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하늘나라로 간 과학계의 별들

2013.04.25 11:34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의 숙고에 있다.
- 바뤼흐 스피노자, ‘에티카’

수 주 전 필자는 문득 2012년 마지막 과학카페 주제로 올해 타계한 과학자들의 삶과 업적을 다뤄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과학저널 ‘네이처’와 ‘사이언스’에는 세상을 떠난 과학자에 대한 회고의 글이 실린다. ‘네이처’에는 ‘부고(obituary)’, ‘사이언스’에는 ‘회고(retrospective)’라는 코너에 동료나 제자들의 절절한 문장들이 올라온다.

올해 ‘네이처’와 ‘사이언스’에는 각각 19건의 부고기사가 실렸다. 연초 지난해 말 타계한 과학자들을 소개한 글도 있어서 올해 사망한 과학자만 치면 ‘네이처’가 17건, ‘사이언스’가 16건이다. 뜻밖에도 두 저널에 함께 실린 사람은 8명에 불과하다. 올해 25명의 과학계의 큰 별들이 떨어졌다.

이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도 5명 들어있지만 대중들이 알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저널에 실린 한 페이지짜리 회고 글만 읽어봐도 이들이 그 분야에서 대단한 인물이고 과학이라는 거대한 성채를 짓는 데 벽돌 몇 장씩은 쌓아올렸다는 걸 알 수 있다.

과학자가 된 사연도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들 시간이 지날수록 과학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뜨거워졌단다. 90세가 넘어서도 논문을 쓰고, 암으로 5년간 투병하며 죽기 1주일 전까지 연구에 몰두한 인물도 있다. 저널에 실린 회고 글을 바탕으로 2012년 세상을 떠난 과학자 25명의 삶과 업적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1. 레나토 둘베코 (1914. 2.22 ~ 2012. 2.19) 친구 따라 미국 갔다가 노벨상 받다

이탈리아 카탄차로에서 태어난 레나토 둘베코(Renato Dulbecco)는 토리노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저명한 해부학자이자 조직학자인 쥬젭페 레비로 당시 둘베코와 같이 공부하던 동료 두 명이 리타 레비몬탈치니와 살바도르 루리아다. 레비의 제자 세 사람은 훗날 미국으로 건너갔고 모두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루리아가 1969년, 둘베코가 1975년, 레비몬탈치니가 1986년).

1936년 22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둘베코는 군의관으로 입대해 2년 뒤 제대했지만 얼마 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1940년 다시 징집됐다. 러시아 전선에 배치된 그는 부상을 입어 제대했고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반독일 레지스탕스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소중한 시절을 다 보내고 낙담해 있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대학에 자리를 잡은 루리아가 그와 레비몬탈치니를 초청한 것.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간 둘베코는 동물 바이러스를 연구하며 과학자로서 삶을 시작한다. 1950년대 후반 들어 그의 관심은 당시 막 발견된, 설치류에서 암을 일으키는 폴리오마바이러스로 옮겨간다.

1962년 소크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둘베코는 1968년 바이러스의 DNA의 유전자가 숙주의 게놈에 끼어들어가 발현돼 정상세포를 암세포로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그는 197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암을 유발하는 바이러스가 여럿 알려져 있고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인유두종바이러스(HPV)의 경우 백신까지 개발됐다.

그 뒤 둘베코는 본격적으로 암연구에 뛰어들어 주로 유방암 연구에 집중했다. 1980년대에는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출범하는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암을 이해하는데 인간게놈정보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3년 고국 이탈리아로 돌아간 둘베코는 밀란에 실험실을 운영하며 연구를 계속했는데 94세인 2008년까지 논문의 저자로 참여했다.


2. 노먼 렛빈 (1949 ~ 2012. 5.28) 에이즈 퇴치에 헌신한 음악 신동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노먼 렛빈(Norman Letvin)은 음악에 타고난 소질을 보여 5살 때 혼자 플루트를 불었고 얼마 뒤 오보에와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있었다. 깜짝 놀란 부모는 아들을 클라리넷 연주자로 키웠고 렛빈은 고등학생 때 연주여행을 다녔다. 그는 요요마와 함께 모차르트 클라리넷 사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줄리어드대와 커티스음악원에서 장학금 입학을 제안을 받았지만 렛빈은 하버드대로 갔고 1975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노벨상 수상자인 바루지 베나세라프의 실험실에서 박사후과정을 과정을 하면서 면역학에 빠져든 렛빈은 그 뒤 에이즈 연구에 뛰어든다.

