고 부른다. (제공 ‘과학동아’)  - (주)동아사이언스 제공
밀알에는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이라는 단백질이 있다. 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하면 이 두 단백질이
섞이면서 단백질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이를 글루텐이라고 부른다. - (주)동아사이언스 제공

  사실 글루텐은 특정한 단백질의 이름이 아니라 글리아딘(gliadin)과 글루테닌(glutenin)이라는 두 단백질이 만나 형성된 그물구조의 단백질 복합체다. 따라서 정작 밀알 내부에는 글루텐이 없다. 그런데 밀을 가루로 만든 뒤 여기에 물을 부어 개어주면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이 만나면서 그물망을 형성하는데, 그 정도는 반죽시간과 강도, 기술 등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일본 우동 장인들이 반죽을 할 때 집착에 가까운 들이는 공을 들이는 이유다. (글루텐의 물성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과학동아’ 2009년 9월호 ‘면발의 힘 글루텐’ 참조.)

 

  글루텐 덕분에 면을 쉽게 뽑을 수 있는 게 밀이 널리 퍼진데 큰 역할을 했지만 밀이 쌀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효모(yeast)와의 만남이다. 밀가루 반죽에 효모가 들어감으로써 발효로 나온 이산화탄소와 에탄올이 반죽을 부풀리고 오븐에서 추가로 부풀어 오르면서(온도가 높아지면 내부 기체가 팽창한다) 공기 80%인 빵이 만들어진다. 호밀을 제외한 다른 곡물은 이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데, 바로 글루텐이 없기 때문이다(보리에도 소량 있지만 반죽을 부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즉 밀반죽의 글루텐 그물망이 내부에서 생긴 기체(이산화탄소와 에탄올)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잡아주면서 이런 놀라운 변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면과 빵이라는 식품 유형을 가능하게 한 글루텐이 요즘 집중포화를 받는 이유는 소위 ‘글루텐 민감성(gluten sensitivity)’으로 불리는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런 사람들은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기질환을 비롯해 자가면역질환, 천식, 비염, 두통 등 각종 증상이 일어나 고생을 하는데 전체 인구의 10%에 이른다고. 그러다보니 최근 한 신문 건강면에 ‘글루텐이 장(腸) 염증 일으켜 온갖 병 원인 된다’라는 단정적인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글루텐이 왜 문제가 될까. 지금까지 이론에 따르면 밀가루 음식을 먹었을 때 글루텐이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채 소장 점막에 남아 면역계를 자극해 염증을 유발한다고 설명한다. 즉 글루텐의 소화흡수율이 낮은 사람이 밀가루 음식을 많이 또는 장기적으로 먹으면 탈이 난다는 것이다.

 

  필자는 다행히 글루텐 민감성은 아닌 것 같고 따라서 남 얘기라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글루텐 민감성에 대해서는 늘 찜찜하게 생각했다. 인구의 10%가 민감성을 보인다면 많은 문화권에서 밀이 어떻게 주식이 될 수 있었을까. 젖당 불내증(lactose intolerance)에서 알 수 있듯이 우유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권과 거의 안 먹는 문화권의 경우 불내증은 안 먹는 문화권에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즉 주식으로 먹는 문화권에서는 이미 자연선택으로 불내증인 유전형은 솎아졌다는 말이다. 이 논리를 적용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서 글루텐 민감성이 10%라면 이해가 가지만, 예전부터 밀 문화권이었던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10%라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글루텐 프리의 함정

 

  미국의 과학월간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2월호에는 학술지 ‘네이처 의학’의 뉴스 담당 편집자인 록산느 캄시의 흥미로운 칼럼이 실렸다. 글루텐이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유일한 밀 단백질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심각한 장염증질환인 셀리악병(celiac disease)도 글루텐에서 원인을 찾고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즉 글루텐 민감성인 사람들은 소화계의 증상이 덜 심각하고 두통 같은 다른 증상도 보이는 반면 셀리악병처럼 심각한 장 손상이나 염증은 보통 나타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글루텐 때문이라고 단정한다는 것.

