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N사피엔스]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

2019.08.23 15:18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 주의 지중해에 면한 항구도시다. 고대 서구사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간 유산의 보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위치해 있다. 위키미디어 제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 주의 지중해에 면한 항구도시다. 고대 서구사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간 유산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위치해 있다. 위키미디어 제공

헬레니즘 시대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B.C. 323) 열리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를 일컫는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명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다가 로마에게 지중해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시기에 해당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파죽지세로 동방원정에 나서 그 영향력이 지금의 중동지역과 이란을 넘어 인도 북서부 지역에까지 미쳤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짧은 시간에 광활한 지역을 정복한 뒤 32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원인으로는 병사설과 독살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강력한 절대 권력이 후계 준비 없이 갑자기 사라지면 치열한 권력다툼을 피할 길이 없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도 그랬다. 대왕의 왕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고노스 왕조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중에서 가장 유명한 왕조는 역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호대장이었던 소타르가 기원전 305년 이집트에 세운 왕조(소타르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로 헬레니즘 학문의 중심지였다. 알렉산드리아 하면 역시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가장 유명하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서 2세에 걸쳐 건립된 이 도서관은 고대 서구사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간 유산의 보고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 없어진 사건은 고대 인류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집트에서는 지난 2002년 현대화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알렉산드리아에 개관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일종의 국립학술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무세이온(Museion)의 부속기관이었다. 무세이온은 말 그대로 뮤즈(Muse), 즉 음악의 여신을 위한 기관이지만 기본적으로 그 이전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과 비슷한 교육 및 연구기관이었다. 여러분의 예상대로 박물관을 뜻하는 museum의 어원이기도 하다. 무세이온은 건립 이후 무려 700여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겨우(?) 300년 지속되었다. 왕조의 마지막을 함께 한 파라오는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제정로마 시대를 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잠깐 연인이기도 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아들인 것으로 강력하게 추정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는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연합해 (결혼도 했다) 카이사르의 공식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맞섰다. 결국 옥타비아누스에게 악티움 해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뒤 생을 마감하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역사 또한 막을 내린다. 클레오파트라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다. 독사에 물려 자살했다는 설도 있고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처단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로마와 지중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옥타비아누스는 제정로마 시대를 열고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된다. 헬레니즘 시대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정하는지도 사람마다 다른데 기원전 3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패망도 중요한 기준이 되는 이유는 이때 이후로 본격적인 제정 로마의 시대가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2002년 새로 문을 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2002년 새로 문을 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헬레니즘 시대에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다. 에우클레이데스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손색이 없다. 최근 사람 이름을 현지 발음에 맞게 고쳐서 표기하는 바람에 이분의 유명한 옛 이름이 잊혀 다소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옛날에는 이분의 이름을 유클리드라고 불렀다. 에우클레이데스는 인류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스토이케이아(원론)》를 써서 기하학을 집대성했다.


이를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부른다. 에우클레이데스가 집대성한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니, 세상에. 


《스토이케이아》는 그 자체로 자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다섯 개의 공리(axiom)와 다섯 개의 공준(postulate)으로부터 (그리고 23개의 정의와 함께) 465개의 명제를 증명한다. 공준과 공리는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다섯 개의 공준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5번이 그 유명한 ‘평행선 공준’이다.


아마도 여러분들이 중고등학교 시절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했던 수학적 증명의 원형이 바로 이 책에 있다. 예컨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임을 증명하는 과정도 나와 있다. 따라서 《스토이케이아》는 단순한 ‘그림책(기하학)’의 의미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무려 2000년이나 세상을 지배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려면 19세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20세기의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평행선 공준이 성립하지 않는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가 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구의 표면이나 말안장 표면 같이 굽은 표면에서의 기하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보다 크고 후자의 경우는 작다. 


에우클레이데스만큼이나 유명한 헬레니즘 시대의 인물이 있다면 아르키메데스를 빼놓을 수 없다.


