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와 질병]바이킹과 유산

2019.09.08 10:00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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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아이슬란드, 영국 일부 도시들은 세계에서 신경계 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이 가장 많이 진단되는 나라들이다. 다발성 경화증이란 뇌와 척수가 산발적으로 파괴되는 병이다. 그렇다면 혹시 추운 기후가 원인이 아닐까? 그런데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도 높은 유병률을 보인다. 따뜻한 기후에 사는 사람에게도 생기는 것이다. 북유럽 기원의 이민자들이 많은 곳이다. 게다가 알래스카에 사는 에스키모 혹은 이누이트는 별로 높은 유병률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1995년 미국 하버드 의대의 C.M. 포저 교수 등은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다발성 경화증이 빈발하는 지역은 바이킹이 활동하던 지역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바이킹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를 침략했고, 노르망디와 시칠리아, 남부 이탈리아까지 진출했다. 게다가 교역 범위는 코카서스와 흑해, 카스피해를 넘어 페르시아, 인도, 심지어 중국에 이른다. 

 

다발성 경화증은 소위 ‘바이킹 유전자’에 의해 발병하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북유럽인에게 가장 흔하지만, 바이킹의 광대한 항해 영역으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도 비교적 높은 비율로 발병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아마 고대 바이킹 인들은 항상 괴상한 신경 증상에 시달렸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시력 상실이나 사지 마비는 그들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발성 경화증이 바이킹 유전자에 의한 것이라면, 환경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갑자기 증가하거나 감소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사르데냐 인은 수십 년 전부터 갑자기 다발성 경화증을 많이 앓게 된 것일까? 

 

공포의 바이킹

 

샤를마뉴 대제(카를 대제)가 서유럽을 통일한 지 불과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은 또 다른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바이킹이 유럽 각지를 덮치며 닥치는 대로 약탈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 유럽 전역에는 이미 수백 년 전 북쪽에서 내려온 게르만족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게르만족이 출발한 바로 그곳, 스칸디나비아반도 북부에서 바이킹이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랜 고향 친구와 재회한 셈이지만 그리 정겨운 만남은 아니었다. 

 

로마를 멸한 게르만족은 이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인해 멸족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바이킹의 목적은 영토 확보가 아니었다.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고 노예를 납치하려는 것이었다. 성인 남성은 죽이고, 여자와 아이는 노예로 팔아넘겼다. 피도끼 에릭, 푸른이빨 하랄 등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바이킹 영웅은 각지를 휩쓸고 다녔다. 런던과 피사가 습격을 당하고, 파리와 보르도가 공략당했다. 

 

바이킹은 원래 ‘바다를 모험하는 사람’이라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8, 9세기경 인구가 많이 늘어나자 동토 지역에서는 도무지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앞 길이 막막해진 이들은 독특한 모양의 배를 타고 서쪽으로는 아이슬란드와 영국, 북미 대륙. 남쪽으로는 덴마크와 프리지어, 노르망디, 동쪽으로는 흑해와 카스피해를 거쳐 바그다드까지 세력을 넓혔다. 일부 지역에서는 평화로운 교역을 했지만, 많은 지역에서는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벌였다. 

 

바이킹은 작은 규모의 함대를 이끌고 소규모의 치고빠지기 식의 노략질만 하지는 않았다. 886년 파리 포위전에서는 무려 700척의 함대와 4만 명의 바이킹 전사가 동원되기도 하였다. 방어할 힘이 없었던 유럽의 도시는 점차 돈을 주고 평화를 사기 시작했다. 이른바 데인겔트(danegeld)를 주고 잘 달래서 보내는 것이다. 심지어 단순왕 샤를은 아예 땅을 하사하는 방법으로 이들을 달랬다. 

 

이때 바이킹이 얻은 땅이 바로 노르망디다.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족이 따뜻한 프랑스에 둥지를 튼 것이다. 노르망디 공국은 금세 세력을 커져서 곧 잉글랜드를 점령했다. 백 년 넘게 영국은 노르망디 가문, 즉 바이킹의 후손이 국왕을 맡아 다스렸다. 동쪽으로 간 바이킹은 볼가와 드네프르강을 따라 도시를 건설했다. 그들은 자신을 루스(Rus)라고 불렀는데, 이는 결국 러시아(Russia)라는 광대한 나라로 발전했다. 수많은 노르만인의 피가 원래부터 그 지역에 살던 슬라브인과 섞였다. 

