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②

2013.04.25 11:38
[강석기의 과학카페 107]2012년 하늘나라로 간 과학계의 별들 지난해 출간된 책 ‘나는 몇 살까지 살까?’는 1500명의 인생을 80년간 추적한 수명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를 담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루이스 터먼 교수가 1910년대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그의 사후 후배 연구자들에게 이어져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우리가 장수의 비결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는 장수와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 ‘일을 지나치게 열심히 하지 말라’, ‘유쾌한 생각을 해 스트레스를 줄여라’, ‘조깅이나 트레킹 같은 활동적인 취미를 가져라’ 라는 예들이다. 그렇다면 장수의 비결은 무엇일까.

방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장수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보이는 요인은 ‘성실함’이라고 한다. 저자들은 책에서 “근검절약하고 끈기 있는 사람,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사람,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오래 살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생활패턴을 보이는 대표적인 직업군으로 과학자를 꼽았다.

이번에 소개하는 과학자 25명의 평균수명은 82.3세다. 90세 이상 산 사람도 7명이나 됐다. 성별로 보면 남성(22명)은 83.9세, 여성(3명)은 70.7세다. 남성 과학자의 수명은 미국인 남성 평균인 76세보다 8년을 더 살았다. 반면 여성은 평균인 82세보다 11년이나 짧았지만 불과 세 명이라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이들의 삶을 보면 성실함과 책임감, 꼼꼼함이 몸에 배어있었던 것 같다. 성실함이 장수의 최고 비결이라는 수명프로젝트의 연구결과를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9. 버나드 로벨 (1913. 8.31 ~ 2012. 8. 6) 개인 빚을 져가며 전파망원경을 지은 천문학자


지름 76m인 거대한 전파망원경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채(로벨망원경) 버나드 로벨(Bernard Lovell)은 만 99세 생일을 몇 주 앞두고 지난 8월 6일 세상을 떠났다. 1913년 영국 올드랜드커먼에서 태어난 로벨은 브리스톨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1936년 박사학위를 받고 맨체스터대로 옮겼는데 여기서 평생의 스승인 패트릭 블래킷을 만났다. 블래킷은 안개상자를 만들어 우주선(cosmic ray)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194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로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이더 개발에 참여해 독일군에 타격을 입히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 때 경험은 훗날 전파망원경을 연구할 때 도움이 됐다. 1945년 맨체스터대로 돌아온 로벨은 군사용 레이더 장비를 가져와 시 외곽 부지에 천체 관측용으로 개조해 설치했는데 이렇게 해서 조드럴뱅크천문대가 세워졌다.

1947년 로벨 연구팀은 지름 66m인 고정식 전파망원경을 설치했고 안드로메다은하에서 오는 전파를 발견했다. 하지만 2% 부족함을 느낀 로벨은 접시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전파망원경을 만들기로 하고 동분서주한 결과 1957년 지름 76미터인 전파망원경 ‘마크Ⅰ’이 완공됐다. 당시 든 비용은 64만 파운드로 지금 돈으로 220억 원에 해당한다.

그런데 예산 책정 과정에서 법적 문제가 생겨 그 해결과정에서 로벨이 5만 파운드(약 17억 원)를 개인 빚으로 떠맡기로 해 자칫 채무불이행으로 감옥에 갈 처지가 됐다. 이 때 소련에서 스푸트니크 위성을 발사했고 마크Ⅰ이 스푸트니크의 신호를 포착함에 따라 로벨의 선견지명에 다들 감탄한다. 결국 재산가인 너필드 경이 나서 대신 빚을 갚아줬다.

이후 마크Ⅰ은 눈부신 활약을 펼쳤는데 퀘이사를 발견했고 최초로 중력렌즈를 관측했다. 또 중성자별인 펄서를 발견하는 등 전파천문학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87년 30주년을 맞아 이 망원경 이름을 ‘로벨망원경’으로 바꿔 로벨의 공적을 기렸다. 로벨은 1971년 천문대에 방문자 센터를 만들었고 지금까지 수백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1981년 천문대장직을 넘긴 뒤에도 로벨은 수년 전까지 규칙적으로 출근하며 업무를 봤다고 한다.


10. 제임스 크로 (1916. 1.18 ~ 2012. 1. 4) 유전학계의 대부 전설이 되다

온라인저널 ‘플로스 유전학’ 2월호에 실린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노먼 아른하임 교수팀의 논문은 정자가 생성될 때 일어나는 돌연변이와 그로 인한 종양의 발생 이면에 있는 유전 메커니즘을 다루고 있다. 꽤 흥미로운 결과인지 이 논문에 대한 해설도 같이 실렸다. 그런데 정작 논문보다 해설이 더 관심을 끌었다. 해설을 쓴 사람은 위스콘신대 제임스 크로(James Crow) 명예교수로 그 전달에 96세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해설 원고는 죽기 며칠 전에 저널에 보냈다고 한다.