어쩌면 유클리드 기하학보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가 훨씬 더 유명할지도 모르겠다. 시라쿠사 출생인 그는 기하학자, 기계공학자이면서 수리물리학자였다. 특히 수학을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투석기나 기중기 등 각종 기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유레카’로 유명한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부력이란 물 같은 유체 속에 잠긴 물체에 작용하는 유체의 힘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일화에서처럼 물이 가득 찬 욕조를 생각해 보면 욕조 아래쪽의 수압은 위쪽의 수압보다 높을 것이다. 아래쪽을 누르는 물의 양이 위쪽을 누르는 물의 양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이 압력차이 때문에 물속에 잠긴 물체는 위쪽 방향으로 힘을 받는다.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 따르면 부력의 크기는 유체에 잠긴 물체의 부피에 해당하는 물의 무게(무게는 특정 질량의 물체가 받는 중력의 크기이다)와 같다. 유체에 잠긴 물체를 물로 대체했을 때 그 대체된 물에 작용하는 중력만큼의 힘이 부력으로 작용한다. 물체가 유체 안으로 들어가면 그 물체가 유체에 잠긴 부피와 똑같은 부피의 유체가 밀려난다. 아르키메데스가 물이 가득 찬 욕조 안에 들어가면 아르키메데스의 몸뚱아리가 차지하는 부피만큼의 물이 욕조 밖으로 흘러넘친다. 같은 부피의 유체가 밀려난 것이다. 따라서 부력의 크기는 물체가 잠기면서 밀어낸 유체의 무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무세이온 소장을 역임한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크기를 측정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일화에 따르면 어느 해 하지 한낮에 시에네라는 지역의 한 우물에 태양빛이 수직으로 비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같은 시각 그로부터 정북 방향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태양빛이 수직 방향에 대해 약 7도 정도 기울어져 비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지구가 둥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월식 때 비친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다) 태양빛을 평행광선이라 가정하면 시에나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거리만으로 간단한 기하학을 이용해 지구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다. 당시에는 미터법도 없었고 두 지역 사이의 거리 측정도 정확하지 않았을 테니 에라토스테네스의 결과가 실제 값과 얼마나 비슷하냐를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의 아이디어이다. 간단한 기하학과 산수를 아는 것만으로 얼마나 엄청난(?) 계산을 할 수 있는지 에라토스테네스가 여실히 보여준다. 

 

(왼쪽부터) 에우클레이데스, 아르키메데스, 에라토스테네스
(왼쪽부터) 에우클레이데스, 아르키메데스, 에라토스테네스

에라토스테네스보다 더한 계산을 했던 사람이 아리스타르코스이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에라토스테네스보다 한 세대 정도 앞선 시대(310~230 bc)에 살았는데 그 시절에 이미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태양중심설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이때는 종교가 사회의 모든 것을 통제하던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태양중심설이 종교와 갈등을 빚을 일은 없었다. 다만 역학적인 관점에서 태양중심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현상은 연주시차이다. 연주시차란 어떤 천체가 관측자, 즉 지구의 운동에 따라 다른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훨씬 더 멀리 있는 붙박이별들을 배경으로 해서) 시각차이다. 만약 지구가 태양 주위를 1년 주기로 돈다면 지구는 6개월 단위로 태양에 대해 정반대의 위치에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별을 여름에 봤을 때와 겨울에 봤을 때 그 위치가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서울의 강북에서 남산타워를 바라보면 관악산을 배경으로 남산타워가 보이지만 강남에서 바라보면 북한산을 배경으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면 연주시차가 반드시 관측돼야 한다. 실제 연주시차는 지구가 6개월 단위로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있을 때 바라 본 시차의 절반에 해당하는 각도로 정의한다. 연주시차가 1초 각도(1도 각도의 1/3600)에 해당하는 거리를 1파섹(parsec)이라고 한다. 지구-태양과의 거리와 직각삼각형의 성질을 이용하면 1파섹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1파섹은 약 3.26광년, 또는 약 30조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거리이다. 연주시차는 훗날 갈릴레오 시대에도 갈릴레오의 주장을 논박하는 근거로 등장했다. 


