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연구자에 의한, 연구자를 위한 부실학회 판정 플랫폼 문 열었다

2020.03.24 17:38
건전학술활동지원시스템(SAFE)의 홈페이지의 첫 화면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제공
건전학술활동지원시스템(SAFE)의 홈페이지의 첫 화면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제공

지난 2018년 연구자들이 부실이 의심되는 학술행사에 참여하거나 부실 학술단체에 논문을 발표한 사례가 잇따라 공개되며 과학계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됐다. 학계에서는 정부가 부실 판별에 대한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내려주지 않을뿐더러 수많은 학술정보의 부실 여부를 일일이 찾기 어렵다고 호소해왔다. 이런 가운데 부실 학회 현황과 부실 학술지 정보를 알려주고 판단이 애매한 학술지와 학술행사에 대해 토론하고 공유하는 온라인 플랫폼이 국내에서 문을 열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이달 24일부터 부실의심 학회나 학술지 등 학술 관련 정보를 확인하고 공유해 이를 예방하고 안전한 학술출판 활동을 지원하는 ‘건전학술활동지원시스템(SAFE)’을 시범 운영한다고 밝혔다. 

 

과학자들은 부실 학술단체의 단서로 철저한 동료 검증과 신뢰할 만한 체계를 갖춘 기존 학술단체와 달리 돈만 내면 논문을 실어주고 내용을 전혀 검증하지 않으며 분야를 가리지 않고 논문을 발표하는 점을 꼽는다. 또 허위로 작성한 논문을 실어주거나 공지한 학회 일정을 실제로는 열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전세계 18개국 23개 언론사는 지난 2018년 국제공조 취재를 통해 부실학회 중 하나인 '와셋'의 실체를 밝혀내면서 이같은 부실학회의 특성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시 한국이 와셋 참여 건수에서 세계 5위를 차지한다는 것이 알려지며 한국 연구자들의 연구윤리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KISTI가 지난해 11월 공개한 '학술논문 데이터로 바라본 부실학술지 게재비중의 국가별 및 분야별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스코퍼스에 등재된 국내 연구진 전체 논문 중 부실학술지로 분류되는 곳에 실린 논문 비중은 7.3%로 나타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3.49%의 두배가 넘는 수치다. 지난해 낙마한 조동호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후보자도 부실 학술단체인 '오믹스' 주관 학회에 참가한 이력이 드러나며 발목을 잡혔다.

 

정부는 한국 연구자들의 부실 학회 참여 실태가 드러나자 부실 학술활동에 참여한 연구자를 강력히 처벌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정작 처벌의 기준이 될 부실학회를 명확히 규정짓지는 못하고 있다. 학술단체의 부실 여부를 명확하게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료 검증은 거치지 않지만 이름이 알려진 연구자들이 모인 학회가 있을수도 있다.  정부는 부실 학회 대신 '부실 의심 학회'라는 용어를 쓰고 연구자가 부실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며 가이드라인만을 제시해 놓은 상태다. 한국연구재단은 지난해 '학술단체의 부실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정부가 연구자들에게 판단을 맡기면서 연구자들의 어려움이 가중됐다. 학술지와 학회의 수가 너무 많은데다 부실 학술지와 학회 수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부실학회 목록으로 꼽히는 제프리 비올 미국 콜로라도대 사서가 만든 '비올 리스트'에 올라 있는 학술지의 수만 2만 163개에 이른다. 부실학회를 여는 대표적 단체인 '와셋'과 '오믹스'가 지금까지 열었다고 공지한 행사의 수도 50만 건에 가깝다. 연구자 입장에선 참가하려는 학술지 혹은 학회와 이들 리스트를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학회를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가이드라인의 문항 수가 많을 뿐더러 처음 참석하는 학회라면 정보를 알기도 어렵다. 한국연구재단은 부실학회 예방가이드에 약탈적 학술지의 특징으로 12가지를 들었다. 연구자는 정보를 일일이 찾아가며 이 가이드라인과 학술지를 대조하는 작업을 거쳐야만 학술지의 부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그마저도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면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과기정통부는 학계가 학회의 부실 여부를 판단하는 데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자 부실 학술활동을 검증하고 참석을 막기 위한 '연구 부정 방지 정책' 방향을 지난해 10월 밝혔다. 과기정통부는 집단 지성 기반의 부실학회 정보 공유 시스템을 구축하고 연구부정방지위원회를 설립해 공유 시스템이서 걸러진 부실학회를 검토해 부실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는 내용을 밝혔다. 이번에 시범 운용에 들어간 SAFE는 그 첫 단계에 해당한다.

 

이 플랫폼은 웹사이트 형태로 연구자들에게 부실 학술출판의 개념과 특징, 가이드라인, 관련 동향 등을 소개한다. 학술지 정보 15만 건과 와셋 및 오믹스 주관 행사 48만 건의 정보가 담겼다. KISTI는 SAFE를 지난해 7월부터 알파 서비스 형태로 운영해오다 이번에 학술 데이터베이스를 확대하고 검색 기능을 추가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SAFE는 학술지를 스스로 평가하지 않고 정보만 제공한다. 연구자들이 부실이 의심되는 학회나 학술지 정보를 파악하려면 학술지 검색서비스를 이용하면 바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대신 평가는 연구자들의 집단 지성에 기댄다. SAFE에는 연구자가 부실의심 학술지나 학술행사를 신고하는 기능이 마련됐다. 신고된 학술지에 대해 부실학술활동 토론방에서 연구자들이 온라인으로 토론을 나눈다. 연구자들은 토론을 토대로 부실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이은지 KISTI 학술정보공유센터 기술원은 “부실인지 아닌지를 기관이 확인하는 것은 주관이 들어가기 때문에 때문에 각 분야 전문가인 연구자들이 더 나은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SAFE는 올해 10월 정식 서비스가 시작되면 학회나 학술지에 대한 안전지수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부실학술지 가이드라인 등을 활용해 체크리스트 문항 중 얼마나 해당하느냐를 확인하고 이를 수치화한다는 방침이다. 연구자들의 평가 또한 취합돼 안전지수를 구성하는 데 쓰인다. 이를 위한 의심 학술활동 탐지 및 판별 기술도 개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 학술단체 연합체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도 협업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각 대학 및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다른 기관에서 활용할 수 있는 형태인 ‘오픈API(공개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로도 제공할 계획이다. 다른 연구기관의 홈페이지에서도 이를 활용한 검색창 형태를 추가하면 부실학회 여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원은 “예를 들면 학회 출장을 등록할 땐 범부처 연구비 통합관리 시스템(이지바로)에서 출장비를 등록해야 하는데 여기에 SAFE 검색창을 제공하면 손쉽게 부실학회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희윤 KISTI 원장은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는 부실학술활동으로 한국 연구자들 또한 많은 피해를 봤다”며 “각 분야 연구자들이 국내외 약탈학술지와 학술행사로 인한 피해 없이 안심하고 연구성과물을 출판할 수 있는 연구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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