 

바이킹 유전자

 

몇 세기에 걸친 바이킹의 전설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신들이 점령한 곳에 동화되기도 하고, 정식 국가를 만들기도 하면서 야만적인 영웅의 전설은 이제 베드타임 스토리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유럽 전역 및 중동, 인도, 중국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동화되었다. 물론 바이킹의 유전자도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포저 교수는 다발성 경화증의 유병률 지도와 바이킹의 침략 지역 간의 흥미로운 관계에 주목했다. 바이킹이 주로 점령하고 교역한 지역일수록 다발성 경화증의 유병률이 높았다. 유병률이 가장 높은 지역은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 등 북유럽 및 독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영국, 아일랜드 등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가면 유병률이 상당히 떨어진다. 바이킹의 공격에서 벗어났던 스페인이나 그리스, 헝가리, 터키 등은 상당히 낮은 유병률을 보인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유병률은 아주 낮다. 

 

혹시 추운 지방에서 많이 걸리고, 따뜻한 지방에서는 괜찮은 것일까? 하지만 예외가 제법 많다. 적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사미족, 아메리칸 인디언,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다발성 경화증에 걸리지 않는다. 이누이트 족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적도에 가까운 지역에 사는 팔레스타인 주민, 파르시 족, 그리고 사르데냐 주민은 제법 높은 유병율을 보인다. 관련은 있지만 단순한 위도 혹은 추위나 더위의 문제는 아니다. 

 

바이킹의 이야기에 주목한 포저는 아주 대담한 가설을 세웠다. 바이킹의 유럽 공략으로 인해 다발성 경화증에 취약한 유전자가 불균등하게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의 옛이야기, 바이킹의 세력과 침공 지역 등을 종합하면서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당시의 전쟁은 영토 자체보다 노예 확보가 목적인 경우가 많았다. 노예는 멀리 인도 및 중국까지 팔려 나갔다. 바이킹이 항상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으므로 적지 않은 노르만족 포로도 먼 지역으로 ‘수출’되었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발굴되는 중국 혹은 남부 유럽 원산의 동전이나 장신구 등의 유물은 장거리 교역이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요 수출품은 ‘사람’이었다.

 

다발성 경화증은 유전병이 아니다. 그러나 상당한 유전성을 가지고 있는 병이다. 쌍둥이 간의 일치율이 높고, 부모 자식의 유전율도 높다. 양쪽 부모가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다면, 자식이 같은 병을 앓을 확률은 열 배나 높아진다. 아마도 6번 염색체가 관련되지 않을까 추정된다. 주요 조직 적합성 복합체와 관련된 영역이다. 지금까지 관련 유전자가 최소 12개 이상 확인되었다. 고대의 바이킹이 왜 다발성 경화증을 앓았는지는 일단 제쳐두자. 노르만족의 진출과 더불어 바이킹 유전자는 널리 퍼져 나갔을 것이다.

 

바이킹 유전자의 단독 범행은 아닌지도 모른다. 특정 유전자가 다발성 경화증의 위험률을 높이지만, 비타민 D가 충분한 경우에는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위도 지방에서는 비타민 D를 합성하기 위한 일조량이 부족하고, 비타민을 함유한 신선한 음식도 적기 때문에 더욱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 요인은 범행을 도운 공범일까?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른다. 

 

사르데냐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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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째서 최근 사르데냐섬의 다발성 경화증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일까? 사르데냐 지역에 북유럽 이민이 늘어났다는 보고는 없다. 추운 지방도 아니다. 저위도에 위치한 지중해의 섬이다. 비타민도 부족할 이유가 없다. 해산물과 채소가 가득하고 햇빛은 충분하다 못해 과도할 정도다. 혹시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여기서 잠깐 바이킹 유전자를 다시 생각해보자. 물론 바이킹 유전자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유력한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오른 유전자는 대개 면역 반응과 관련된 것이다. 다발성 경화증의 발병에는 과도한 면역 반응이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혹시 다발성 경화증은 감염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그런 주장이 있었다. 아직은 모르지만, 어떤 종류의 감염이 질병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가설이다. 헤르페스 바이러스나 엡스타인-바 바이러스가 종종 지적된다. 심지어 홍역이나 풍진, 볼거리도 용의선상에 오른다. 하지만 영 마뜩잖은 가설이다. 이러한 감염이 있다고 병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병이 있다고 감염이 꼭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감염이 흔한 지역과 다발성 경화증의 유병률이 높은 지역이 서로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반대의 역설적인 가설도 있다. 감염원이 너무 없어서 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감염원, 즉 병원체가 없는 깨끗한 환경은 오히려 병을 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흔히 위생 가설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에 특정한 감염원에 노출되면 오히려 다발성 경화증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너무 더러운 환경에서 살면 잦은 감염으로 인해 손해를 입지만,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살면 오히려 면역 관련 질환에 취약해질 수 있다. 최적 적응은 타협의 결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 사회는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말라리아모기가 많던 사르데냐섬에 대대적인 방역이 진행되었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처음에는 무기로, 나중에는 말라리아모기로 사르데냐섬을 공격했다. 아마 사르데냐 인은 지난 수천 년간 말라리아모기와 일종의 타협점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건강과 질병 간의 아슬아슬한 타협이다. 사실 모기 입장에서는 인간이 모두 죽어버리면 곤란하다. 말라리아 원충도 그렇다. 그런데 모기가 사라지면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갑자기 끝나버린 것이다.