하버드대의대에 자리를 잡은 그는 원숭이면역결핍증바이러스(SIV)를 분리해 이 바이러스가 붉은털원숭이에서 사람의 에이즈 같은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처음으로 에이즈 동물 모델을 찾은 것이다. 이런 결과들을 바탕으로 렛빈은 에이즈 백신을 개발하는데 몰두했는데,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가 백신연구센터를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빌게이츠재단의 에이즈 백신 지원 자문을 맡기도 했다.

렛빈은 5년 전 췌장암 판정을 받은 뒤 투병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연구와 활동을 계속해왔고, 죽기 1주일 전까지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에이즈 백신은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데, 최근 캐나다 온타리오대 강칠용 교수팀이 환자의 몸에서 항체를 생성시키는데 성공한 백신을 개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3. 노턴 진더 (1928.11. 7 ~ 2012. 2. 3) 형질도입 발견한 분자생물학 개척자

분자생물학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노턴 진더(Norton Zinder)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영재로 불과 18살에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은 위스콘신대 조슈아 레더버그 교수의 실험실에 들어갔다. 진더보다 세 살 연상인 레더버그는 1946년 대장균이 서로 직접 접촉해 유전자를 교환하는 현상인 ‘접합(conjugation)’을 발견했고 이듬해 위스콘신대에 부임했다.

진더는 살모넬라를 대상으로 비슷한 현상을 찾다 놀라운 발견을 했다. 박테리아에 감염하는 바이러스, 즉 박테리오파지를 통해서 살모넬라 사이에 유전자 교환이 일어났던 것. 진더와 레더버그는 이 현상에 ‘형질전환(transducti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59년 레더버그는 접합과 형질전환 발견의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59년 록펠러대학에 자리를 잡은 진더는 박테리오파지 연구에 몰두했고 1961년 RNA를 게놈으로 갖는 박테리오파지 f2와 DNA 단일가닥 게놈인 박테리오파지 f1을 잇달아 발견했다. f2는 박테리아에 달라붙어 세포 안으로 게놈을 넣고 이 게놈 자체가 전령RNA로 작용해 바이러스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1980년대 후반 진더는 DNA이중나선을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함께 인간게놈프로젝트(HGP)가 출범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HGP와 별도로 인간게놈해독 경쟁에 뛰어든 크레이그 벤터의 요청으로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 2000년 6월 백악관에서 경쟁자였던 HGP의 프랜시스 콜린스와 셀레라의 벤터가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인간게놈해독(초안)을 공동발표하는 역사적인 자리를 만드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4. 오스카 밀러 (1925 ~ 2012. 1.28) 교과서에 있는 ‘그 사진’을 찍은 사람

‘공부는 때가 있다’고들 말하지만 100% 그런 것도 아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문구도 있지 않은가. 오스카 밀러(Oscar Miller)가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1925년 미국 가스토니아에서 태어난 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3년간 복무한 뒤 대학에 들어갔다.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에서 작물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은 밀러는 담배 농장에서 6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이런 삶에 만족하지 못한 밀러는 다시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미네소타대 박사과정에 들어가 식물유전학을 연구했다. 학위를 마친 뒤 박사후과정을 하면서 염색체 구조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61년 36세에 오크리지국립연구소에 자리를 잡은 밀러는 전자현미경으로 DNA가닥에서 유전자가 전사되는 장면을 포착하는 시도를 한다.

1969년 5월 23일자 과학저널 ‘사이언스’의 표지는 그가 동료 바바라 비티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찍는데 성공한 리보솜RNA 유전자의 전사 장면이 장식했다. 분자생물학 기법이 미비했던 당시 유전자의 크기나 배열, 발현에 대해서는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는데 이 사진 한 장으로 많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진은 그 뒤 생명과학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그 뒤 밀러는 이 기법을 써서 박테리아에서는 전사와 번역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생명과학 교과서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다. 밀러는 스승으로서도 탁월했는데 그를 거쳐 간 많은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에게 깊은 감화를 줬다고 한다. “과학문헌에서 읽은 내용을 모두 믿어서는 안 된다” “쓰레기 같은 박사논문주제들이 넘쳐난다” 같은 말로 제자들에게 통념에서 벗어나 알려진 게 별로 없는 과학의 최전선에 과감하게 뛰어들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5. 마틴 플라이슈만 (1927. 3.29 ~ 2012. 8. 3) 상온핵융합, 사기는 아니었다!

