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보통과학자] 실험생물학의 새로운 도덕경제

2020.09.23 15:00

1979년 록펠러 미팅에서 유전자은행의 설립이 논의되고 나서 이후 1982년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에 유전자은행을 설치하는 역할이 주어지기 전까지 무려 3년의 기간이 걸렸다. 미국이 주춤하던 그 시간에 유럽의 실험생물학자들이 유전자은행의 설립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유럽의 EMBL은 유전자 염기서열 데이터베이스가 한 곳에 집중되어 표준화된 형태로 관리되어야 하고, 컴퓨터를 이용해 디지털화되어야 하며, 누구가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해야 한다는 록펠러 미팅의 기본 원칙을 재확인하는 컨퍼런스를 개최했고, 학술지 네이처는 유럽의 이런 움직임에 “DNA 염기서열을 은행에 저장하다”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록펠러 미팅이 있고 겨우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유럽분자생물학실험실(EMBL)이 공식적으로 유전자은행을 만들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유럽은 이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처럼 거대장비를 이용한 연구소 설립에 성공한 직후였고, 분자생물학에도 CERN 같은 기관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측으로 EMBL을 설립한 후였다.  

 

소유권과 저작권을 둘러싼 데이호프의 실수

 

데이호프는 이미 20년이 넘게 단백질 아미노산 서열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해 온 베테랑 과학자였다. 생물학과 화학계에서 데이호프보다 서열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권위 있는 과학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DNA 염기서열 데이터베이스인 유전자은행 역시 데이호프와 그가 속한 연구소인 미국립생의학연구소(NBRF)로 넘어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1980년 유럽의 EMBL이 독자적인 유전자은행 설립계획을 알리자, 미국립보건원(NIH)도 다급해질 수 밖에 없었다. 1980년 NIH는 유전자은행을 위한 미팅을 개최하고, 데이호프와 고드 그리고 민간회사인 인텔리지네틱스사의 대표 케데스를 소집한다. 이 미팅에 모인 모든 사람은 유전자은행의 안정적이고 빠른 설립을 위해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며, 구조화된 정밀한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다는데 동의한다. 미팅 이후 1년이나 지난 시점인 1981년 12월이 되어서야 NIH는 유전자은행 건립을 위한 공모를 시작한다. 이처럼 NIH가 유전자은행 설립에 주저한 이유 중의 하나로, 당시 NIH를 주도하던 실험생물학자들이 유전자은행의 설립과 같은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을 실험보다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던 분위기가 있었다. 분자생물학자들에게 자연사 전통에서나 중요한 컬렉션, 즉 수집과정은, 연구의 우위에서 실험보다 중요한 행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데이호프는 아미노산 서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운영했던 자신의 경험과 전략이 염기서열 데이터베이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아미노산 서열처럼 염기서열 역시 빠르게 모으는 것보다느 정확도를 유지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몇몇 전문가가 수동으로 일일이 염기서열을 검수하는 모델을 선호했다. 록펠러 미팅 이후 데이호프는 독자적으로 NBRF에 유전자은행을 구축하기 했는데, 아미노산 데이터베이스에서 훨씬 진화한 전화네트워크 방식으로 데이터를 공개해 과학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기 위해선 암호가 필요했고, 재분배 금지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만 했다. 데이호프는 여전히 자신이 만든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염기서열의 소유권이 자신과 NBRF에 귀속되어야만 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NBRF는 유전자은행을 유지하기 위한 연구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다. NIH가 유전자은행 설립을 주저하는 동안, 데이호프는 NBRF의 유전자은행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항공우주국(NASA)에도 연구 지원을 요구했고, 민간 생명공학 기업에도 데이터베이스의 정보를 상업적으로 팔 수 있다고 회유하며 연구지원을 요구했다. 염기서열 정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데 NIH가 회의적이자, 데이호프는 염기서열 데이터베이스 사용자에게 이용료를 받기 시작했고, 이런 데이호프의 유전자은행 운영방식은 결국 실험생물학자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왜냐하면 실험생물학자들이 생각하기엔 유전자은행에 자신이 제공한 염기서열 정보의 소유권은 데이호프가 아니라 연구자 본인에게 있는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1981년 NIH에 제출한 데이호프의 연구제안서에는 소유권에 대한 데이호프의 이런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특히 그는 아미노산 서열 데이터베이스와 동일한 방식으로 염기서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을 선호했다. 데이호프는 수작업으로 출판된 논문을 전부 뒤져 염기서열 정보를 직접 입력하는 방식을 선호했고, 이렇게 구축된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소유권은 NBRF가 가져야 하고, 이용자는 재분배를 할 수 없다는 신념을 고수했다. 게다가 자신의 전공분야인 분자진화학 연구에 걸맞는 긴 염기서열의 데이터베이스화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정책으로, 진화생물학이 아닌 분자유전학자들의 짧은 염기서열 데이터베이스를 차별하기도 했다.

