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N수학] 그래프로 보는 가요계 사재기 논란

2020.01.11 06:00
 

아이돌 그룹 엑소가 정규 6집 앨범 ‘옵세션(Obsession)’으로 돌아왔다. 진짜 엑소와 그에게서 복제된 가짜 엑소(x-엑소)가 동시에 컴백했다는 ‘신박한’ 설정으로 시선을 끌더니, 완벽한 군무와 중독성 강한 타이틀곡, 시선 둘 곳 없는 황홀한 비주얼로 ‘군백기’가 무색할 만큼 멋지게 왕좌를 탈환했다. 


여느 인기 아이돌이 그렇듯, 엑소가 컴백하자 음원 차트에 있던 상당수의 노래는 높은 순위를 잠시 내줘야 했다. 그런데 평소라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울 이 현상에 이번에는 유독 많은 사람이 반응하고 엑소 팬이 아닌 사람도 지지를 보냈다. 

 

 

발단은 엑소 6집 음원이 공개되고 실시간 차트가 뜨자 평소 엑소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빅스의 라비가 올린 인스타 스토리다. 라비는 바둑 사진을 올리고 “내 친구가 아이돌인 줄 알았는데 이세돌이었네.”라고 글을 썼다. 이는 최근 가요계에 만연한 ‘사재기 논란’을 저격한 발언으로 추정된다. 


2019년 11월 26일 래퍼 마미손이 음원 사재기를 비판하는 신곡 ‘짬에서 나온 바이브’를 공개했는데, 그 가사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짬에서 나온 바이브가 그 정도라면 야 쪽팔린 줄 알아야지/ 기계를 어떻게 이기라는 말이냐/ 내가 이세돌도 아니고"

 

따라서 라비의 ‘내 친구가 이세돌이었네’라는 발언은 엑소의 ‘Obsession’이 최근 음원 사재기 의혹을 받는 노을의 ‘늦은 밤 너의 집 앞 골목길에서’를 제치고 높은 순위를 차지한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원 사재기는 돈을 받고 의뢰 곡을 기계로 스트리밍해 순위를 조작하는 걸 일컫는다.


노을이 음원 사재기를 했는지에 대해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깊은 심증을 품고 있던 아이돌 팬덤과 일반 대중은 빅스와 마미손의 저격을 ‘사이다’라며 크게 호응했다. 또 ‘제2의 러다이트 운동*’을 언급하며 ‘기계가 아닌 인간을 응원한다면 사재기를 저격한 가수들 곡을 스트리밍하자’는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했다.


저격받은 곡 중에서 아직 공식적으로 사재기 혐의가 드러난 노래는 없다.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중은 무슨 이유로 이토록 강력하게 특정 곡들을 사재기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은 ‘그래프’에 있다.

 

 

음원 사재기 브로커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다수의 음반 관계자들에 의해 공공연히 지적돼 왔으나, 직접 사재기 제안을 받거나 실제 사례를 목격하지 않은 일반 대중도 사재기 의혹 가수를 추론하기 시작한 것은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이 곡의 순위뿐 아니라 실시간 이용량 변화 그래프를 함께 서비스하면서부터다. 


추세를 파악하는 꺾은선 그래프

 

국내 최대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인 ‘멜론’은 1시간 단위로 이용자 수를 나타낸 꺾은선 그래프를 공개하며, 이를 바탕으로 다음 순위 예측 그래프도 함께 제공한다.

 

그래프는 한 변수와 그에 대응하는 다른 변수 사이의 관계를 좌표평면에 나타낸 점이나 직선 또는 곡선이며, 상황이나 자료를 분석해 그 변화와 상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수학적 도구다. 단순히 표로만 수치를 봤을 때는 경향을 쉽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변수의 추세를 파악해 다음에는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있어 유용하다.