 

일부 연구에 의하면 다발성 경화증을 보이는 사르데냐인, 그리고 사르데냐 인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이탈리아인은 열대열 말라리아 원충에 더욱 강력한 면역반응을 보인다. 아마도 주요 조직 적합성 항체의 다형성 및 종양괴사인자(Tumor Necrosis Factor)의 다형성이 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혹시 어린 시절에 말라리아 원충에 노출되면 다발성 경화증이 덜 걸리는 것일까? 그런데 말라리아가 사라진 환경에서는 역설적으로 다발성 경화증이 발병하는 것일까? 의심은 가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사르데냐섬에서 일어난 역설적 현상에 대한 정답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말라리아에 시달리던 사르데냐인 이 자신의 면역반응을 보다 강력하게 진화시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 대규모 방역을 통해 말라리아가 사라지면서 예상치 못한 다발성 경화증이 급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겠지만, 다발성 경화증을 앓는 사르데냐 인의 심정은 조금 복잡할 것이다. 

 

인간만 걸리는 병

 

앞서 말했듯이 다발성 경화증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연구가 더딘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 외에는 다발성 경화증에 걸리는 동물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 모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썩 만족스럽지 않다. 인간을 대상으로 연구해야 한다. 연구가 얼른 진행되기 어렵고, 이런저런 실험을 하기도 어렵다. 

 

다발성 경화증은 진화적인 면에서 상당히 아리송한 질병이다. 대부분 아이를 낳는 연령에 발병한다. 18세 이전이나 50세 이후에 발병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반적인 질병이 취약한 영아 혹은 소아기에 빈발하거나 노년기에 주로 발병하는 것에 비하면 좀 이상한 현상이다. 신체적 외상을 제외하면 젊은 성인기 장애 요인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유병률도 낮지 않은 편이다. 다발성 경화증을 앓는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약 230만 명에 달한다. 그리고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시아인에는 드문 질병이지만 유럽인에서는 제법 심각한 문제라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대략 십여 개의 유력한 관련 유전자가 제안되었는데, 사실 그동안 제안된 유전자를 다 합치면 200개도 넘는다. 가장 유력한 유전자는 HLA-DRB15*01이다. 오드비가 3을 넘는다. 하지만 어떤 유전자도 확실한 원인이라고 입증된 바 없다. 유전성은 분명 있지만, 일란성 쌍둥이의 일치율은 30%에 미치지 못한다. 

 

다발성 경화증은 중추신경계의 수초, 즉 마이엘린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전선 피복이 벗겨지는 병이다. 마이엘린 수초를 이루는 MBP(myelin basic protein)라는 단백질이 마이엘린 반응성 림프구의 공격을 받아 손상된다. 아마 여러 유전자(아직 정체가 불분명한 바이킹 유전자를 포함하여)가 모종의 취약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환경의 영향도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비타민 D부터 바이러스, 식생활, 기후, 심지어 스트레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원인이 지적된다. 

 

그렇다면 다양한 환경적 요인에 대한 다양한 유전적 취약성으로 인해 발병한다고 할 수 있을까?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세상 모든 질병이 다 이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의사들은 원인을 잘 모르는 질병을 보통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그냥 잘 모르겠다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인간만 걸린다는 것이다.