 

1980년 이런 방식으로 이미 10만여개의 염기서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데이호프는, 자신만만했고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유전자은행을 구축 중이던 월터 고드는 데이호프에게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해 줄 것을 요청한다. 당시 고드 뿐 아니라 EMBL도 데이호프에게 데이터베이스의 정보를 공유할 것을 부탁했지만, 데이호프는 그 누구와도 데이터를 교환할 의지가 없었다. 물론 데이호프가 구축한 유전자은행의 데이터베이스가 가장 크고 광범위했으며, 그 서열정보를 모으기 위해 그가 엄청난 노력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데이호프는 오래된 자연사 전통의 수집가들처럼, 일단 자신의 소유가 된 컬렉션에 대해 강력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자연사 전통에서 실험생물학으로 - 컬렉션에서 데이터베이스로

 

18세기 자연사 전통에서 광범위한 자연사 컬렉션을 구축하는 방법은 대부분 선물교환이나 기부를 통한 방식이었다. 18세기에는 개인들의 취미활동으로 이렇게 수집되던 자연사 컬렉션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에 의해 임명된 탐험 여행을 통해 좀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연구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18세기와 19세기를 관통하는 자연사 컬렉션의 공통점은, 컬렉션의 소유권이 무조건 수집가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사 전통에서 훌륭한 컬렉션의 구축 여부는, 수집가자 연구공동체에서 지닌 권위와 수집가의 개인적인 네트워크에 의존했다. 특히 당시 수집가는 스스로가 탐험을 통해 컬렉션을 모으는 연구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전자은행의 설립과정에서 데이호프와 고드 둘 모두 이런 수집가의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들은 안락의자에 앉은 수집가처럼, 자신은 수집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수집된 표본에 대한 권리만 주장하는 게으른 수집가에 불과했다.

 

유전자은행에 저장된 염기서열의 소유권은 누구의 것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고드와 데이호프는 서로 생각이 달랐다. 데이호프는 자연사 전통의 컬렉션처럼, 수집가가 소유권을 갖는걸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드는 출판된 지식의 소유권은 연구공동체 모두에게 소유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철학의 차이는 고드가 NIH에 제출한 연구제안서에도 잘 드러난다. 고드는 실험생물학자들이 자신이 발견한 연구결과의 공개에서 선취권과 저자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걸 잘 알고 있었다.

 

실험생물학자들의 전통에서 연구결과는 화폐와 마찬가지로 취급되었고, 특히 연구결과에 기여한 저자의 기여도는 해당 연구자의 경력에 치명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실험생물학자들은 자신이 발견한 염기서열 데이터가 출판전에 다른 연구자들에게 알려지는걸 극도로 꺼려했고, 출판전까지는 염기서열의 소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왜냐하면 경쟁하는 연구자들이 자신이 발견한 염기서열을 이용해 먼저 출판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실험생물학 전통에서 논문의 저자됨과 선취권 등은 연구의 동기부여를 결정하는 중요한 보상시스템의 일부다, 출처 의학논문 출판윤리 가이드라인(2008년 1월 31일 발간)
실험생물학 전통에서 논문의 저자됨과 선취권 등은 연구의 동기부여를 결정하는 중요한 보상시스템의 일부다, 출처 의학논문 출판윤리 가이드라인(2008년 1월 31일 발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드는 연구자 개개인이 아니라 연구자들이 염기서열 데이터를 출판하는 학술지의 편집자들이 유전자은행에 서열정보를 업로드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연구자 개개인이 염기서열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단계는 학술논문으로 출판이 되기 직전까지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학술지 편집자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전제 하에, 각 학술지에 출판된 염기서열 정보를 표준화된 형태로 고드의 유전자은행에 전송하는 방식인 셈이다. 연구자들의 소유권 주장을 학술지 편집자라는 중간 매개자를 이용해 피해나간 고드의 제안은 NIH 연구제안 심사자들에게도 환영받았다. 개개의 연구자가 아니라 학술지를 매개로 하는 유전자은행 시스템은 개인간의 관계에 의존하는 데이호프의 방식보다 훨씬 현대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출판된 논문의 염기서열 정보를 개개인이 찾아서 저장하는 데이호프의 수동화된 시스템에 비해, 학술지를 이용하는 고드의 방식은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자동화하는데 훨리해 보였다.

 

고드는 학술지가 연구자들에게 갖는 출판이 과학의 보상체계에서 하는 역할을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실험생물학자들에게 염기서열의 발표는 그 자체가 과학적 보상이 요구되는 연구활동였고, 이처럼 보상이 필요한 연구결과가 아무런 댓가도 없이 유전자은행에 저장된다는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데이호프처럼 출판전 염기서열의 정보까지 공유하라는 압박은 실험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동기부여가 되는 출판의 선취권과 저자로서의 권뤼를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 과학자는 성직자가 아니다. 즉, 과학자 또한 자신의 경력을 위한 사회적 보상체계를 따를 수 밖에 없다. 유전자은행의 설립철학에서 데이호프는 바로 이 보상체계를 무시했고, 고드는 그 보상체계를 인정하며 우회로를 선택한 것이다.