과학에 관심이 많은 40대 이상인 사람들은 198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상온핵융합(cold fusion)’ 발표 해프닝을 기억할 것이다. 중수(D2O)에 팔라듐 전극을 담그고 전류를 흘려주면 중수소분자가 생기는데 이 과정에서 30℃인 용액이 50℃까지 올라가 수일 간 지속됐다는 것. 실험을 한 미국 유타대의 화학자 두 사람은 이 열이 팔라듐 결정격자 사이로 들어간 중수소가 서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킨 결과라고 설명했다.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의 발표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전 세계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재현실험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했고 결국 이들은 사기꾼으로 몰려 과학계에서 추방됐다. 물의를 일으킨 두 화학자 가운데 한 명인 마틴 플라이슈만(Martin Fleischmann)이 지난 8월 3일 사망했다.

1927년 체코슬로바키아 칼즈배드에서 태어난 플라이슈만은 부계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나치를 피해 가족이 영국으로 이주했다. 임페리얼칼리지런던에서 화학을 공부한 플라이슈만은 뉴캐슬대를 거쳐 1967년 사우스햄튼대에 자리를 잡았다. 1974년 플라이슈만 연구팀은 훗날 표면화학을 연구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 표면향상라만분광법(SERS)으로 개발될 현상을 발견해 주목을 받았다.

1980년 무렵에는 초미세전극을 개발해 낮은 전해질 농도에서 일어나는 전극 반응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기도 했다. 탁월한 전기화학자였던 플라이슈만은 1985년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실험을 하기 위해 제자 스탠리 폰즈가 있는 미국 유타대로 떠났다.

그는 팔라듐이 스펀지처럼 결정격자 사이로 수소분자를 끌어들인다는 사실로부터 만일 수소 농도(압력)가 높아지면 수소핵융합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추측했고 폰즈와 실험을 착수해 마침내 핵융합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이들은 좀 더 확실한 결과를 얻을 때까지 발표를 미루고 있었는데 인근 브리검영대 물리학자 스티븐 존스 교수팀이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한다. 자신들의 연구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만나 3월 24일 ‘네이처’에 같이 논문을 제출하기로 했지만, 플라이슈만과 폰즈는 약속을 어기고 3월 11일 ‘전기분석화학저널’에 논문을 제출했고 23일에는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인 발견을 선점하려는 유타대의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존스 교수팀의 논문은 4월 27일자 ‘네이처’에 실렸다. 결국 순간의 비겁한 행동으로 그들의 연구조차도 의심을 받았고 결국 두 사람은 사기꾼으로 몰려 유타대를 떠났다.

1992년 프랑스의 도요타자동차 실험실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상온핵융합 연구를 계속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고 1995년 플라이슈만은 은퇴했다. 폰즈 역시 1998년 회사를 떠난 뒤 잠적했다. ‘네이처’ 9월 6일자에 부고를 쓴 과학저술가 필립 볼은 1989년 당시 ‘네이처’의 물리과학분과 편집자였는데 상온핵융합은 엉터리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197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 브라이언 조셉슨 교수는 ‘네이처’ 10월 4일자 서신란에 필립 볼의 부고를 비판하면서 자신이 8월 31일 ‘가디언’에 기고한 부고를 소개했다. 즉 상온핵융합은 사기라는 대중의 생각과는 달리 진실은 좀 더 복잡하며, 그 뒤로도 여러 나라 많은 과학자들이 상온핵융합을 진지하게 연구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분명한 건 플라이슈만이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데이터를 조작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플라이슈만은 죽을 때까지도 상온핵융합이 언젠가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6. 필립 토비아스 (1925.10.14 ~ 2012. 6. 7) 인종차별에 반대한 고인류학자

“내가 하루에 세 시간만 잔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네다섯 시간이라면 몰라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세계적인 고인류학자인 필립 토비아스(Phillip Tobias)는 1300편이 넘는 책과 논문을 발표한 경이로운 인물이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한 결과다.

남아공 더반에서 태어난 토비아스는 1942년 요하네스버그에 정착한 뒤 70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토비아스는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에서 영원한 스승인 해부학자 레이몬드 다트를 만난다. 다트는 1924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을 발견한 사람이다. 토비아스는 1959년 다트의 뒤를 이어 비트바테르스란트대 해부학과 교수가 됐다.

1959년 저명한 고고학자인 루이스 리키는 토비아스를 초청해 탄자니아에서 발굴한 화석들(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을 보여줬고 토비아스는 이를 면밀하게 분석했다. 1964년 리키와 토비아스는 호모 하빌리스 화석 발견을 발표했고 훗날 토비아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와 호모 하빌리스를 상세히 분석한 문헌을 펴냈다.

