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환자 36만명인데, 수술받으러 일본행 비행기표 사는 환자들

2019.10.03 06:00
뇌전증 환자 대부분(70%)은 약물 치료만으로도 일상생활에 전혀 무리가 없다. 하지만 나머지 30% 환자는 수술 치료가 필요하다. 문제는 뇌전증 수술을 하는 데 필요한 장비 3가지가 국내에는 한 대도 없다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뇌전증 환자 대부분(70%)은 약물 치료만으로도 일상생활에 전혀 무리가 없다. 하지만 나머지 30% 환자는 수술 치료가 필요하다. 문제는 뇌전증 수술을 하는 데 필요한 장비 3가지가 국내에는 한 대도 없다는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최근 부산에서 학교폭력으로 인해 피해자가 뇌 손상을 입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6월 고등학생 A군은 동갑내기인 손 군을 불러내 친구들과 함께 수 초간 목을 졸랐다. 이때 넘어지면서 아스팔트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정신을 잃은 손 군은 결국 뇌출혈과 뇌전증 진단을 받았다.

 

뇌전증은 뇌에서 과도하게 전기적인 자극이 발생해 뇌세포의 활동이 부자연스러워지면서 감각이나 행동 등에 반복적으로 이상이 생기는 발작성 뇌질환이다. 전 연령대에 걸쳐 전 세계에서 1000명 중 1명 꼴로 비교적 흔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국내 뇌전증 환자는 36만 명이 넘는다. 매년 1만5000명씩 증가하고 있다. 

 

뇌에서 손상된 부위에 따라 발작 증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증상이 비교적 심각하지 않은 부분발작은 환자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신체 일부에 이상감각이 나타나거나 근육이 수축된다. 증상이 비교적 심각한 전신발작은 환자가 의식을 잃고 피부가 파래지면서 호흡곤란을 일으키거나 팔다리와 온몸의 근육이 수축되면서 부들부들 떠는 큰 발작이 일어난다.


이름도 바꿨지만 사회적 편견 여전해

 

국내 한 드라마에서 등장한 뇌전증 환자의 모습. 매스컴에서는 주로 중증 환자가 대발작을 일으켰을 때 모습만을 비추는 경향이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캡처

환자에게 뇌전증이 발생한 원인, 손상된 뇌 부위에 따라 증상이나 발작하는 빈도, 발작 세기 등이 각기 다른 만큼 환자마다 적절한 치료도 다르다. 대개 뇌전증 환자의 70%는 항경련제로 치료가 가능하다. 건강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 전혀 무리가 없다. 나머지 이보다 증상이 심각한 중증 뇌전증 환자들은 수술을 해야 한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수술을 받지 못하면 뇌전증 범위가 커지거나 다른 부분에 발생하기도 한다. 그만큼 조기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사회적인 편견으로 인해 뇌전증의 치료 시기를 놓치거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약물로 호전됐음에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 '발작을 일으키는 병'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데다 뇌전증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뇌전증학회는 2012년 원래 '간질'이었던 병명을 '뇌전증'으로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병명만 바뀌었을 뿐 뇌전증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홍승봉 대한뇌전증학회 명예회장(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은 "뇌전증은 외상이나 뇌염, 뇌졸중, 뇌종양 등으로 인해 생기거나, 태아 때 뇌 일부가 미숙하게 발달하는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한다"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유전질환이거나 정신질환, 심지어는 감염질환으로 오인하기도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또한 "아직까지도 입사지원서나 면접 시 뇌전증 환자임을 밝히면 합격 여부에 미치는 등 사회적 편견이 많다"고 덧붙였다. 

 

뇌전증 진단, 수술에 필요한 장비 3가지가 국내엔 0대

 

가장 큰 문제는 국내에 뇌전증을 정확히 진단할 장비도, 수술할 장비도 없다는 사실이다. 뇌전증 수술은 뇌수술 중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것에 속한다. 국내에서는 삼성서울병원과 서울아산병원, 서울대병원,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 고려대 구로병원, 부산해운대백병원 등 6곳에서 뇌전증 수술을 하고 있는데, 모두 장비가 없어 의사가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한다. 그만큼 수술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성공률도 낮아진다. 중증 뇌전증 환자 중 일부는 자비를 들어 미국이나 일본에 가 수술을 받기도 한다. 