그래프를 증거로 음원 사재기 논란에 불을 지핀 ‘조상 격’ 곡인 닐로의 ‘지나오다’ 그래프를 예시로 살펴보자

 

 

 

그래프에서 주황색 선은 트와이스의 ‘왓이즈러브(What is love)’, 파란색 선은 고등래퍼에서 인기를 끈 김하온과 이병재의 곡 ‘바코드’, 초록색 선은 닐로의 ‘지나오다’다. x축은 시간으로 1칸은 1시간 단위이고, y축은 스트리밍 수, 다운로드 수 등을 반영한 이용 데이터다. 그래프를 보면 대중의 음원 플랫폼 이용 현황을 알 수 있다. 하루를 시작하고 등교, 출근을 준비하는 오전 6~9시가 하루 중 가장 이용량이 많고, 많은 소비자들이 잠든 시간인 새벽 시간대에는 하향 곡선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닐로의 지나오다 그래프를 보면 이상한 점이 목격된다. 보통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새벽 시간대에 오히려 이용량이 증가하기 시작해 증가 폭이 점차 커진 것이다. 


다른 인기곡의 이용량이 줄 때 혼자 이용량이 늘자 자연스럽게 순위가 높아졌고, 한번 순위권에 진입한 뒤에는 TOP100 차트를 듣는 고객층 때문에 순위가 쉽게 유지됐다. 이런 특수한 그래프의 양상이 한 번이 아니라 새벽 시간대마다 지속적으로 나타나자 대중들은 실시간 그래프를 캡처해 공유하며 사재기 의혹을 제기했다. 


해당 가수 측은 새벽 시간대에 마케팅을 진행한 것이라며 의혹을 부인했다. 하지만 심야 시간대 홍보 콘텐츠를 업로드하는 회사가 다수 있을뿐더러, ‘지나오다’가 멜론에서 1위를 차지할 때 다른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인 ‘몽키3’, ‘카카오뮤직’의 실시간 차트에는 진입조차 하지 못한 점이 의심을 가중시켰다. 다른 역주행 곡들과의 발매 시간대별 추이 비교 그래프를 살펴봐도 역시 특이한 점을 알 수 있다. 


‘리스너’의 입소문으로 역주행에 성공한 한동근의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나 ‘직캠’으로 유례없는 역주행 신화를 쓴 EXID의 ‘위아래’와 비교해 닐로의 ‘지나오다’는 특정한 계기도 없이 이 두 곡보다 훨씬 가파른 속도로 치솟고 있다. 한번 차트 밖으로 벗어났던 곡이 수직상승 그래프를 그리는 일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렵다. 


이후 새로운 사재기 의혹이 떠오를 때마다 실시간 그래프가 증거로 제시됐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그래프와 비정상적인 그래프의 양상을 비교하며 현상을 분석하고 나름의 추론을 내놓았다. 어느새 가요계 덕질에 그래프 분석 능력이 필수가 됐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다. 

 

 

세상을 읽는 편리한 도구


물론 네티즌의 의심을 받은 가수들이 모두 사재기를 했거나 범법을 저지른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만약 멜론이 단순한 순위만 공개했다면 대중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합리적인 문제 제기가 이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처럼 그래프는 수학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먼 개념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우리 삶 속의 문제를 읽는 유용한 도구다. 


사재기 곡의 의심스러운 추이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연도 별 키 그래프를 그려 내가 어떤 추세로 커왔는지 앞으로 얼마나 클지 가늠할 수도 있고, 자전거의 가속 그래프를 그려 다음 순간에 속도가 빨라질지 느려질지 예측할 수도 있다. 


심지어 프랑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는 감기에 걸렸을 때 날짜에 따른 증상의 심화 정도를 ‘감기 그래프’로 그리기도 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사소한 일상까지 그래프로 나타내는 게 습관화돼 있었기에 푸앵카레가 뛰어난 수학자가 됐던 건 아닐까? 공정성을 밝히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 그러하듯, 지금부터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을 이용할 때 그래프도 한번 분석해보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관련기사 수학동아 2020년 1월호, [주접 평론가 피터팍의 아이돌 수학]  그래프로 보는 가요계 사재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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