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 불행과 변화의 상징?

2013.12.13 14:02

 어떤 분이 아이손 혜성은 기대가 엄청 컸던 만큼 실망도 가장 컸다고 했다. 그러나 자연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노자(老子)도 '도덕경(道德經)'에서 “天地는 不仁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아이손이 근일점을 통과하면서 파괴된 것으로 확인된 이후, 천문애호가들의 관심은 러브조이 혜성으로 옮겨갔다. 이 혜성은 지금 맨눈으로도 보이고 있고, 꼬리 길이도 5도에 른다. 물론 DSLR 카메라로 고정촬영을 하면 사진에 담을 수도 있다. 다만 최근 우리나라에는 미세먼지가 날아오고, 안개가 끼고, 비가 오는 등 하늘이 혜성 관측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춥고 바람 부는 몽골 초원으로 달려간 일군의 천문가들이 있었다. 자신의 천문대를 소유한 아마추어 천문가 황인준 선생이 이끄는 ‘혜성 원정대’가 이번 몽골 원정을 통해 찍은 사진을 독자들에게 공개했다. 그 사진들로 천체 사진집을 준비중이라고 하니 무척 기대가 된다. 아래 두 장의 사진은 지금 밤하늘에서 가장 관심을 받고 있는 러브조이 혜성을 찍은 것들이다. 지평선 가까이 별들이 반짝이는 몽골초원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밤하늘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푸르스름한 혜성을 볼 수 있다. 낮에 찍은 사진을 보면, 바닥에는 눈이 쌓여 있다. 러브조이 혜성을 확대해서 찍은 것이 두 번째 사진이다(황인준 천체사진가의 홈페이지: http://astronavi.co.kr).

 

 

황인준 천문사진가 제공

몽골의 밤하늘과 천문인들-황인준 천체사진가 제공

황인준 천문사진작가 제공

 

12월 6일의 몽골에서 촬영(FCT 76 망원경, EM11 적도의, SXV 25mc CCD카메라)한 러브조이 혜성. -황인준 천체사진가 제공

  일본 국립천문대는 하와이의 빅 아일랜드에 있는 마우나키아산의 정상에 8미터급 수바르 망원경을 운영하고 있다. 이 망원경의 직촛점에 놓여서 천체를 관측하는 수프림-캠(Supreme-cam)이라는 장비는 가로 2048화소, 세로 4096화소로 이루어진 모자이크 CCD 카메라다. 이것은 달이 한 화면에 들어오는 정토의 시야를 갖고 있다. 지난 주에는 이 카메라로 촬영한 러브조이 혜성의 사진(http://static.howstuffworks.com/gif/comet-lovejoy-big-131206.jpg)이 공개되었다.

 

 아이손 혜성이 살아남았다면 지금쯤 다시 지상에서도 관측되었을 것이다. 대혜성이었다면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을 텐데, 아쉽기는 아쉽다. 요즘 전세계의 몇몇 관측자들이 아이손 혜성의 잔해로 보이는 흐릿한 천체를 관측했다고 보고하면서도 그 밝기가 한계 등급 언저리에 있어서 확신은 못하고 있다. NASA는 앞으로 스테레오(STEREO) 천문관측 위성과 하와이 마우나키아 산 꼭대기에 있는 3미터 구경의 적외선 망원경(IRTF)을 사용하고, 또한 12월 중순과 12월 말에 허블(Hubble)우주망원경과 찬드라(Chandra)우주망원경을, 2014년 초에는 적외선 우주망원경인 스피처(Spitzer)를 동원하여 아이손 혜성의 잔해를 관측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폴란드의 귀족이자 천문학자였던 스타니슬라우스 루비에니에츠키(Stanislaus Lubienietski)가 그 때까지 유럽에서 관측된 혜성들의 자료를 모아 편찬했던 '혜성 극장'이라는 책이 있다. 라틴어 제목으로는 '테아트룸 코메티쿰(Theatrum Cometicum)'이라고 한다. 이 책에 실려 있는 4세기에 나타났던 혜성의 모습을 그린 그림(http://www.nasa.gov/images/content/69319main_comets_woodcarving-lg.jpg)을 보면, 혜성이 나타나자 짙은 구름에서 나온 번개가 성에 내리쳐서 성벽이 허물어지고 불이 나서 사람들이 탈출하고 있다.

 

 동양에서도 혜성은 전쟁, 기근, 반역 등의 불행의 상징이었다. 동아시아에서 혜성은 '잘못된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으로 바꾼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혜성을 이용하여 반란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일들이 있었다. 청해진의 장보고가 그랬고, 평안도의 홍경래가 그러했다. 그 반대로 혜성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도 있었으니, 남이 장군이 그러했다. 조선에서는 혜성이 나타나,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해안과 국경의 수비를 단속하였다. 또한 천문학자들을 숙직시켜가며 혜성의 움직임과 변화를 날마다 관찰하였다. 기록 정신이 남달랐던 우리 조상들은 그 관찰의 결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1차적인 관측일지는 ‘성변측후단자’라고 했고, 매년 두 번씩 이것을 베껴 두기 위해 ‘성변등록’을 작성하였다. 관측 결과는 날마다 사관의 손으로 들어가서 ‘승정원일기’로 남았고, 왕이 승하한 뒤에 ‘실록’을 작성할 때 기초 사료로 활용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세계적으로도 자랑할 만한 굉장히 중요한 천문관측 자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세한 관측 자료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혜성의 정체나 궤도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고민한 흔적은 찾기란 쉽지 않다. 18세기에도 조선의 학자들은 그저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이야기나 되풀이하고 있을 따름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 시대에 혜성의 정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학자는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이 거의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가장 존경했다는 그의 형이다.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은 때마침 나타난 혜성을 관찰하고 당시 서양에서 들어온 톨레미의 지구중심 태양계 구조론인 구중천설(九重天說)이 설명하지 못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그가 동생 정약용과 주고받은 편지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 업적은 조선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다산 정약용의 저서들을 모아 놓은 '여유당전서'만 하더라도, 몇몇 제한된 학자들만이 필사본으로 돌려보다가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서 1938년 사이에 그의 외현손인 김성진이 편집하고 정인보와 안재홍이 교열하여 책으로 출간되었을 따름이다. 다산 선생이 저술한지 1백년이 넘어서야 세상에 빛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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