 

먼저 뇌전증이 발생한 정확한 부위를 찾는 '뇌자도'가 한 대도 없다. 뇌자도는 뇌에서 전기신호가 발생할 때 유도되는 자기신호를 측정한 것으로 일반 뇌파 검사에 비해 정확도와 해상도가 높다. 현재 국내에서는 뇌파 검사를 통해 뇌전증을 진단하는데, 이것만으로는 뇌전증 발생 유무만 알 뿐 어느 부위를 수술해야 하는지 찾을 수 없다. 또한 수술시에도 뇌전증이 일어나는 부위를 정확하게 찾으려면 이 장비가 필요하다. 일본에는 뇌자도가 48대나 있다.

 

두 번째로 전 세계에 200대 이상 있는 뇌전증 수술로봇 '로자(ROSA)'가 국내에는 한 대도 없다. 이 로봇은 뇌전증 수술시 그 부위에 수십개의 전극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을 사람 손으로 하기에는 수천 수만개나 되는 뇌혈관을 피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홍 명예회장은 "뇌혈관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 손으로 꼽으면 서너 개만 꼽아도 출혈이 생겨 어렵다"며 "그만큼 수술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뇌전증 수술에 있어서 한국은 뇌전증 후진국"이라고 한탄했다. 

 

세 번째로 국내에는 내시경 수술처럼 머리에 1cm 안팎 작은 구멍을 뚫고 병이 있는 부분만 없앨 수 있는 '레이저열치료 수술장비'가 없다. 뇌수술 시 절개하는 부위가 작아지면 그만큼 상처도 작고 후유증도 적어진다. 홍 명예회장은 "현재 미국에서 행하는 뇌전증 수술의 30%에서 이 장비를 사용한다"며 "뇌 안쪽 부위를 자르려면 겉에 있는 뇌조직을 잘라내야 하기 때문에 손으로 하면 그만큼 잘라내는 부위가 많아진다"고 설명했다. 

 

장비 없이 의사가 환자 한 명을 수술하는 데 6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이들 장비가 있으면 2시간이면 훨씬 성공적으로 끝난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자체적으로 이 세 가지 장비를 구비하기 어렵다. 파킨슨병 등 다른 뇌질환 수술은 뇌전증 수술과 달리 이런 장비를 쓸 필요가 굳이 없기 때문에 뇌전증만을 위해 장비들을 구비하기엔 수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수술이 시급한 국내 뇌전증 환자는 2만 2000명인데, 실제 수술을 받는 사람은 매년 200여 건 정도다. 홍승봉 명예회장은 "뇌전증 환자들이 수술치료를 받으려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이 필요하다"며 "이들 장비를 국내에 구축한다면 수천 명의 중증 뇌전증 환자들을 살릴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는 "세 가지 장비를 한 대씩 구비할 수 있는 금액을 정부에 뇌전증지원체계구축 예산으로 신청했는데, 아직 절반 정도만 승인 받았다"며 "11월 쯤 최종 결정이 나는데 부디 심사숙고와 현명한 판단으로 전 연령대에서 수만~수십만 명이 고통받고 있는 이 병을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건강한 사람의 뇌파와 뇌전증 환자가 부분발작, 또는 전신발작을 일으켰을 때 뇌파가 서로 다르다. 이것을 좀 더 정밀하게 검사하려면 뇌자도가 필요하다. 게티이미지뱅크
건강한 사람의 뇌파와 뇌전증 환자가 부분발작, 또는 전신발작을 일으켰을 때 뇌파가 서로 다르다. 이것을 좀 더 정밀하게 검사하려면 뇌자도가 필요하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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