 

  그런데 최근 글루텐 질환으로 알려진 병들이 실제로는 글루텐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 밀에 있는 다른 단백질이나 다른 곡물 때문에 생긴 질환일 수 있다는 것. 밀에 들어있는 글루텐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다는 주장이 처음 나온 건 190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 빵이 부족해지자 셀리악병으로 죽은 어린이 숫자가 급감했다는 사실을 네덜란드의 의사 빌렘 카렐 딕케가 발견하면서 글루텐의 어두운 면이 본격 조명됐다. 그 뒤 ‘글루텐 없는(gluten-free)’ 식이요법이 등장했다.

 

  그러나 최근 셀리악병 환자들에 대한 면밀한 연구결과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글루텐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식품 속 다른 단백질이나 심지어 탄수화물이 원인일 수도 있다는 것. 2010년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글루텐 민감성으로 알고 있는 사람 32명을 대상으로 글루텐 프리 식이요법을 실시한 결과 불과 12명만이 증상이 개선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60%는 글루텐 민감성이 아니고 따라서 효과도 없는 식이요법을 한 셈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6월 23일자에는 글루텐 프리 식품이 실제로 몸에 좋다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뉴스가 실렸다. 오히려 탄수화물과 당분의 함량이 높아 비만 등의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더 높다는 것. 현재 미국에서만 글루텐 프리 시장이 233억 달러(약 24조 원) 규모라고 한다. 어쩌면 대형 식품회사들은 진실의 미묘함을 알면서도 건강 염려증이 지나친 현대인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해 모든 문제를 글루텐으로 몰아 마케팅 컨셉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빵 vs. 나쁜 빵

 

물리학의 관점에서 빵은 고체거품으로 80%가 공기로 이뤄져 있다. 빵은 글루텐과 효모의 위대한 공동작품이다.  - (주)동아사이언스 제공
물리학의 관점에서 빵은 고체거품으로 80%가 공기로 이뤄져 있다. 빵은 글루텐과 효모의 위대한 공동작품이다. - (주)동아사이언스 제공

  지난 2006년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출간하며 주목을 받은 저술가 마이클 폴란의 최신작 ‘요리를 욕망하다’가 얼마 전 번역출간됐다(원서는 2013년 출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야기꾼답게 이번 책도 굉장히 재미있는데 구성부터 기발하다. 즉 ‘불, 물, 공기, 흙’이라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에 따라 네 파트로 이뤄져 있다. 저자가 굳이 이런 비과학적인 원소 개념을 쓴 이유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에서는 ‘4원소’가 수소, 산소 같은 과학적인 ‘진짜’ 원소보다 직관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1부 불은 바비큐, 즉 불을 이용한 요리를 다루고 있다. 2부 물은 냄비요리, 즉 물에 담궈 오래 끓이는 요리에 대해 설명한다. 4부 흙은 발효를 이용한 요리로 김치도 꽤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3부 공기가 바로 빵 얘기다. 필자는 ‘요리를 욕망하다’ 3부를 읽으며 빵에 대한 새로운 사실 두 가지를 알게 됐다.

 

  먼저 ‘발효종(starter)’에 대한 것으로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필자는 발효종이나 과립 형태의 이스트나 어차피 효모이므로 별 차이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빵을 만들 때마다 배양하고 있는 천연효모를 넣어주는 게 발효종을 이용한 빵이고 과립을 물에 풀어 넣어주는 게 소위 이스트를 쓰는 빵이므로, 전자가 좀 낫기는 해도(효모가 활성 상태이므로) 본질적으로 별 차이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보니 발효종은 단순히 천연효모가 아니라 효모와 수십 가지 세균이 섞여있는 상태라는 것. 그 결과 발효종으로 발효한 빵과 이스트로 발효한 빵은 풍미와 식감이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이런 사실을 깨달은 건 1970년으로 이듬해 학술지 ‘응용 미생물학’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따라서 포스트정보화 시대에 사는 필자는 무려 44년이 지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셈이다!).

