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 게놈 해독이 동물 것보다 복잡할까?

2013.04.25 11:01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논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 앙리 파브르

책의 운명도 사람과 비슷해서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것처럼 진가를 알아보는 인물의 눈에 띠어 부활하기도 한다. 독일 작가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의 책 ‘빵의 역사’가 바로 그런 경우다.

베를린에서 태어난 야콥은 다양한 분야에서 40여 권의 책을 남긴 르네상스적 지식인으로, 필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빵의 역사’다. 유태인이었던 야콥은 나치를 피해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 1944년 미국에서 영어판으로 먼저 출간됐다. 1920년대 한 식물학자와 대화를 나누다 빵의 역사에 대해 책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았고, 20년 간 4000여 권의 책을 참조하며 써낸 게 바로 이 책이다.

출간 당시 ‘빵과 밀’의 ‘황금가지(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의 명저)’라며 격찬을 받았지만, 출간 몇 년만에 절판됐고 1970년 작은 출판사에서 다시 책을 냈지만 역시 흐지부지됐다. 그런데 1990년대 미국의 저술가인 린 앨리가 책을 준비하면서 빵에 대한 역사 자료를 조사하다 우연히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됐고, 야콥의 천재성에 매료된 그의 노력 덕분에 1997년 다시 빛을 봤다.

국내에서는 2002년 번역 출간됐다. 어떤 계기인지는 이제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필자는 감명 깊게 이 책을 읽었고 뒤이어 출간된 야콥의 ‘커피의 역사’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야콥의 책들에 대한 국내 독자들의 평가는 필자만의 것이 아닌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절판되지 않고 스테디셀러로 남아있다.

 

서두에 나온 파브르의 말은 ‘빵의 역사’ 제1장에서 야콥이 인용한 글귀다. 1장에는 ‘풀들의 경쟁’이라는 절이 나오는데 저자는 여기서 밀의 작물화 과정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풀 가운데 기장이 가장 먼저 작물이 됐고 뒤이어 보리가 선택돼 기장을 밀어내고 사랑받다가 마침내 밀이 작물화됐다. 보리와 밀은 다정하게 공존했으나 이집트에서 밀가루로 효모 발효 빵을 만드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밀은 ‘곡식의 왕’이 됐고 그 지위를 오늘날까지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밀에는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이 풍부해 반죽에 효모를 넣고 숙성시키면 효모가 토해내는 이산화탄소 기체가 글루텐 막을 빠져나가지 못해 반죽이 부푼다. 이를 오븐에 구우면 보들보들한 빵이 나온다. 반면 보리에는 글루텐이 거의 없어 빵을 만들면 딱딱해진다. 반죽이 부풀어 부드러운 빵을 만들 수 있는 건 밀과 호밀뿐이다.

야콥은 책에서 “이집트에서 재배한 밀은 오늘날 미국, 캐나다,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들판을 뒤덮고 있는 밀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초기 재배종인 엠머밀(emmer wheat)이었다”라며 “고대 로마인은 이 최초의 밀과 다른 밀을 교배하여 얻은 개량품종을 이집트 전역에 심었다”라고 썼다.

우리가 밀이라고 알고 있는 식물은 이 개량품종으로 보통밀 또는 빵밀(bread wheat)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엠머밀은 거의 재배되지 않고 거기서 유래한 듀럼밀(durum wheat)이 재배되고 있는데 주로 파스타용으로 쓰이기 때문에 마카로니밀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듀럼밀은 노란색을 띠고 단단하기 때문에 스파게티 면은 보통밀로 만드는 국수 면과 달리 색이 노랗고 더 오래 삶아야 한다.


●밀족 식물 공통조상에서 게놈 덩치 커져

 

2002년 벼 게놈 초안이 발표되고, 2005년에는 곡류로는 처음으로 게놈 해독이 완성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게놈 해독은 미국과 영국 등 서구권에서 시작했는데 왜 밀 게놈 해독은 우리나라가 참여하고 일본이 주도한 벼 게놈 국제컨소시엄에 뒤쳐졌는가 의문이었다. 쌀과 밀은 각각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라이벌 곡물이 아닌가.

사실 밀 게놈은 해독하기가 불가능한 괴물이었다. 게놈 크기가 너무 크고 구조도 복잡하기 때문. 즉 벼 게놈은 크기가 3억8900만 염기쌍으로 30억8000만 염기쌍인 사람 게놈의 8분의 1에 불과한 반면 밀은 무려 170억 염기쌍으로 사람 게놈의 다섯 배가 넘기 때문이다.

과학저널 ‘네이처’ 11월 29일자에는 빵밀 게놈과 보리 게놈 해독에 대한 연구결과가 나란히 실렸다. 두 논문 모두 게놈을 완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굉장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7년 사이 게놈 서열분석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 비용이 많이 떨어졌고 엄청난 데이터를 해석하는 바이오인포메틱스도 발전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주제라 두 논문과 해설까지 다 읽어봤는데 꽤 흥미로웠다. 먼저 벼 게놈과 밀 게놈의 엄청난 크기 차이는 밀과 보리(게놈 크기가 50억 염기쌍)의 공통조상에서 게놈 크기가 뻥튀기 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벼과 식물 가운데 밀과 보리는 밀족(Triticeae)에 속한다. 참고로 분류학에서는 ‘계문강목과속종’의 단계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중간에 세부 단계를 두고 있는데, 과(科, family)와 속(屬, genus) 사이에는 아과(亞科, subfamily)와 족(族, tribe)이 있다. 즉 밀과 보리가 서로 사촌 사이라면 벼는 이들과 팔촌쯤 되는 셈이다.

