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N사피엔스] 브라헤와 케플러

2019.10.17 14:00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 해협에 있는 벤(Ven) 섬. 위키피디아 제공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 해협에 있는 벤(Ven) 섬. 위키피디아 제공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지 얼마지 않은 1546년 덴마크에서 위대한 천문학자가 태어났다. 그 이름은 티코 브라헤다. 브라헤는 광학기기의 도움 없이 맨눈으로 밤하늘을 관측한 최후 세대의 과학자였다. 브라헤는 맨눈으로 하늘을 관측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타고 났다. 시력이 너무 좋았다. 일설에 따르면 1킬로미터 밖에서 동전이 500원짜리인지 100원짜리인지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나. 믿거나 말거나이긴 하지만 아무튼 시력이 무척이나 좋았던 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시력도 좋았지만 브라헤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밤하늘을 관측했다. 또한 손재주도 좋아서 관측을 도와 줄 기구(각도를 잰다든지 하는)도 곧잘 만들었다. 운 좋게도 브라헤에게는 아주 든든한 후원자도 있었다. 바로 덴마크의 왕이었던 프레데릭 2세였다. 프레데릭 2세는 통 크게도 벤 섬을 통째로 브라헤에 하사했다. 벤 섬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외레순 해협에 있다. 전체 크기가 약 7.5제곱킬로미터로 아주 작다. 17세기 이후에는 스웨덴 령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브라헤는 ‘하늘의 성’이라는 뜻을 가진 천문대 우라니보르크를 세웠다. 한때 덴마크 총생산의 5%를 사용할 정도로 프레데릭 2세의 지원은 전폭적이었다.


여기서 브라헤는 당대 최고 수준의 천문관측 데이터를 확보했다. 


불행히도 덴마크 왕국의 지원은 영원하지 않았다. 브라헤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프레데릭 2세가 죽고 후임으로 크리스타인 4세가 즉위하자 신임 왕은 브라헤에 대한 지원을 대폭 줄였다. 브라헤는 어쩔 수 없이 벤 섬을 떠나 당시 신성로마제국 치하의 프라하로 옮겼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는 브라헤를 궁정수학자로 임명했다. 이듬해인 1600년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를 채용해 그때까지 자신이 모은 데이터를 수학적으로 정리하는 일을 맡겼다. 천문관측에는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했던 브라헤였지만 관측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해서 의미를 해석하는 일은 브라헤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덴마크 벤 섬에 지어진 우라니보르그 천문대. 덴마크 왕 프레데릭 2세는 벤 섬을 통째로 브레헤에게 하사하였고 브레헤는 방대하고 정밀한 관측기록을 남긴다. 위키피디아 제공
덴마크 벤 섬에 지어진 우라니보르그 천문대. 덴마크 왕 프레데릭 2세는 벤 섬을 통째로 브레헤에게 하사하였고 브레헤는 방대하고 정밀한 관측기록을 남긴다. 위키피디아 제공

브라헤와 케플러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브라헤의 입장에서는 평생 모은 데이터를 선뜻 잘 모르는 신참에게 모두 넘겨줄 수는 없었다. 수학적인 능력도 확인하고 싶었겠지만 인간적인 신뢰가 쌓이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케플러의 입장에서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관측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을 맡긴다더니 중요한 자료를 선뜻 다 넘겨주지도 않아 실망감이 적지 않았다. 이 둘의 애매한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가 만난 바로 이듬해인 1601년 브라헤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 허무한 스토리를 더욱 허무하게 만드는 것은 브라헤의 사망 원인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이렇다. 어느 날 브라헤는 로젠베르크 남작의 만찬에 초대받았다. 만찬장에서 남작에게 최고의 예우를 차리려고 했던 브라헤는 소변까지 참으면서 끝까지 만찬장을 지켰다. 그때 소변을 너무 오래 참아서 병이 나 며칠 뒤에 사망했다고 한다. 소변을 오래 참는다고 무슨 죽을병에 걸리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발생한 KAL기 폭파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북한공작원 김현희가 붙잡혔을 때 언론에서는 한동안 김현희가 자살하려고 소변을 참았다는 보도가 나왔었다. KAL기 폭파사건과 김현희는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그와 관련된 ‘소변자살설’도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나중에 나온 보도를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나는 브라헤가 억지로 소변을 참아 병을 얻어 죽었다는 얘기를 할 때마다 김현희가 떠오른다.


