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고고학산책]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경주 고분의 수난사

2019.10.19 06:00
서봉총 발굴에 참여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봉총 발굴에 참여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경주를 가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낮은 건물들 사이로 봉긋하게 솟은 오래된 무덤인 ‘고분’을 본 적 있을 겁니다. 그런데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는 특이하게 생긴 고분이 있습니다. 다른 무덤들과는 달리, 낮고 평평한 모습이 마치 누군가 무덤 위를 뭉텅 잘라낸 것처럼 생겼습니다. 봉황이 새겨진 금관이 발견된 이 ‘서봉총 고분’에는 사실 안타까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스웨덴 황태자, 경주 고분을 발굴하다


1926년 경주시 노성동에서는 웬 서양 사람이 바닥에 엎드려 흙을 파헤치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입니다. 그옆에는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발굴이 끝나자, 황태자가 현장에서 발견된 신라 시대의 금관을 상자에 담았습니다. 천년도 넘게 잠들어있던 금관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자, 황태자 일행과 일본인들이 손뼉을 쳤습니다.


스웨덴 황태자가 일본인들과 함께 경주의 고분을 발굴한 이유는, 이때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기차를 보관하는 창고를 짓는 데 필요한 흙을 고분에서 파냈습니다. 이때 고분을 조사한 건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일본인 학자 고이즈미 아키오입니다. 그가 고분을 발굴할 무렵,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가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황태자가 고고학에 조예가 깊다는것을 알고 있던 일본 수행원 측은 황태자에게 조선에 들러 경주 고분을 발굴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황태자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발견된 유물을 파내지 않고 흰 천을 덮어두었습니다. 이윽고 경주에 도착한 황태자는 금제 허리띠를 발굴하고, 이곳에서 발견된 금관을 직접 수습했습니다. 나중에 이 무덤에는 황태자의 방문을 기념하여, 스웨덴의 한자식 표현인 ‘서전(瑞典)’의 ‘서’와 금관 봉황 장식의 ‘봉’을 따와 ‘서봉총’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봉분이 없는 서봉총의 모습. 서봉총에 붙어 있는 작은 봉분은 ′데이비드총′으로 영국 귀족 퍼시벌 데이비드 경이 발굴비용을후원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문화재청
봉분이 없는 서봉총의 모습. 서봉총에 붙어 있는 작은 봉분은 '데이비드총'으로 영국 귀족 퍼시벌 데이비드 경이 발굴비용을후원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문화재청

납작한 서봉총이 봉분을 잃어버린 슬픈 사연


약 1000년 동안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시내에는 약 200기에 달하는 고분이 있습니다. 특히 신라의 왕이나 왕족이 묻힌 커다란 무덤은 4~6세기 초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경주의 고분들은 고려나 조선 시대의 왕‘릉’과 달리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주인을 모르는 고분을 ‘총’이라 부릅니다. 


언뜻 보면 산처럼 보이는 왕들의 무덤은 시대에 따라 만드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중 경주 시내에 만들어진 거대한 고분들은 ‘적석목곽분’입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도 불리는 이 무덤은 지상이나 지하에 판 구덩이에다 나무 덧널을 두었습니다. 덧널 내부에 관과 부장품을 넣고 밖에는 돌을 쌓았습니다. 그 위에 다시 흙을 쌓아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크고 튼튼하게 쌓았으니 허물어지거나 쉽게 도굴당하지 않고 천 년 이상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무덤인 것이 잘 알려졌지만, 몇백 년 전만 해도 경주 사람들은 시내 여기저기 흩어진 것이 고분이 아니라 작은 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신라 시대의 무덤이었다는 사실이 잊힌 것입니다.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경주의 고분을 처음 본격적으로 발굴한 것이 바로 일제강점기의 일본 학자들이었습니다. 일본 학자들은 경주의 언덕이 오래된 무덤이라는 것을 알고 발굴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조사가 날림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한국인이 일본인의 후손이라는 근거 없는 조작을 정당화하기 위해 출토한 유물의 의미를 왜곡하기도 했습니다.


서봉총의 발굴도 이런 아픈 역사의 장면 중 하나입니다. 고이즈미 아키오는 서봉총을 겨우 50일 만에 발굴한 데다, 보고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가치 있는 기록이 남아있을 턱이 없습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창고를 지으려 봉분의 흙을 퍼가는 바람에, 지금 남아있는 서봉총은 경주 시내의 다른 고분들과 달리 납작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신라의 왕과 찬란한 금관이 묻힌 무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봉분마저 잃어버린 처지가 된 겁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경주 아닐까요? 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은 2016년부터 서봉총을 재발굴하여 조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경주에 방문해서 신라 고분 앞에 서게 된다면 서봉총의 이야기를 기억해주길 바라겠습니다. 

 

서봉총 금관의 복원된 현재 모습(왼쪽)과 출토 당시의 모습(오른쪽). 서봉총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 중 유일하게 정수리 부분에 봉황을 장식한 것으로, 최고 권력자를 상징한다고 추측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봉총 금관의 복원된 현재 모습(왼쪽)과 출토 당시의 모습(오른쪽). 서봉총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 중 유일하게 정수리 부분에 봉황을 장식한 것으로, 최고 권력자를 상징한다고 추측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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