저명한 유전학자 크로는 1916년 미국 피닉스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교수로 있던 프랜즈대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뒤 텍사스대에서 유전학으로 194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다트머스대를 거쳐 1948년 위스콘신대에 자리를 잡았다.

크로 교수는 유전학 중에서도 집단유전학을 깊이 연구했는데 집단유전학이란 한 개체가 아니라 개체군(집단)의 수준에서 유전자의 분포와 진화를 설명한다. 크로는 뛰어난 연구자이면서 멘토였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다. 그 가운데 한명이 모투 기무라로 크로와 함께 중요한 결과를 많이 냈다.

매트 리들리의 대중과학서적 ‘붉은 여왕’에도 두 사람이 1965년 발표한 논문이 소개돼 있는데, 유성생물과 무성생물의 돌연변이 패턴 차이를 수학 모델을 써서 명쾌히 설명한 내용이다. 이런 순수 연구와 함께 크로는 1980년대 미 정부에 수사에 DNA검사를 적극 활용하라고 조언해 오늘날 널리 쓰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크로는 의학의 발달로 자연선택의 힘이 줄어들고 임신연령이 지연되면서 현대인의 게놈에 해로운 유전자 변이가 쌓이는 걸 걱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아버지의 나이가 많을수록 정자에 돌연변이가 급증해 자식이 정신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올해 ‘네이처’(8월 23일자)에 실리기도 했다. 크로는 젊었을 때 정자를 보관해 뒀다가 자식이 필요할 때 인공수정을 하는 해결책을 내놓기도 했다.

한편 크로는 비올라 연주 실력이 직업 연주자 수준이어서 45년 동안이나 매디슨심포니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예후디 메뉴인과도 협연한 적이 있다고 한다.

크로는 자신에게는 엄격했던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의 실험실에서 발견한 중요한 두 성과에 대한 논문에 공동저자로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걸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제자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여도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86년 교수직을 물러난 뒤에도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연구와 집필활동을 계속한 크로가 이때 쓴 리뷰 논문들은 지금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플로스 유전학’ 2월호에 실린 논문의 공동 제1저자는 최수경, 윤송로 씨로(유학생인지 미국인인지, 대학원생인지 박사후연구원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크로 교수의 유작인 해설은 이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줬을 것이다.


11. 도널 토머스 (1920. 3.5 ~ 2012.10.20) 집념으로 100만 명의 목숨을 살려낸 의사

유도만능줄기세포를 개발한 일본 교토대 야마나카 신야 교수가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지만 사실 줄기세포와 관련한 노벨상은 1990년 도널 토머스(Donnall Thomas)가 먼저 받았다. 성체줄기세포치료라고 할 수 있는 골수이식법을 확립한 공로다.

1920년 미국 텍사스 마트에서 태어난 토머스는 텍사스대에서 화학을 공부한 뒤 1946년 하버드대의대에서 의학박사가 됐다. 1955년 메리이모젠바셋병원에서 근무하던 토머스는 흥미로운 발견을 한다. 치명적인 방사선량에 노출된 쥐에게 골수를 이식하자 건강을 회복했던 것. 여기서 힌트를 얻은 토머스는 1957년 한 백혈병 환자에 방사선을 쪼여 암세포를 다 죽인 뒤 일란성 쌍둥이에게서 얻은 골수를 이식하는 수술을 시도했다. 이식은 성공적이었으나 얼마 뒤 백혈병이 재발해 환자는 사망했다.

다른 의사들도 비슷한 시도를 했지만 다들 실패하고 포기했다. 감염이나 심각한 면역거부반응으로 환자가 죽었던 것. 하지만 토머스는 개를 대상으로 동물실험을 계속해 조직 매치 여부를 알 수 있는 표지를 찾는 동시에 면역억제약물도 개발했다. 이를 바탕으로 1969년부터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을 재개했고 1979년 마침내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으로부터 골수이식을 받는 수술이 성공했다.

이후 세계 곳곳에서 의사들이 골수이식법을 배우러 토머스 박사팀이 있는 프레드허치슨암연구센터를 찾았고 그 결과 지금까지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골수이식으로 목숨을 건졌다. 토머스 박사는 1989년 은퇴한 뒤에도 집필과 강연으로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12. 닐 암스트롱 (1930. 8. 5 ~ 2012. 8.25) 달에 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 사람