또 다른 사망원인으로는 수은중독설이 있다. 일화에 따르면 브라헤는 20세 때에 사촌과 결투를 하다 코를 베이는 중상을 입었다. 이후로 브라헤는 금속으로 만든 가짜 코를 붙이고 다녔다고 한다. 이때 금속 코에 수은이 많이 함유돼 결국 수은중독으로 죽었다는 얘기이다. 수은중독설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은 브라헤의 무덤을 발굴해 그 유해를 분석하기도 했다.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브라헤의 천체관은 일종의 하이브리드 천체관이었다. 지구 주위를 태양과 달이 돌고, 다른 다섯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도는 구조이다. 여기서도 지구는 우주에 고정돼 움직이지 않으니까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구중심설의 변종인 셈이다. 다른 행성들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발상은 분명 진전된 아이디어이지만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나온 이후에도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조차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요하네스 케플러와 튀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와 튀코 브라헤

브라헤의 갑작스런 죽음이 케플러에게는 행운이었을 것이다. 케플러는 1571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1596년 25세의 케플러는 《우주의 신비》 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케플러는 흥미롭게도 플라톤 입체를 이용해 행성의 공전궤도를 설명하려고 했다.


 플라톤 입체란 다섯 개의 정다면체(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로 일찍이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와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적이 있었다. 충실한 플라톤주의자였던 케플러는 플라톤의 기획을 그대로 이어받은 셈이다. 케플러는 지구를 제외한 행성이 다섯 개이고 플라톤 입체가 다섯 개라는 점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행성의 공전궤도가 플라톤 입체와 연결된다는 생각 자체가 참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너그러운 마음으로 넓게 보면 케플러의 기획은 근대과학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즉, 플라톤이 그랬듯이 케플러 또한 자연현상에 수학적 구조물을 대응시켰다. 이 기획은 케플러와 동시대에 살았던 갈릴레오도 공유했고 이후 뉴턴에게 이어졌다. 20세기와 21세기의 과학자들도 여전히 플라톤의 기획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다만 20세기의 과학자들은 플라톤 입체라는 구조물 대신 주로 대칭성이라는 보다 추상적인 수학 구조물을 더 좋아한다. 

 

어쨌든 20대의 젊은 나이에 이런 책까지 썼으니 유럽 동네에서 수학 좀 한다는 소문이 났을 법도 하다. 브라헤가 갑자기 죽기는 했지만 브라헤의 모든 자료가 곧바로 케플러에게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튀코 브라헤의 우주모델. 원운동 중심에 지구가 있고 달이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 그 바깥에 태양이 행성을 거느리고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회전하고 있다.
튀코 브라헤의 우주모델. 원운동 중심에 지구가 있고 달이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 그 바깥에 태양이 행성을 거느리고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회전하고 있다.

브라헤의 유족 및 제자들과 자료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치르기도 했었다. 브라헤의 자료를 온전히 넘겨받은 뒤 케플러는 그 데이터가 무엇을 뜻하는지 밝혀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케플러가 주력한 행성은 화성이었다. 브라헤의 데이터로부터 화성의 정확한 공전궤도를 알아내기 위한 케플러의 노력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여기에는 ‘화성의 전투’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케플러는 철저한 플라톤주의자였기 때문에 행성의 궤도가 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천상계의 행성은 스스로 완벽한 원운동을 한다. 케플러는 브라헤가 남긴 데이터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계산해 원 궤도에 맞춰보았다. 그 결과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원 궤도에 맞춰 본 케플러의 결과는 약 8분 각도 정도의 오차를 보였다. 1분 각도는 1도 각도의 1/60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 정도 오차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대게 이런 경우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데이터가 나오면 먼저 데이터를 수집한 사람을 의심하거나 탓하기 마련이다. 브라헤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도 않았으니까 정밀한 관측을 하지 못한 스승을 욕하며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현대의 과학자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알고 있던 상식 또는 확립된 결과와 맞지 않는 데이터가 나오면 뭔가 실험과정에서 잘못된 것이 없는지부터 살피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케플러가 브라헤의 데이터를 끝까지 믿은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인간적으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브라헤가 천문관측 하나는 확실하게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믿었는가 하면 원 궤도에 대한 자신의 오랜 신념을 포기할 정도였다. 브라헤가 남긴 데이터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양질이어서 그 오차가 대략 4분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케플러가 원 궤도에 데이터를 맞추었을 때의 오차의 절반에 해당하는 값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케플러가 원 궤도의 8분 오차를 못 견뎌한 것도 이해가 갈 만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이 ‘타원궤도’였다. 타원궤도라고는 하지만 화성궤도의 장축에 대한 단축의 비율은 99.6%여서 눈으로 그냥 보기에는 원 궤도에 가깝다. 