연주시차를 처음 측정한 것은 1838년의 일이다. 독일의 천문학자 프리드리히 베셀은 백조자리 61번 별의 연주시차를 측정했다. 그 값은 대략 0.3초였다. 이 값은 11광년의 거리에 해당하는 값이다. 겨우 11광년 떨어진 별의 연주시차가 이리도 작으니 훨씬 더 멀리 있는 별의 연주시차는 그만큼 측정이 어렵다. 거꾸로 생각하면 기원전 3세기의 아리스타르코스가 너무나 시대를 앞섰다고도 말할 수 있다. 

 

아리스타르코스가 태양,지구,달의 상대적 크기를 계산한 흔적. 위키미디어 제공
아리스타르코스가 태양,지구,달의 상대적 크기를 계산한 흔적. 위키미디어 제공

또한 아리스타르코스는 월식을 이용해 달의 크기를 측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월식을 이용하면 아주 간단하게 달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 월식은 지구의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가는 현상이다.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완전히 가려지는 때까지 걸린 시간은 달의 크기에 비례할 것이다.

 

한편 달이 완전히 가려진 다음부터 다시 달이 완전히 나올 때까지 걸린 시간은 지구의 크기에 비례할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시간을 비교하면 달이 지구보다 얼마나 작은지를 알 수 있다. 실제로는 태양광이 완전히 평행광선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산수가 필요하지만 결과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달의 크기는 지구의 약 1/4이다. 지구의 크기는 에라토스테네스의 방법을 써서 구할 수 있다. 그러면 달의 실제 크기가 얼마인지도 구할 수 있다. 지구의 반지름은 약 6400킬로미터, 달의 반지름은 약 1700킬로미터이다. 한편 지구에서 보름달을 봤을 때 그 크기를 각도로 잴 수 있다. 보름달의 크기는 약 0.5도이다. 이 각도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와 달의 크기의 비율로 나오는 값이므로 이 각도로부터 달까지의 거리를 추정할 수 있다. 달까지의 거리는 약 38만 킬로미터이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잴 수는 없을까.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달이 반달일 때 지구-달-태양은 직각삼각형일 이룬다. 이때 달의 위치가 직각에 해당하고 지구-태양의 거리가 빗변에 해당한다. 반달일 때 지구에서 달과 태양을 바라보는 각도를 측정하면 약 89.8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구-달-태양이 구성하는 직각삼각형의 모든 각도가 결정되는 셈이다. 즉, 지구-달-태양이 구성하는 직각삼각형의 실제 크기는 모르지만 그와 닮음인 삼각형은 구한 셈이다. 이로부터 지구-태양의 거리가 지구-달 거리의 몇 배인지를 구할 수 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이런 방법으로 지구-태양의 거리가 지구-달 거리의 20배라고 추정했다. 실제 거리비는 약 400배이다. 


실제 지구-태양의 거리를 구하려면 지구-달 거리를 알아야 한다. 앞서 우리는 지구-달의 거리를 어떻게 구하는지를 설명했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는 약 1억5000만 킬로미터이다. 태양의 크기를 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구-태양 사이의 거리를 아니까 지구에서 태양의 위-아래, 또는 좌-우 끝을 바라보는 각도를 재면 된다. 놀랍게도 지구에서 태양을 바라보는 겉보기 크기는 달의 겉보기 크기와 똑같아서 그 각도는 약 0.5도이다. 달과 태양의 겉보기 크기가 같기 때문에 우리는 개기일식이라는 놀라운 천문학적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달까지의 거리 대비 달의 크기의 비율과 태양까지의 거리 대비 태양의 크기의 비율이 같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태양까지의 거리와 달까지의 거리 비율이 400배이고 태양의 크기와 달의 크기의 비율 또한 약 400배이다. 달은 지구의 1/4이니까 결국 태양은 지구의 약 100배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실제 태양의 크기는 지구의 약 109배이다. 


여기서 나열한 숫자들은 별 의미가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검색만 하면 지구-태양의 거리가 얼마인지, 태양의 크기가 얼마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조각조각 지식들을 하나씩 끌어 모아 우리가 원하는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과학은 그렇게 성장해 온 학문이다. 

 

참고자료

김영식, 박성래, 송상용, 《과학사》, 전파과학사
임경순, 정원, 《과학사의 이해》, 다산출판사
버트란드 러셀, 《서양철학사》, 을유문화사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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