즉 과거 어느 시점에서 오늘날 벼의 조상과 보리, 호밀, 밀 등 밀족 식물의 공통조상이 되는 식물이 갈라졌을 텐데 이때 후자에서 소위 ‘쓰레기DNA’로 불리는,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지 않은 부분이 급격히 늘어나 전체 게놈 크기가 10배 이상으로 커져버린 것이다. 이런 부분은 일정한 염기서열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분이 태반이므로 DNA가닥을 쪼개 염기서열을 분석하더라도 이게 어디에 들어가는지 퍼즐을 맞추기가 지극히 어렵다. 아직도 밀과 보리의 게놈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빵밀 유전자 수, 사람 유전자 수 4배 넘어

한편 빵밀 게놈 크기가 보리 게놈보다 3배 이상 큰 이유는 배수성(polyploidy)이라는 현상 때문이다. 보리는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2배체인 반면 빵밀은 6배체이다. 진핵생물은 수벌이나 수개미 같은 반수체를 제외하면 다들 2배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자연계에는 다배체인 생물도 많고 특히 식물에는 더 흔하다. 논문은 빵밀이 6배체가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고 있다.

먼저 450만~250만 년 전에 밀족의 공통조상(염색체 7쌍, 2n=14)에서 종분화가 일어나면서 특성이 뚜렷이 구분되는 게놈을 지닌 식물들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야생밀의 한 종인 트리티쿰 우라르투(Triticum urartu, AA타입)와 밀속과 가까운 에길롭스속(Aegilops, 영어로 goatgrass라고 하는데 염소풀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의, 지금은 멸종한 한 종(BB타입) 사이에 잡종(AB)이 생겼다.

그런데 A타입과 B타입의 염색체는 기원은 같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변형된 상태였기 때문에 서로를 상동염색체로 인식하지 못해 감수분열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이 자체가 생식세포가 돼 수분이 일어나면서 4배체(AABB, 2n=4x=28)가 나왔다. 바로 야생 엠머밀로 이 사건은 길어야 50만 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야콥이 ‘빵의 역사’에서 언급한 엠머밀은 이 야생 엠머밀을 작물화한 것이다. 참고로 인류는 2배체인 일립계밀(einkorn wheat)도 작물화했는데, 엠머밀처럼 오늘날에는 거의 재배되지 않는다.

그리고 약 8000년 전 작물화된 엠머밀과 에길롭스 타우쉬이(Aegilops tauschii, DD타입) 사이에 잡종이 나왔고(ABD),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감수분열이 제대로 안 돼 그 자체가 생식세포가 되면서 6배체(AABBDD, 2n=6x=42)인 빵밀이 나온 것이다. 오늘날 야생에서는 6배체 밀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빵밀은 인류가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게놈 비교 분석으로 추론한 시기는 야콥의 시나리오보다 훨씬 오래 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종간 염색체가 섞이면 생물체가 제대로 살 수 있나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의외로 이런 급격한 변화가 새로운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다. 유전자가 중복되면서 어떤 특성이 강화될 수도 있고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 새로운 기능을 획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불필요해져 퇴화하는 경우도 많다. 빵밀 역시 엠머밀에 비해 수확량도 많고 밀알의 조성도 부드러운 빵이 나올 수 있게 바뀌었다.

논문에 따르면 빵밀의 유전자는 9만4000~9만6000개 정도로 추정된다. 빵밀의 선조인 A, B, D타입 식물은 각각 2만8000개, 3만8000개, 3만6000개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미 1만개 가까운 유전자가 퇴화한 셈이다. 그럼에도 다른 종에 비하면 유전자 개수가 엄청나다. 벼 유전자는 3만7000여개나 되지만, 사람의 유전자는 2만개 조금 넘는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연구자들은 현재 빵밀 유전자의 3분의 2 정도만 그 뿌리를 찾아놓은 상태다(A타입인지 B타입인지 D타입인지). 밀 게놈 완전 해독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인류는 병과 식물들을 작물화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정착했고 문명을 꽃피웠다. 대표적인 벼과 식물의 개통수에 밀의 작물화 역사를 재구성해 봤다. 오늘날 밀(밀빵)이 꽤 복잡한 과정을 통해 탄생했음을 아수 있다. - 강석기 제공

인류는 병과 식물들을 작물화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정착했고 문명을 꽃피웠다. 대표적인 벼과 식물의 개통수에 밀의 작물화 역사를 재구성해 봤다. 오늘날 밀(밀빵)이 꽤 복잡한 과정을 통해 탄생했음을 아수 있다. - 강석기 제공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의 쌀 소비량은 줄어들고 있고 그만큼 밀 소비량은 늘고 있다고 한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 역시 밀에 중독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왠지 밀은 몸에 안 좋은 곡물이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깔려있는 듯하다. 오늘날 아토피의 만연을 밀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물론 쌀과 달리 밀은 일부 사람들에게 심각한 알레르기를 유발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밀은 쌀이나 다른 곡물은 줄 수 없는 독특한 식감과 풍미를 갖는 음식을 만드는 식재료라는 사실이다. 밀이 그토록 복잡한 식물이라는 게 왠지 더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눈 오는 날 베이커리 카페 창가에 앉아 오븐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빵 한 덩어리와 커피 한 잔을 두고 ‘빵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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