 

아실로마 미팅 그리고 생명에 대한 특허논란

 

때마침 1975년엔, 재조합 DNA의 이용에 관한 아실로마 컨퍼런스가 열렸고, 여기서 유명한 아실로마 선언이 만들어진다. 아실로마 회의는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간이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기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세계의 권위자들이 모여 진행한 학술회의로, 이 회의에서 연구의 안정성 확립을 위한 구제책과 실험 기준 등이 확정되었다. 아실로마 회의 직후 NIH는 재조합 DNA 실험의 지침서를 발표했고, 당시 분자생물학의 연구비를 대부분 집행하던 NIH는 생명공학과 관련된 시민사회의 여론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게다가 1980년대 미국에선 생명체에 대한 특허권을 두고 논쟁이 한창이었다. 특히 당시 생명체에 대한 첫 특허가 미국 제넨텍사의 인슐린에 승인되면서, 과연 생명정보에 특허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미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NIH는 염기서열 정보의 저작권이 모두에게 있다고 제안한 고드와 빌포스키의 제안서에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연구공동체의 도덕경제의 측면에서도, 컴퓨터를 이용한 자동화와 효율성의 측면에서도, 그리고 NIH와 같은 국가기관이 처해 있던 정치적 맥락에서도, 유전자은행은 로스 앨러모스로 가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이었던 것이다. 로스 앨러모스에 군사연구를 수행했던 나쁜 이미지가 있었지만, 고드는 그 부정적인 약점을 슈터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설득해 냈다. 특히 고드가 강조했던 온라인 기반의 데이터베이스는 당시 발전하던 컴퓨터 네트워크 연구와도 맞아 떨어졌고, 과학자들이 선호하던 공유문화를 실현할 좋은 도구로 보였다.  

 

1975년 재조합 유전자 연구의 위험성과 안전한 연구를 위해 소집된 아실로마 회의의 모습이다.  서던 캘리포니아대 제공
1975년 재조합 유전자 연구의 위험성과 안전한 연구를 위해 소집된 아실로마 회의의 모습이다. 서던 캘리포니아대 제공

1982년 6월 30일, NIH는 유전자은행을 구축할 연구소로 로스 앨러모스를 선정하고, 고드와 그의 연구팀에게 5년간 32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데이호프는 매우 실망했지만, 계속해서 자신만의 유전자은행을 구축해나가려 했으나, 발표 후 8개월이 지난 시점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서열 데이터베이스 구축에서 20년이 넘는 경험을 지녔던 데이호프의 유전자은행은, 원자폭탄을 컴퓨터로 연구하던 물리학자의 아이디어에 주도권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이 결정 이후 로스 앨러모스는 유전자은행을 구축하기 시작하고, 유럽과 일본과의 공조로 빠르게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나갔다. 물론 많은 학술지들이 서열정보를 공유하는데 주저했으나, 고드의 끈질긴 설득으로 1980년대 말이 되면 출판된 염기서열 정보가 유전자은행으로 업로드 되는 과정이 모두 자동화 된다. 1990년 시작된 인간유전체프로젝트는 유전자은행에 염기서열을 모으기로 합의한다. 1992년 유전자은행은 로스 앨러모스를 떠나 NIH로 이관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알린다. 이제 유전자은행은 물리학의 중심지에서 의생물학의 중심지로 이동했고, 물리학자들이 생물학자들과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냈던 분자생물학이, 이제 컴퓨터과학과 의학이라는 분야와 새로운 협력을 시작하는 시대를 알렸다. 유전자은행의 설립은 자연사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수집의 방식을 구축했고, 실험생물학의 도덕경제 속에서 새로운 지식생산의 기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Strasser, B. J. (2011). The experimenter's museum: GenBank, natural history, and the moral economies of biomedicine. Isis102(1), 60-96.

-Strasser, B. J. (2008). GENETICS: GenBank--Natural History in the 21st Century?. Science, 322(5901), 537-538.

-데이호프가 만든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면 컴퓨터 화면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떴다고 한다.

Welcome to the NAS [Nucleic Acid Sequence] Reference Data System. You are licensed to use this data for your own research. As a licensee, you are legally obliged not to redistribute the data or otherwise make it available to any other party.

-실험생물학 전통에서 논문은 아주 중요한 화폐의 역할을 담당한다. https://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300164

-실험생물학 전통에서 논문의 저자됨과 선취권 등은 연구의 동기부여를 결정하는 중요한 보상시스템의 일부다.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908220279

- http://www.postech.ac.kr/ppostechian-section/2018-%EB%B4%84%ED%98%B8-science-black-box-2017%EB%85%84-%EA%B3%BC%ED%95%99%EC%9E%90%EB%93%A4%EC%9D%80-%EC%99%9C-%EB%8B%A4%EC%8B%9C-%EC%95%84%EC%8B%A4%EB%A1%9C%EB%A7%88%EC%97%90-%EB%AA%A8%EC%98%80/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2450.html

 

 

※필자소개 

김우재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생물학과에 진학했지만 간절히 원하던 동물행동학자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고 바이러스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을 연구했다. 초파리 수컷의 교미시간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모두가 무시하는 이 기초연구가 인간의 시간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닌다.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 타운랩을 준비 중이다. 최근 초파리 유전학자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책 《플라이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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