수애 이병헌 주연의 영화 ‘그해 여름’(2006)은 1969년이 배경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대학생들이 여름농활을 간 시골에서 어느 날, 마을에 한 대 뿐인 텔레비전 앞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아폴로11호의 우주인들이 뒤뚱뒤뚱 달을 거니는 화면을 보고 웅성거리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1969년 7월 20일 달에 첫 발을 내디딘 역사적인 인물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이 지난 8월 25일 심장수술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1930년 미국 오하이오 와파코네타에서 태어난 암스트롱은 어릴 때 비행쇼를 보고 비행기에 홀렸다. 6살 때 처음 비행기를 타본 암스트롱은 16살에 학생 비행사 자격증을 땄다. 퍼듀대에서 항공공학을 공부하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조종사 훈련을 받고 참전하는데 미 해군의 장학금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사히 복무를 마친 암스트롱은 1952년 복학했고 졸업 뒤 미항공우주국(NASA)의 전신인 미항공자문위원회(NACA)에 취직했다. 엔지니어로 일하던 암스트롱은 1962년 제2기 우주비행사에 선발됐다. 그의 첫 번째 미션은 1966년 제미니 8호의 선장으로 아제나 위성과 도킹을 하는 임무였다. 그리고 3년 뒤 아폴로 11호에 몸을 실었다.

암스트롱은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사가 됐지만 그 뒤 그는 신시내티대에서 항공우주공학을 가르치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심지어 NASA에는 암스트롱의 이런 모습에 섭섭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자신이 달에 첫 발을 내디딘 건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라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를 늘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13. 샐리 라이드 (1951. 5.26 ~ 2012. 7.23) 우주왕복선을 탄 첫 미국 여성 우주비행사

1977년 어느 날 미국 스탠퍼드대 물리학과 박사과정 학생인 샐리 라이드(Sally Ride)는 학보를 보다가 우연히 NASA에서 우주비행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발견했다. 라이드는 지원했고 이듬해 8000여명의 지원자 가운데 최종 선발된 35명에 이름을 올렸다. 이 가운데 여성은 6명이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983년 6월 18일, 라이드는 챌린저호에 탑승해 미국 여성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됐다.

1951년 미국 캘리포니아 엔시노에서 태어난 라이드는 스와스모어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3학기를 마친 뒤 학교를 중퇴하고 어린 시절 꿈이었던 테니스 선수가 되기로 한다. 그러나 재능이 있다는 코치의 만류에도 테니스를 접고 스탠퍼드대에서 물리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박사과정에 들어가 성간기체의 X선 흡수에 대해 연구하던 중 NASA의 광고를 본 것이다.

라이드는 1983년과 1984년 두 차례 우주비행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 우주비행사를 보는 언론의 시선에 실망했다고 한다. 즉 전문적인 기술을 지닌 우주비행사로서가 아니라 “셔틀에서도 요리를 할 건가요?” 같은 질문만 쏟아졌기 때문이다. 라이드는 첫 미션에서 셔틀에 달린 15미터 길이의 로봇 팔을 조종해 위성을 설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1987년 NASA를 나온 라이드는 복학해 박사과정을 마무리 하고 캘리포니아대(샌디에이고)에서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2001년에는 샐리라이드사이언스재단을 설립해 청소년들에게 과학자의 꿈을 심어줬다. 라이드 역시 암스트롱처럼 명성이나 돈에 초연했다고 한다. 참고로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는 1963년 보스토크 6호를 타고 지구를 48바퀴 돈 러시아의 발렌티나 테리시코바다.


14. 키스 캠벨 (1954. 5.23 ~ 2012.10. 5) 복제양 돌리의 이름을 지어준 생물학자

탁월한 업적을 낸 과학자에게 주어지는 쇼 상(Shaw Prize) 2008년 수상자는 키스 캠벨(Keith Campbell)과 이언 윌머트, 야마나카 신야였다. 앞의 두 사람은 1996년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주역이고 야마나카는 유도만능줄기세포를 만든 사람이다. 이 세 사람이 조만간 나란히 노벨상을 탈 것으로 예상됐지만, 올해 상을 받은 야마나카 교수의 파트너는 1962년 핵치환법으로 개구리 복제에 성공한 존 거든이었다.

노벨상위원회가 안 된다던 포유류 복제 성공을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캠벨과 윌머트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못한 걸까. 아마도 후자는 아닐 것이다.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발표 3일 전인 10월 5일 키스 캠벨이 58세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1954년 영국 버밍엄에서 태어난 캠벨은 런던대에서 미생물학을 공부한 뒤 1988년 서식스대에서 세포주기조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로슬린연구소에 들어간 캠벨은 포유류 복제에 도전해 1995년 양의 배아에서 추출한 세포의 핵을 난자핵과 바꿔치기해 복제양 모라그와 메간을 탄생시켰다.

