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발전 이바지하고도 기억되지 않은 여성 암세포, 70년 만에 보상받는다

2020.11.01 12:21
미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 동의없는 사용 수백만달러 규모 배상 약속
헨리에타 랙스는 1920년 8월 1일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다. 이후 1951년 자궁경부암으로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에게 채취한 세포는 불멸의 세포주가 돼 지금까지 연구실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많은 과학자와 의학자들이 그를 기리는 한편, 본인의 동의 없이 이뤄진 검체의 활용에 대해 제도적 보완장치를 고민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헨리에타 랙스는 1920년 8월 1일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다. 이후 1951년 자궁경부암으로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에게 채취한 세포는 불멸의 세포주가 돼 지금까지 연구실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많은 과학자와 의학자들이 그를 기리는 한편, 본인의 동의 없이 이뤄진 검체의 활용에 대해 제도적 보완장치를 고민하고 있다. 동아사이언스 DB

69년간 전 세계 실험실에서 생명과학과 의학 연구에 사용됐지만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헌신에 대한 감사도 받지 못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에 대한 보상이 처음으로 이뤄진다. 이 여성의 세포는 본인과 유족의 동의 없이 전 세계 연구실에서 70년 가까이 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 연구에 활용돼 치료제 개발로 이어져 막대한 이윤까지 창출했지만 대형 연구소가 이에 대한 재정적 배상을 결정한 것은 처음이다..
 
세계적인 의학연구소인 미국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HHMI)는 지난 29일(현지 시각) 유족의 동의도 없이 암으로 사망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헨리에타 랙스의 세포를 실험에 사용한 데 대해 여섯 자리(백만 달러 규모) 기부금을 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헨리에타 랙스는 전 세계 연구실에서 실험에 쓰고 있는 이른바 ‘헬라(HeLa)’ 세포를 제공한 여성이다. 그녀는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나 1951년 31세에 암으로 숨졌다. ‘헬라’라는 이름의 세포주는 그녀의 자궁경부에서 채취한 암세포다. 세포주는 같은 유전자 구성과 특징을 갖는 배양 세포로, 영양만 공급하면 무한히 증식하도록 만든 ‘불멸 세포’다.(2020년 9월11일 세포로 의학 발전에 공헌한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세포주는 같은 조건에서 다양한 실험을 해야 하는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무척 중요하다. 헬라는 결국 사람 세포 가운데 최초로 실험실에서 증식하는 데 성공해 최초의 인간 세포주가 됐다. 
일반인들은 대부분 그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의 헌신이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수많은 의학적 혜택을 누리지 못했을 수 있다.

 

이 세포주는 70년 가까이 증식을 이어오며 최초의 소아마비 백신 개발, 최초의 복제세포 개발, 체외수정(시험관아기) 시술법, 암 연구, 유전자 지도 연구, 독성검사 등 전 세계 의학과 생명과학의 판도를 바꾸는 다양한 연구에 이바지했다. 암세포 연구자인 이현숙 서울대 교수는 지난달 동아사이언스와 인터뷰에서 “잘 자라고 오랜 연구로 정보가 축적돼 신뢰성이 높아 지금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세포주”라며 “헬라 없는 분자세포생물학 실험실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헨리에타 랙스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그가 태어난 달인 8월부터 1년간 일대기를 조명하고 그가 남긴 업적을 평가하는 기념사업을 시작했다. 헨리에타 랙스 100주년 기념사업회 제공
‘헨리에타 랙스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그가 태어난 달인 8월부터 1년간 일대기를 조명하고 그가 남긴 업적을 평가하는 기념사업을 시작했다. 헨리에타 랙스 100주년 기념사업회 제공

대형 과학연구기관이 그녀 세포를 실험에 쓴 데 대해 뒤늦게 보상을 약속한 것을 비롯해 과학자들이 그녀에 대한 추모에 나선 것은 세포 기증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광범위한 실험에 사용된 첫 사례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세포 주인인 헨리에타 랙스의 동의를 받지 않는 데다 연구자와 생명과학 기업들이 이 세포주를 활용해 막대한 이익을 거뒀지만 정작 세포 기증자인 랙스와 가족에겐 아무런 대가가 돌아가지 않았다. 본인 동의 없이 의료기록이 공개되고 심지어 게놈 정보가 온라인에 발표되는 등 ‘공공재’처럼 취급됐다. 그가 아프리카계에 여성이라는 점까지 결합하면서 이 문제는 인종차별, 젠더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세포주를 만든 모든 과정이 윤리적이지 않다며 지금이라도 헬라 세포주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 일부 기업들은 세포주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 일부를 랙스를 기리는 재단에 기부하고 가족과 다른 검사대상물 제공자를 위해 쓰도록 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의과학 연구기관인 하워드 휴즈의학연구소가 배상에 나선 것은 과학계 일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 데다 올 초 비무장 흑인 남성이 경찰에 살해되면서다. 과학에서 자행된 인종적 블공정 행위를 청산하고 다른 연구기관이 따를만한 선례를 만들자는 데서 시작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앞서 지난달 1일 헨리에타 랙스 탄생 100년을 맞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윤리 문제와 불편한 진실을 소개하기도 했다. ‘미국의사협회지(JAMA)’를 포함해 권위 있는 학술지들이 기고를 통해 그를 기렸다. 세계 최대의 의학 연구기관인 미국립보건원(NIH) 프랜시스 콜린스 원장은 올해 템플리튼 상을 받고 상금 140만 달러 중 일부를 랙스 재단에 기부하면서 검사대상물 채취와 관련된 연구윤리 정책의 변경을 시사하고 나서기도 했다. 

 

하워드 휴즈 연구소는 배상액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에린 오시아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장은 “헬라 세포 사용에 대해 헨리에타를 인정하고 세포가 부당하게 획득됐음을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며 “과학과 의학이 공정함을 찾기까지 갈 길이 아직 멀다”고 말했다.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의 배상에 대해 랙스의 손녀인 제리 랙스웨이는 “모든 사람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가족 일부는 이번 배상에 대해 감사해 하고 있다”며 “다른 연구소들도 이번 선례를 따르기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헨리에타 랙스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그가 태어난 달인 8월부터 1년간 일대기를 조명하고 그가 남긴 업적을 평가하는 기념사업을 시작했다. 

유명한 인간 유래 세포인 헬라(HeLa) 세포는 미국에 살았던 여성 헨리에타 랙스의 암 조직에서 나왔다. 실험에 쓰이는 세포가 성별 등 인체의 특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무시돼 왔다. 학자들은 이제라도 고려해서 실험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 제공 미국국립보건원(NIH)
유명한 인간 유래 세포인 헬라(HeLa) 세포는 미국에 살았던 여성 헨리에타 랙스의 암 조직에서 나왔다. 실험에 쓰이는 세포가 성별 등 인체의 특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무시돼 왔다. 학자들은 이제라도 고려해서 실험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 제공 미국국립보건원(NI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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