 

  ‘요리를 욕망하다’는 저자가 각 유형의 요리를 직접 배우면서 체험하는 과정을 기록하며 이론이라는 살을 붙이는 형식인데, 3부에서도 제빵을 배우는 과정이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발효종 얘기도 이스트를 쓰는 요즘 빵이 아닌 빵의 원형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즉 빵 반죽에서 일어나는 발효의 실체를 몰랐던 사람들은 19세기 미생물학이 등장하면서 효모가 주역이라는 걸 알게 됐고, ‘시간이 돈’이라는 자본주의 관념에 휩쓸리면서 전통적이지만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발효종 발효를 포기하고 이스트 발효로 넘어왔다는 것. 이 과정에서 ‘경제성’을 더 높이기 위해, 즉 시간을 더 단축하기 위해 팽창제, 감미료, 방부제, 반죽 개량제 등 소위 ‘식품 첨가물’을 이삼십 가지나 넣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효종을 쓰는 오리지널 제빵 과정은 발효에만 오랜 시간이 걸리고 반죽도 굉장히 묽게 해야 한다고 한다. 그 결과 생산성은 떨어지지만 오븐에서 나오는 빵은 풍미가 깊고 촉촉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발효를 거쳐 밀의 소화흡수율이 훨씬 높아진다고 한다. 폴란은 책에서 “발효종 발효는 부분적으로 글루텐을 분해하여 소화를 돕기도 한다”며 “어떤 연구자들은 글루텐불내증과 셀리악병의 증가 원인이 현대의 빵들이 긴 발효 시간을 거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쓰고 있다.

 

  책에는 발효종을 쓰는 프랑스식 전통 제빵을 재현하려는 제빵사들이 몇 명 소개돼 있는데, 특히 어느 날 저자가 파티에서 우연히 시골빵을 먹어보고 감동해 추적 끝에 알아낸 빵집 ‘타르틴(Tartine)’과 제빵사 채드 로버트슨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샌프란시스코 교외 한적한 곳에 위치한 빵집 타르틴에서는 오후 늦게야 빵이 나오는데 하루에 250덩이만 굽는다고. 그래서 오후가 되면 사람들이 가게 앞에 줄을 선다고 한다.

 

  그런데 책에 로버트슨이 ‘타르틴 빵(Tartine Bread)’이라는 책을 펴냈다는 내용이 있다. 결국 필자는 이 책을 사고야말았는데, 받아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책이었다! 하드커버이면서도 속에 쿠션을 넣어 마치 빵처럼 폭신폭신한 이 책은 요리학교를 다니던 한 청년이 우연히 현장실습을 간 천연발효종 빵집 주인의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고 마침내는 자신만의 빵집을 만들어 오랫동안 추구해온 ‘진정한’ 빵을 만드는 삶의 여정이 많은 멋진 사진들과 함께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로버트슨은 책에서 “이스트 빵은 오리지널에서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결핍돼 있다”며 “편리함이 우선이 되면 풍미가 희생된다”고 쓰고 있다. 책 9쪽에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밀 프리앙의 유화 ‘뫼르트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1888)가 실려 있는데, 그림 오른쪽에 보면 한 남자가 커다란 빵 덩어리를 껴안고서 칼로 떼어내고 있다. 로버트슨은 그림 속 빵이 지녔을 풍미를 ‘상상’하며 이를 재현하기 위해 수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빵을 먹고 탈이 난 많은 사람들이 글루텐을 원망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글루텐이 아니라 제대로 만들지 않은 빵을 먹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수십 가지 첨가물을 잔뜩 집어넣어 속성을 대량생산한 빵을 먹으면서 깊은 풍미를 잃고 대신 글루텐민감성을 얻게 된 건 아닐까. 다음은 20세기 초 ‘사기 억제를 위한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gress for the Suppression of Fraud)’가 소집한 전문가 집단이 제시한 빵의 법적 정의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대부분의 빵은 빵이 아니다!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빵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밀가루, 사워도우배양액(발효종) 혹은 맥주나 곡물로 만든 효모, 식수, 소금을 섞은 반죽에서 나온 산출물에만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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