이듬해 성체의 체세포인 젖샘 세포의 핵을 치환해 탄생시킨 복제양이 바로 돌리다. 이들의 성공 요인은 캠벨이 핵치환을 하기 전에 체세포와 난자의 세포주기를 일치시켜야 재프로그래밍이 된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실제 윌머트는 복제양 돌리가 탄생하는데 캠벨의 기여도가 66%라고 밝힌바 있다. 한편 캠벨은 태어난 복제양에게 가수 돌리 파튼(Dolly Parton)을 기려 ‘돌리’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1997년 로슬린연구소를 떠난 캠벨은 PPL세러퓨틱스에서 발생학팀을 이끌었고 1999년 노팅엄대에 자리를 잡았다. 2000년 캠벨과 PPL은 돼지 복제에 성공했다. 캠벨은 최초의 포유류 복제 성공이라는 영예와 함께 인간 복제의 길을 열었다는 비난도 받았는데, 그 자신은 동물복제를 옹호하면서도 인간복제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5. 루이즈 존슨 (1940. 9.26 ~ 2012. 9.25) 구조생물학 발전에 기여한 결정학자

20세기 후반 생명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게 만든 두 축은 분자생물학과 구조생물학이라고 할 수 있다. 클로닝(제한효소를 이용해 DNA를 조작하는 과정)과 PCR(중합효소연쇄반응)로 대표되는 분자생물학 기법이 유전자를 마음대로 갖고 놀게 했다면, 핵산과 단백질 3차원 구조를 원자 수준에서 알 수 있게 한 구조생물학은 생체분자의 기능을 명확히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0년 영국 우스터에서 태어난 루이즈 존슨(Louise Johnson)은 런던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뒤 1962년 런던의 왕립연구소에서 단백질 결정학 분야의 개척자인 데이비드 필립스 박사 실험실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당시 필립스 박사팀은 박테리아 세포벽을 파괴하는 효소인 라이소자임의 구조를 밝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구조가 밝혀진 단백질은 미오글로빈과 헤모글로빈 둘 뿐이었다.

1965년 마침내 라이소자임의 구조가 규명됐는데 단백질로는 세 번째, 효소로는 처음이었다. 당시 존슨은 라이소자임의 기질(효소가 인식하는 대상)인 N-아세틸-글루코사민의 구조를 밝혀 연구를 도왔다. 학위를 마친 뒤에는 미국 예일대 프레드 리처즈 교수팀에 합류해 리보핵산가수분해효소 S의 구조를 밝혔다(네 번째 단백질).

1967년 존슨은 옥스퍼드대로 옮긴 필립스 교수팀에 합류했고 1990년 필립스 교수 뒤를 이었다. 존슨은 글리코겐 인산화효소를 비롯해 많은 단백질의 구조를 밝혔는데, 그녀는 단순히 단백질의 구조를 알아내는데 만족하지 않고 이를 통해 생화학 반응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1976년 존슨이 톰 블룬델과 공저한 ‘Protein Crystallography(단백질 결정학)’은 이 분야의 고전으로 남아있다.

존슨은 1968년 28세 때 결혼했는데 남편은 14세 연상인 파키스탄 출신의 천재 이론물리학자 압두스 살람이다(살람은 재혼). 살람은 1979년 전자기약력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1996년 사망했다.


16. 로이 브리튼 (1919.10. 1 ~ 2012. 1.21) 게놈 이해의 기초를 쌓은 분자생물학자
“사람과 침팬지는 게놈이 98.7%나 똑같은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나?”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2002년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한 논문을 보면 이 질문의 전제가 틀렸다. 게놈을 전반적으로 고려했을 때(DNA 삽입과 삭제를 포함) 사람과 침팬지는 95% 정도 일치한다는 것. 이 논문을 쓴 로이 브리튼(Roy Britten)이 올 초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워싱턴DC에서 태어난 브리튼은 버지니아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맨해튼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뒤 학교로 돌아와 1951년 프린스턴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브리튼은 생물학으로 관심을 돌려 카네기연구소에서 생물리학을 연구했고 1971년 칼텍으로옮겼다. 물리학자의 관점으로 생명현상을 바라본 브리튼은 DNA 이중나선이 온도에 따라 풀리고 엮이는 과정을 분석해 게놈의 크기를 추측했고 동물 게놈에 반복염기서열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는 개별 유전자보다는 유전자가 구성된 전체, 즉 게놈의 구조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가 물리적 방법으로 해석한 게놈의 구조는 훗날 게놈해독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기본 골격이 됐다. 앞에서 소개한 2002년 논문도 게놈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교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다. 즉 유전자의 염기서열만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

최근 인간 게놈 전체의 기능을 규명하는 엔코드(Encode) 프로젝트의 연구결과가 발표되면서(‘네이처’ 9월 6일자, ‘사이언스’ 9월 7일자) 그동안 쓰레기 DNA라고 치부했던, 유전자와 관련된 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게놈의 90% 이상을 차지)의 대부분이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놈 전체를 봐야한다는 브리튼의 혜안이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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