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업을 소개합니다]"의사도 기본은 과학자" 내가 감염병 역학조사관이 된 이유

2020.04.18 06:00
 

지금은 사라졌지만 2000년대 이전까지 초등학교에는 ‘탐구생활’이라는 방학숙제가 있었다. 전자석 만들기를 비롯해 다양한 과학 실험을 하는 방학숙제였는데, 과학을 좋아했던 나는 탐구생활을 하기 위해 방학을 기다릴 정도였다. 


특히 셀로판지로 간이 습도계를 만들어 입으로 호호 불면서 직접 작동시켰을 때의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또 ‘과학상자’라는 실험키트로 손끝이 부르틀 때까지 온갖 공작물을 만들며 하루를 보냈던 적도 많았다. 내 손으로 만든 작품이 실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과학 꿈나무, 돌연 의대로 진학하다 

 

중학교 1학년 무렵에 과학잡지(과학동아)를 처음 접했다.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다양한 어린이 과학책을 읽어왔지만, 그중 최신 과학 소식이 깊이 있게 담겨 있는 책은 많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모든 과학 분야의 최신 뉴스를 정리해주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인터넷이 보편화 돼있지 않던 그때 가장 최신의 정확한 과학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사실 요즘도 인터넷을 통해 엄청난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접하기는 하지만, 정보의 진실성과 정확성은 담보할 수 없기에 검증된 정보는 소중하다. 그래서 초등학생 아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얘기하곤 한다. 검증된 책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좋다고 말이다. 최근에는 아들과도 함께 읽고 있다.


다시 어린 시절 얘기로 돌아와, 한때 과학자를 꿈꿨던 나는 굳이 경기도의 입시 선발 비평준화 고등학교(지금으로 치면 자율형사립고)에 입학했다. 과학과 수학에 특화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교과서에 나오는 거의 모든 과학실험을 직접 해볼 수 있는 학교였다. 당시에는 쉽게 하지 못했던 레이저를 활용한 빛의 간섭 실험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과학 꿈나무의 시절을 보낸 나는 고려대 의대로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요즘도 의사 중에서 의과학을 공부하며 과학자의 길을 걷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런 경우가 더욱 흔치 않았다. 결국 본과 4학년 졸업을 앞두고 기초의과학을 더 공부할 것인지, KAIST나 포스텍 대학원 진학을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당시엔 의대 졸업생들이 의과학자의 길로 진출할 수 있는 제도가 부족했던 덕분에(?) 인턴 과정까지 마쳤고, 대신 레지던트 전공선택의 기회가 왔을 때 대부분이 선택하는 내과, 외과 등이 아닌 직업환경의학(당시 산업의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직업환경의학은 직업병, 환경성 질환, 독성학, 질병역학, 보건통계학, 사회과학, 임상의학 등이 모두 융합된 분야로, 지금은 꽤 인기가 높지만 당시에는 대표적인 비인기과였다. 그렇게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니 어느덧 군입대 날짜가 잡혔다. 군 복무는 내 인생을 또 한 번 크게 바꿔놨다.

 

역학조사는 진정한 융합과학 

 

(위) 2015년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지역 보건관계자들과 찍은 사진. 이들과 함께 에이즈(AIDS·후천성 면역결핍증)와 수직감염예방 사업 자문과 현지조사 등을 진행했다. (아래) 2007년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관 훈련 당시 동기들과 찍은 사진. 주황색 방호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필자다. 이때 경험을 살려 지금 민간 자격으로 코로나19 역학조사단에 참여하고 있다.
(위) 2015년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지역 보건관계자들과 찍은 사진. 이들과 함께 에이즈(AIDS·후천성 면역결핍증)와 수직감염예방 사업 자문과 현지조사 등을 진행했다. (아래) 2007년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관 훈련 당시 동기들과 찍은 사진. 주황색 방호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필자다. 이때 경험을 살려 지금 민간 자격으로 코로나19 역학조사단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에서 역학조사관으로 대체복무를 수행하게 됐다. 질병관리본부에서 감염병 역학조사관으로 근무했던 3년 동안 배운 것들은 의대 교육과정과 수련의 과정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다행히 전공이었던 직업환경의학도 역학(epidemiology)을 기반으로 하는 분야였고, 이미 보건학으로 석사학위도 받았던 터라 걱정했던 것보다는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역학조사관으로 처음 조사에 나섰던 사건은 2007년 전남 지역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던 장티푸스 집단발병 사건이었다. 해당 학교에서 총 78명의 장티푸스 환자가 발생했는데 감염원이 오리무중이었다. 처음에는 교내 급식 등을 통한 교내감염을 예상했지만, 지역사회에 전염된 바가 없었고 환자도 특정 학년에 집중해 발생했다는 점에서 다른 감염 경로를 찾아야 했다. 