 

개나 고양이는 인간과 비슷한 환경에서 산다. 인간처럼 면역 관련 질환도 앓는다. 개체 수도 많고 이들을 치료하는 수의사도 많기 때문에 개나 고양이의 질병은 비교적 잘 밝혀져 있다. 하지만 다발성 경화증은 없다. 일부 질병이 다발성 경화증과 비슷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혹시 신경계를 침범하는 병이니, 뇌가 작은 개나 고양이는 걸리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인간보다 뇌가 더 큰 코끼리나 고래도 다발성 경화증을 앓지 않는다. 최소한 지금까지 보고된 사례는 없다. 

 

심지어 침팬지나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물론 비슷한 질병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는 있다. 질병의 동물 모델을 이렇게 만든다. 감염에 의한 비슷한 증상의 질병이 보고된 적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다발성 경화증과는 분명 다르다. 도대체 인류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외계생명체라도 침범했던 것일까? 

 

다음 화 미리 보기 I  자본 체화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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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 시기에 달성해야 할 적응적 목표가 다르다. 어린 시절에는 성장을, 성인기에는 번식해야 한다. 노년기에는 주변을 돌보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런데 각 시기의 기간 및 에너지 투입량을 결정하는 최적 수준은 생태적 압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새끼를 낳고 늙고 죽는 과정은 모든 생물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지만, 몇 년 동안 성장할지 몇 년 동안 새끼를 낳을지는 종마다, 그리고 개체마다 다르다. 심지어 수명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생물이 무조건 긴 수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는 우리 조상들이 수백만 년 동안의 진화사를 통해서 상당한 수준으로 이미 결정해두었다. 일찍 죽고 싶은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사실 개인으로서는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체화된 자본 가설은 과거에 할머니 가설이라고 불리던 고전적 가설을 개량한 것이다. 할머니 가설이란 할머니, 즉 번식 연령이 지난 이후에도 여성이 오래 사는 이유를 설명하는 진화적 가설이다. 손주를 돌보는 이득이 크기 때문에 장수하는 형질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번식기가 끝날 무렵 일종의 타협을 형성해야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 명 더 낳을 것인가? 아니면 그만 낳고 오래 사는 쪽을 택할까? 여성 입장에서는 어느 시점이 넘으면 직접 번식을 포기하고 오래 사는 편이 유리해진다. 자식의 자식, 즉 손주를 돌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왜 남자도 오래 사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성이 남자보다 상당히 오래 살지만, 남자도 제법 오래 산다. 도대체 예순 살이 넘은 남성이 왜 필요한가? 손주를 별로 돌보는 것 같지는 않다. 사냥도 잘 못하고, 돈도 잘 못 번다. 남자는 폐경이 없으므로 노년이 되어도 번식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가능성’의 문제에 불과하다. 노년기에 접어들어 자식을 낳는 남성은 극히 드물다. 과거 봉건 사회도 마찬가지다. 일부 상류층에서는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예나 지금이나 노년기의 남성이 자신의 자식을 낳아줄 배우자를 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체화된 자본 가설, 즉 '자본 체화 가설(Embodied Capital Hypothesis)'은 남성과 여성에게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가설이다. 독자께는 미안하지만국문으로는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다. ‘자본 체화 가설’이라고 하면 경제학 용어같은 느낌을 준다. 제목만 보면 도무지 뜻을 짐작할 수 없는 용어다. 하지만 더 좋은 대안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아서 당장은 ‘자본 체화 가설’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이 가설은 인류의 장수 경향은 더욱 우수한 뇌와 도구 사용 능력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우수한 뇌를 진화시켜 도구를 만들었고, 도구 사용의 이득은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해주었고…’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당연한 말이 아니다. 느닷없이 뇌가 왜 커지는가? 

 

자본 체화 가설은 조금 다르다. ‘일단 수명이 길어졌고 이는 뇌와 도구가 더 발달하도록 도와주었고…’라는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수명이 길어지면 취약한 노년기를 더 오래 보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노년기에는 아무래도 신체적 능력으로 대결하기 어렵다. 그런데 우수한 지능, 즉 큰 뇌를 가진 개체는 노년기가 되어도 제법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 만들어둔 인적 네트워크, 삶을 통해 체득한 생태학적 지식을 가진 개체만이 긴 수명, 즉 긴 노년기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은 친족 이득을 통해서 가속화되며, 긴 수명과 우수한 지능, 큰 뇌가 진화했다는 것이다. 수명이 길어지지 않았다면 큰 뇌도, 인간의 독특한 인지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샌프란시스코의 신경과 의사 릴리 보브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큰 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 그의 대뇌에 자본 체화 가설과 다발성 경화증을 연결하는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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