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공대 연구실로 간 아티스트

2020.02.15 06:00
자동차용 소프트로봇 ′스누맥수′의 설계도. 이를 개발하고 있는 송정률 로봇디자이너. 사진 서울대 인간중심소프트로봇기술연구센터 제공
자동차용 소프트로봇 '스누맥수'의 설계도. 이를 개발하고 있는 송정률 로봇디자이너. 사진 서울대 인간중심소프트로봇기술연구센터 제공

그림도 좋아하고 기계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있다. 기계공학자만 모여 있을 것 같은 로봇 연구실에도 디자이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개 디자이너들이 기술이 완성된 다음에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지만, 로봇 디자이너는 로봇을 연구하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공학자들과 협업한다.

 

지난달 30일 서울대 인간중심소프트로봇기술연구센터에서 5년째 공학자들과 함께 소프트로봇을 개발하고 있는 송정률 디자이너를 만났다. 사범대를 졸업한 송 디자이너는 그림과 관련한 일을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장애인 을 위한 패션디자인을 공부했다. 휠체어에 앉았을 때 주름이 덜 생기는 티셔츠나 멋진 의수, 의족 등을 연구한 것이다.

 

연구를 위해 송 디자이너는 조규진 서울대 기계공학과 교수 연구실에 들어갔다. 조 교수는 "그가 처음 연구실을 찾았을 때 소프트로봇은 새로운 형태를 상상해야 하므로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송 디자이너는 학술지에 논문을 낼 때 표지 그림을 그리는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11월 27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 표지에도 그가 그린 그림이 실렸다. 로봇 연구실에 디자이너가 있다는 사실이 생소하다고 하자, 그는 "미래에는 로봇 디자이너가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로봇 연구실에서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지금까지 어떤 로봇을 디자인했는지 물었다. 

 

사이언스 로보틱스 11월 27일자 표지. 김용배, 송정률 제공
사이언스 로보틱스 11월 27일자 표지. 김용배, 송정률 제공

 

Q 로봇 디자이너는 개발 초기 단계부터 공학자들과 협업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학교에서는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연구 단계부터 협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협업하는 곳은 많지 않다. 서로 원하는 게 달라 소통이 어렵다. 공학자는 새로운 기술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만, 디자이너는 예쁘고 편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기술이 완성된 후에야 디자이너가 참여하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긴다. 가령 중요한 부품이나 칩이 들어가야 하는 곳을 예쁜 외형을 만들기 위해 없애달라고 하기 어렵다. 처음부터 같이 설계하면 서로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다. 


Q 손 마비 환자가 20초 만에 끼는 '장애인용 소프트로봇 장갑' 개발에 참여했다. 손이 마비된 환자가 어떻게 혼자서 장갑을 낄 수 있나


학교 학생 중에 사고로 마비 환자가 된 사람이 있었다. 마비 환자도 공부를 할 수 있으려면 펜을 잡고 필기를 해야 하지 않나. 손에 힘을 주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로봇 장갑 개발에 참여했다. 공학자들은 줄이 잡아당기는 힘을 이용해 소프트로봇 기술을 개발했고, 나는 마비 환자도 스스로 낄 수 있는 장갑을 디자인했다. 

 

마비 환자가 혼자서도 장갑을 낄 수 있는 비결은 '바닥에 붙어 있는 실리콘'이다. 책상과의 마찰력을 이용해 장갑을 낄 수 있도록 부착한 장치다. 실험 결과, 참여자가 혼자 장갑을 끼는 데 단 20초가 걸렸다. 이처럼 장애인을 위한 웨어러블 기기는 본인이 스스로 착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매번 의존해야 하는 환경을 만들면 장애인의 자존감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갑에는 부가적인 기능도 들어갔다. 필기를 편하게 하려면 장갑의 어떤 부분은 거칠어야 하고, 어떤 부분은 단단해야 하고, 또 어떤 부분은 신축성이 좋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필기할 때 손이 펜이나 종이와 닿는 부분은 마찰력이 커야 한다. 그 부분이 어딘지 알기 위해 종이에 페인트를 칠해두고 장애 학생이 필기를 할 때 어떤 면에 페인트가 묻는지 확인하는 실험도 했다. 그 후 연구원과 함께 동대문 원단 시장에 가서 수많은 천을 사다가 마찰력 등의 점수를 매겨 장갑의 소재를 선정했다. 

