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역 '면역 기억상실' 일으킨다

2019.11.01 18:19
홍역 바이러스를 그래픽으로 묘사했다. 홍역은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백신으로 쉽게 예방이 가능하지만, 백신을 맞지 않아 병에 걸릴 경우 최대 수 년까지 기존 면역체계를 붕괴시키는 장기 ′면역 기억상실′ 효과를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버드대 영상 캡쳐
홍역 바이러스를 그래픽으로 묘사했다. 홍역은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백신으로 쉽게 예방이 가능하지만, 백신을 맞지 않아 병에 걸릴 경우 최대 수 년까지 기존 면역체계를 붕괴시키는 장기 '면역 기억상실' 효과를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버드대 영상 캡쳐

유럽과 미국 연구팀이 각각 홍역 바이러스에 감염된 어린이 수십 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백신을 맞지 않은 경우 인체가 그 동안 구축한 면역체계가 크게 손상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백신을 반드시 맞아야 할 이유가 추가됐다. ‘면역 기억상실’이라고 불리는 이 증세를 겪은 어린이는 최대 몇 년 동안 사소한 병원체도 막지 못해 쉽게 병에 걸리게 된다. 반대로 백신을 맞으면 면역 기억상실을 막아 전반적인 면역 능력이 높아진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마이클 미나 미국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교수팀과, 영국 웰컴생어연구소·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공동연구팀은 홍역 바이러스에 감염된 경우 기존에 체내에 형성된 병원체 인식 단백질(항체)이 최대 73%까지 사라지며, 새로운 면역력을 습득하는 능력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실제 어린이 환자를 대상으로 확인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와 ‘사이언스 면역학’ 31일자(현지시간)에 각각 발표했다. 


항체는 면역 체계가 병원체의 핵심 특징을 기록해 둔 일종의 기록물이다. 한번 걸린 질병의 병원체가 다시 체내에 들어올 경우 이 기록을 바탕으로 면역세포가 빠르게 움직여 병에 다시 걸리기 전에 병원체를 물리친다. 인체는 살면서 겪는 다양한 병원체에 대한 항체를 계속 확보해 나가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번 형성한 항체를 잃지 않는다. 백신은 이 현상을 응용해 병원체나 병원체 일부분에 인체를 가볍게 노출시켜 실제로는 병을 겪지 않고도 항체를 갖도록 만드는 원리다.


미나 교수팀팀은 2013년 네덜란드에서 홍역이 유행한 마을에서 홍역에 걸린 어린이 환자 77명의 감염 전과 감염 두 달 뒤 혈액을 채취했다. 그 뒤 2015년 자체 개발한 면역체계 검출 기술 ‘바이러스캔(VirScan)’으로 환자 혈액 속에 그 동안 형성된 바이러스 또는 박테리아 대상 항체를 검출했다. 여기에 과거에 홍역에 감염된 적이 없는 115명의 어린이와 성인의 혈액 시료를 채취해 어린이 백신거부 환자의 홍역 감염 전후 항체와 비교했다.


연구 결과 홍역에 감염된 어린이는 감염 직후, 다른 질병에 대한 항체 수가 급감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1~73%의 항체가 짧은 시간 안에 사라졌다. 연구팀은 감염 뒤 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의 면역 기억상실을 확인하기 위해 4마리의 레서스 마카크 원숭이를 이용해 홍역 감염 전과 감염 5개월 뒤의 항체를 측정했는데, 5개월 뒤에도 역시 40~60%의 기존 항체가 파괴돼 있었다. 