우리 역학조사팀은 장티푸스 유전자형 검사와 상수도 오염 검사, 환자의 이동경로 분석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감염 경로를 조사했다. 그 결과 수학여행지에서 제공된 양배추가 감염원일 가능성을 찾아냈다. 당시의 날씨를 확인해보니 강우로 오염물질이 상수도로 흘러 들어가, 오염된 물로 씻은 양배추가 장티푸스 감염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역학조사가 단순히 환자의 동선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정 질병의 원인, 전파 경로, 환자들의 상황, 추가 유행 등을 의과학과 통계학을 토대로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통해 질병 유행을 해결(방역)하고 예방하는 것이 바로 역학조사관들의 일이다. 


역학조사관들에겐 산더미 같은 자료들 속에서 자료들의 구멍을 메워가며 과연 무엇이 유의미한 정보인지 합리적으로 찾아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과학과 의학, 사회과학, 인간에 대한 이해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융합과학적인 능력이 필요한 셈이다. 

 

다양한 분야를 이해하는 것만큼은 자신있다고 생각했던 내겐 역학조사가 딱 맞는 일이었다. 이후 2007년 충남 태안 앞바다 허베이스피리트호 원유 유출 사고 환경 역학조사, 2008~2009년 말라리아 역학조사,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유행 등 다양한 역학조사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해외 역학조사관, 공중보건 전문가들과 연구 교류를 할 기회도 생겼다. 이는 나를 개발도상국 등 해외 보건의료체계 분야로 이끌었다.

 

“전 세계 감염병 예방과 확산 방지 위해 힘쓸 것”  

 

 

역학조사관 일을 그만 두고 한동안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서 환자를 진료하기도 했지만, 현재 가장 공들여 하는 일은 국제보건사업이다. 임상의사로 일하던 시절 적정기술과 관련된 기사를 많이 접했다. 


적정기술이란 편의, 위생시설이 부족한 개발도상국 사회의 불편함을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기술을 말한다. 오염된 물을 간이로 정수해 마실 수 있게 하는 필터 빨대가 대표적인 적정기술 제품이다.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가진 경험을 살려 개발도상국의 보건 체계를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료조사와 준비 기간을 거쳐 국제보건컨설턴트로 일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국제보건컨설턴트로서 주로 외교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나 보건복지부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KOFIH)의 해외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캄보디아 국가 감염병 대응체계를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일이나, 우즈베키스탄 역학조사관들의 훈련체계를 개편하는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일, 모로코 결핵 관리 한국팀의 업무를 평가하고 지원하는 일 등을 해왔다. 소위 ‘자유로운 영혼’처럼 세계를 떠돌면서 좋아하는 일로 세상에 기여하는 셈이다. 


특히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처럼 전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창궐하면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개발도상국에서 방역과 역학조사를 통해 전염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도움은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 한국에는 숙련된 역학조사관이 많지는 않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들썩이는 지금 나는 민간역학조사관 자격으로 경기도 지역 방역과 역학조사에 참여하고 있다. 역학조사관들의 피로도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자원해서 일손을 돕는 상황이다. 또 전 세계에 더 나은 보건 서비스가 정착될 수 있도록 아주대 보건대학원에서 감염병 역학과 국제보건을 주제로 학생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다.


이런 일을 나는 융합과학의 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 꿈이었던 과학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과학잡지를 보며 성장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큰 자산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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