장애인용 로봇장갑 ①펜과 닿는 손가락 부위. 종이와 닿는 손바닥 측면 등이 마찰이 크도록 여러 원단을 섞어 만들었다. ②세 손가락을 조이는 줄을 잡아당겨 연필을 쥘 수 있다. 줄을 이용해 모터를 쓰지 않는 소프트로봇을 움직인다.
장애인용 로봇장갑 ①펜과 닿는 손가락 부위. 종이와 닿는 손바닥 측면 등이 마찰이 크도록 여러 원단을 섞어 만들었다. ②세 손가락을 조이는 줄을 잡아당겨 연필을 쥘 수 있다. 줄을 이용해 모터를 쓰지 않는 소프트로봇을 움직인다.

 

Q 공학자와 디자이너 간 협업하면서 디자인이 계속 바뀐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디자인이 여러 번 바뀐 사례가 있나

 

2016년 열린 제1회 ‘로보소프트 그랜드 챌린지’에서 우승한 천산갑을 닮은 로봇 ‘스누맥스’를 개발할 때 그랬다. 첫 대회라 연구실의 모든 사람들이 교대하며 거의 24시간 동안 작업했다.

 

초기에는 지형과 장애물에 따라 바퀴와 몸체를 부풀리고 줄일 수 있는 로봇 자동차를 만들기로 했고 비슷한 특징을 지닌 천산갑을 닮은 디자인으로 제작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하지만 개발 과정에서 동료 연구원들이 몸체까지 크기를 조절하는 건 무리고, 부품을 효율적으로 넣기 위해 육면체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나는 몸체가 육면체면 자동차를 예쁘게 만들기 어렵다고 반대했다. 결국 천산갑의 곡선을 유지한 스누맥스가 탄생했다. 

 

 

 

개발 중인 스누맥스
개발 중인 스누맥스

물론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공학연구원들이 모두 개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유연하게 자신의 역할을 조율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우엔 색깔 같은 장식적인 조언만 주고, 어떤 경우엔 직접 설계를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물건을 잡을 수 있는 ‘전갈로봇’을 설계할 때 그랬다. 어느 날 한 연구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레고 블럭 하나를 들고 와서 어디에 쓰일 수 있을지 묻기에, 전갈을 닮은 레고 로봇을 설계하자고 제안했었다. 

 

로봇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처럼 다양한 로봇이 있는 줄도 몰랐다. 모두 재활기기에서 충분히 응용 가능하기 때문에 재미있고 유익하다. 다양한 로봇을 디자인하다 보니 다양한 기술을 폭넓게 접하게 돼, 지금은 동료 연구원에게 연구 방향에 대한 조언까지 해주기도 한다. 

 

천산갑을 닮은 로봇 ′스누맥스′. 스누맥스는 바퀴의 모양을 바꿀 수 있는 로봇으로, 좁은 길에서는 바퀴를 위아래로 길게 만들고 모래밭에서는 바퀴를 좌우로 길게 만들어 운전한다. 처음엔 몸의 크기도 변하게 할 목적으로 천산갑을 닮도록 만들었으나, 개발 과정에서 몸체 크기를 변화시키는 기능은 빠졌다. 서울대 조규진 교수팀 제공
천산갑을 닮은 로봇 '스누맥스'. 스누맥스는 바퀴의 모양을 바꿀 수 있는 로봇으로, 좁은 길에서는 바퀴를 위아래로 길게 만들고 모래밭에서는 바퀴를 좌우로 길게 만들어 운전한다. 처음엔 몸의 크기도 변하게 할 목적으로 천산갑을 닮도록 만들었으나, 개발 과정에서 몸체 크기를 변화시키는 기능은 빠졌다. 서울대 조규진 교수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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