한편 남아프리카는 인종차별정책으로 악명 높았는데 토비아스는 학창시절부터 이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48년 비인종남아공학생국가연합 대표를 맡았고 이후 40년 동안 줄기차게 반인종주의 활동을 이끌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은 1993년 막을 내렸다. 1999년 넬슨 만델라는 그의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행사로 토비아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토비아스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관심사를 아래의 문장으로 요약했다. 번역은 맛을 못 살려 원문으로 소개한다.

“All things human, humane, humanitarian, and humanistic.”


7. 와일리 베일 (1941. 7. 3 ~ 2012. 1. 3) 스트레스 호르몬의 성배를 발견한 생리학자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태어난 와일리 베일(Wylie Vale)은 라이스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뒤 베일러의대에서 생리학으로 196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 지도교수인 로저 기유맹이 소크연구소로 옮기면서 베일도 따라갔는데 이곳에서 이들은 중요한 호르몬을 잇달아 규명해내는 성과를 낸다.

즉 1970년 감상샘자극방출호르몬을 밝혀냈고 1972년과 1973년 생식샘자극방출호르몬과 성장호르몬을 규명했다. 이 연구결과로 기유맹은 197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기유맹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베일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함께 수상하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고 한다(당시 로절린 얄로우, 앤드루 섈리와 공동수상).

1978년 베일은 기유맹에게 편지를 써 독립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 소크연구소 주차장에 있는 1층짜리 목조 건물에 실험실을 차렸다. 그리고 기유맹을 비롯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찾았으나 실패한, 이론으로만 예측하고 있는 호르몬인 부신피질자극호르몬방출인자(CRF) 사냥에 뛰어들었다. 1981년 베일 연구팀은 첨단 분석장비로 양 수천마리에서 얻은 시상하부라는 조직에서 CRF를 분리하는데 마침내 성공했다. 이로써 우리 몸의 스트레스 반응은 시상하부에서 조절한다는 이론이 확증됐다.

이를 바탕으로 베일은 생명공학벤처인 뉴로크린바이오사이언시스와 엑설레론파마를 설립하기도 했다. 여전히 원기왕성했던 베일은 그러나 하와이 하나의 자택에서 친구들과 흥겨운 저녁시간을 갖고 잠자리에 든 뒤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8. 데이비드 세이어 (1924. 3. 2 ~ 2012. 2.23) 컴퓨터 언어도 개발한 결정학 개척자

192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세이어(David Sayre)는 영재여서 19살에 예일대(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MIT에서 레이더연구에 참여한 뒤, 미래는 생물학의 시대가 되리라고 판단하고 펜실베이니아대 생물학과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1947년 우연히 X선 결정학 논문을 읽고 다시 물리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같은 해 소설가 앤 콜쿤과 결혼했고 영국으로 건너가 1951년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지도교수는 1964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결정학자 도로시 호지킨이다. 세이어는 이 무렵 중요한 논문을 여럿 발표했는데, 1952년에는 ‘원자성(atomicity)’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세이어는 결정이 서로 떨어져 있는 작은 점 같은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상태라고 보고 이를 바탕으로 결정 회절 패턴을 해석하는 ‘사이어 방정식’을 유도해냈다. 1985년 노벨화학상은 세이어와 비슷한 방식으로 결정구조를 해석하는 방법을 개발한 과학자 두 명에서 돌아갔는데 아쉽게도 세이어는 수상하지 못했다.

한편 세이어는 결정 구조를 계산할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 것을 IBM에 제안했는데 결국 IBM의 왓슨연구센터에 들어가 컴퓨터 언어 포트란을 개발하는데 참여하게 된다. 1990년 은퇴할 때까지 IBM에 적을 두면서 세이어는 결정학 연구도 병행했는데 1972~73년 안식년을 호지킨의 실험실에서 보냈다. 이때 아내 앤은 비운의 결정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전기 ‘Rosalind Franklin and DNA’를 집필했다(1975년 출간).

1970년대 세이어는 X선 현미경으로 관심을 돌렸고 IBM의 나노기술을 이용해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1990년 무렵 아내에게 치명적인 질환인 피부경화증이 발병하면서 그는 간병에 전념하기 위해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세이어는 1952년부터 꿈꿔 온, 결정을 만들지 않고도 분자 구조를 밝힐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계속 연구했고 1999년 마침내 비결정 회절패턴을 해석하는데 성공했다. 현재 이 기술은 결맞음회절이미징(CDI)으로 불리는데 연구가 한창이라고 한다. 지난해 파킨슨병 증세가 나타난 이후에도 세이어는 연구에 계속 참여하며 자문을 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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