 

브라헤가 남긴 당시의 관측 데이터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할수 있다. 브라헤가 발견한 SN1572 초신성(왼쪽) 자료와 별을 관측할 때 사용한 육분의(왼쪽). 위키피디아 제공
브라헤가 남긴 당시의 관측 데이터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할수 있다. 브라헤가 발견한 SN1572 초신성(왼쪽) 자료와 별을 관측할 때 사용한 육분의(왼쪽). 위키피디아 제공

이 결과를 얻기 위해 케플러는 수년에 걸쳐 처절하게 계산했다. 지금과 같은 계산기는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라 케플러는 모든 계산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진행했다. 문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최소 2절지 수백 장(천 장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에 걸쳐 70여 차례 반복해서 계산을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화성의 전투’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 ‘화성의 전투’를 소개하면 십중팔구 많은 학생들이 케플러의 그 엄청난 계산량에 혀를 내두른다. 그 놀라움의 이면에는 지금은 컴퓨터에 심지어 인공지능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으니 저건 고생은 다 옛날이야기일 뿐일 거라는 기대가 숨어 있다. 물론 이런 기대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인간의 수고로움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연으로부터 뭔가 의미 있는 새로운 정보를 캐내는 작업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힘들고 고달픈 여정이다. 방대한 기계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방대한 기계를 정밀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하고 그로부터 얻은 천문학적인 양의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분석해서 과학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면 예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종류의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 때문에 케플러 시절에는 한두 명의 뛰어난 과학자가 엄청난 발견을 할 수도 있었지만 20세기 이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실험그룹을 이루는 일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이른바 빅 사이언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에서 뭔가 정보를 얻는 작업은 참으로 어렵고 고달프다. 그 고난과 역경의 역사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케플러는 근대과학이 태동되는 시기에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시작된 천문학 혁명을 완수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니까 근대과학의 형성기에 그 고난의 역사를 몸소 증명하신 어르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탓에 케플러는 1609년에야 《신천문학》이라는 논문으로 자신의 결과를 발표할 수 있었다. 브라헤가 죽은 지 8년이 지난 때였다. 케플러의 결과는 그 유명한 ‘케플러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에는 제1법칙과 제2법칙을 발표했고 훗날 제3법칙을 다시 발표했다. (케플러 법칙의 내용은 추후에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케플러의 법칙은 귀납주의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거의 완벽한 사례이다. 귀납주의란 편견 없는 관찰과 실험으로부터 자연의 보편적인 원리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과학이라고 하면 흔히 보통 사람들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 통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례가 바로 케플러의 법칙이다. 브라헤 같은 아주 유능한 관측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대단히 정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케플러 같은 뛰어난 분석가가 아무런 편견도 없이 (자신의 오랜 신념조차 버릴 정도로) 가치중립적으로 데이터를 분석해 일반적인 법칙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에서 귀납주의가 성공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과학은 단순히 귀납주의로만 발전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귀납주의가 무력해지는 숱한 사례를 보게 될 것이다. 


조금 생뚱맞게도 케플러는 최초의 SF 소설이라 할 수 있는 《꿈》이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행성법칙을 발견한 케플러답게 이 책의 내용은 행성 간 우주여행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의 어머니는 마녀로 묘사되는데, 이 때문에 훗날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 케플러가 마녀로 몰리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실제 그녀는 마녀재판에까지 회부되었으나 운 좋게도 풀려났다. 《카타리나 케플러》 라는 소설은 이 일화를 다룬 작품이다.

 

참고자료

-사이먼 싱, 《우주의 기원 빅뱅》, 곽영직 옮김, 영림카디널
-“김현희 자살기도한 적 없다”, 중앙일보, 1988.2.10., https://news.joins.com/article/2218074
-존 그리빈, 《과학-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강윤재, 김옥진 옮김, 들녘.
-칼 세이건, 《코스모스》,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J. Kepler, 《Somnium》, Createspace Independent Pub.
-카차 두벡, 《카타리나 케플러》, 강명희 옮김, 자음과모음.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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