 

하버드대 의대팀이 개발한 항체 검출 기술 ′바이러스캔(VirScan)′ 기술을 설명한 영상을 캡쳐했다. 100개 이상의 다양한 항체를 동시에 해독해 어떤 병에 대한 항체인지 분석해 낸다. 하버드대 영상 캡쳐
하버드대 의대팀이 개발한 항체 검출 기술 '바이러스캔(VirScan)' 기술을 설명한 영상을 캡쳐했다. 100개 이상의 다양한 항체를 동시에 해독해 어떤 병에 대한 항체인지 분석해 낸다. 하버드대 영상 캡쳐

미나 교수는 “범죄자를 찾기 위해 범인의 사진을 찍은 책을 갖고 있는데, (홍역 바이러스가) 사진에서 범인을 식별할 중요 부위인 눈이나 입 등을 다 찢어 놓은 것과 같다”며 “면역 기억상실은 그 동안 가설로만 제기돼 있었는데, 이번 연구로 사실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벨리스라바 페트로바 웰컴생어연구소 교수팀 역시 2013년 네덜란드의 어린이 26명의 혈액을 채취해 감염 40~50일 뒤의 항체 유전자를 해독했다. 그 결과 혈액 내에서 기존의 감염 질병에 대항하기 위해 형성됐던 항체가 상당수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팀은 실험동물인 족제비를 이용해 같은 실험을 진행한 결과 역시 항체가 파괴되는 현상을 확인했다. 또 감염 이후 면역체계의 활동성이 떨어져 새로운 병원체에 대항해 항체를 만드는 능력이 저하된다는 사실도 밝혔다. 일부 아기는 이런 면역 저하 증세가 5년 넘게 이어졌다. 


두 연구팀은 이번 연구로 면역 기억상실이 사실로 증명된 만큼, 최대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면역 기억상실에 따른 간접적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백신을 반드시 맞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나 교수는 “홍역에 걸리고 2년 뒤 폐렴에 걸리면 둘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실은 의사의 눈에 띄지 않는 홍역의 장기적 영향 때문일 수 있다”며 “홍역의 증상 자체는 이 병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미 홍역에 걸렸다면 기존 백신을 다시 맞을 것을 권했다. 홍역 바이러스가 파괴한 면역 체계를 다시 회복하려면 수개월~수년의 시간이 다시 걸리기 때문이다. 사이언스 논문의 교신저자인 스테판 엘레지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홍역에 걸렸을 때 우리 몸이 받는 폐해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며 “아이에게 MMR(홍역-유행성이하선염-풍진) 백신을 맞히는 게 가장 중요하다. 만약 백신을 맞지 않아 이미 홍역에 걸렸다면, 간염이나 소아마비 등 이전에 감염되거나 백신을 맞았던 다른 질병의 백신을 다시 맞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역백신 개발 및 보급은 현대 보건학의 위대한 승리로 불과 수십 년 만에 매년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수만 명 수준으로 낮췄다. 오늘날 홍역백신 접종률(위)과 홍역으로 인한 사망률(아래. 빨간색이 짙을수록 높다) 지도로 반비례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홍역백신 개발 및 보급은 현대 보건학의 위대한 승리로 불과 수십 년 만에 매년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수만 명 수준으로 낮췄다. 오늘날 홍역백신 접종률(위)과 홍역으로 인한 사망률(아래. 빨간색이 짙을수록 높다) 지도로 반비례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홍역은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매년 전세계에서 26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던 대표적 감염병이다. 백신이 개발되고 많은 국가에서 접종을 의무화하면서 이 비율은 크게 떨어졌지만, 여전히 백신을 맞지 못하는 국가와 백신거부자를 중심으로 매년 700만 명이 감염되고, 이 가운데 10만 명 이상이 사망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영국 등 일부 선진국은 백신거부운동의 여파로 접종률이 95% 아래로 떨어지면서 다시 홍역이 유행하고 있고, WHO는 이들 국가를 홍역 퇴치국가 명단에서 제외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한국은 올해 10월 28일까지 190명의 홍역 환자가 발생했다. 이 가운데 1~5월까지 162명의 홍역 환자가 집중 발생해 비상이 걸렸으나, 6월 이후 월 한 자리수의 환자만 발생해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10월 9명의 환자가 발생해 겨울철 홍역이 재유행할지 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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