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숫자보다 많은 금관

2013.11.24 18:00

 

사적 40호인 경주황남리고분군. 대릉원으로 불린다. - 이종호 박사 제공
사적 40호인 경주황남리고분군. 대릉원으로 불린다. - 이종호 박사 제공

대릉원지구의 간판스타라면 경주황남리고분군(사적 제40호, 속칭 대릉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대릉원에는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등 많은 고분들이 있는데 야간에도 개장(입장시간은 09~22시까지)하여 어느 곳보다도 친근하게 다가오지만(안압지, 첨성대 포함) 이곳은 경주에서 입장료를 받는 몇몇 되지 않는 유적지이다. 경주 일원에서 입장료를 받는 곳은 대릉원, 안압지, 첨성대. 오릉, 포석정, 김유신장군묘, 무열왕릉, 분황사, 불국사, 석굴암, 기림사 등이다. 한편 경주 시민들은 ‘사적지공개관람료징수업무위탁관리조례 제10조’에 의거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사적 175호 미추왕릉 - 이종호 박사 제공
사적 175호 미추왕릉 - 이종호 박사 제공

미추왕릉(사적 제175호)은 여러 모로 황남대총이나 천마총과 다르다. 우선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되었다는 점이고 또 무덤 둘레에 담장이 둘러져 있다. 묘역 출입을 통제하는 문도 세워져 있으며, 무덤 앞쪽에 제사를 모시는 사당인 숭혜전도 건립되어 있다. 미추왕이 그토록 사후에 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그가 흉노 휴저왕의 황태자 김일제의 후손으로 김씨 최초의 신라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북 청도에 있는 이서국이 금성(경주)을 공격해왔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했다. 이때 갑자기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무수한 병사들이 나타나 적들을 물리쳤다. 적이 물러간 후 죽엽군(竹葉軍)들도 모두 사라졌는데 미추왕릉 앞에 수만 개의 댓잎이 쌓여 있었다. 백성들은 돌아가신 미추왕이 군사를 보내 적을 물리쳤다고 생각하여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 죽장릉(竹長陵)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미추왕릉에 가서는 무덤의 앞면만 보지 말고 무덤 뒤편으로 걸어가 보기 바란다. 실제로 미추왕릉은 무덤 뒤편에 울창한 대나무들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대숲 사이로 허리를 굽히고 왕릉 쪽으로 다가가면 눈앞에 죽엽군들이 적을 향해 힘차게 뛰어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죽은 김유신이 미추왕에게 찾아가 자손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며 신라를 떠나겠다고 하자 미추왕이 달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추왕은 김유신과 함께 신라인에게 영원한 호국영령으로 상징화되었는데 이로 인해 신라인들이 그 덕을 생각해서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고 서열을 혁거세의 능인 오릉보다도 위에 두어 대묘(大墓)로 불렀다고 한다.


대릉원에서 놀라운 것은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의 기마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각종 제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금관과 장신구, 금으로 만든 허리띠, 띠 고리(버클), 각배(뿔잔), 보검, 유리제품 등도 북방기마민족들이 즐겨 사용한 것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품들이다.

 

사적 98호 황남대총 - 이종호 박사 제공
사적 98호 황남대총 - 이종호 박사 제공

특히 황남대총에서는 순금제 금관을 비롯해 실용적인 은관(銀冠),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로만그라스 등 무려 7만여 점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비단벌레(玉蟲)를 잡아, 그 날개 수천 개를 장식하여 무지개빛처럼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비단벌레 장식 마구(馬具)’도 발견되어 세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들 출토품은 고구려와 백제 고분의 출토품과 비교하면 품목과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동 시대의 중국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해보아도 차이가 크거나 전혀 달라 두 문화의 공통점을 거의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신라는 왜 중국문화의 수용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견지했을까하는 질문이 있는데 이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신라는 독자적인 문화를 영위할만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중국과 전혀 다른 풍습과 문화를 가진 북방기마민족이 신라로 동천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북아시아·카자흐스탄의 이리 강 유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카족의 대규모 고분의 크기는 지름이 30~100미터로 거의 신라 고분 규모에 가깝다. 특히 지상에 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목관을 놓고 주위에 돌을 채우고 다시 목곽을 돌로 빈틈없이 덮고 그 위에 봉토를 올리는 방식으로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유사한데 건립연대가 기원전 7~기원전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카족을 스키타이 부류로 보기도 하므로 적석목곽분을 스키타이-알타이의 쿠르간 또는 쿠르간으로 줄여서 부른다. 요시미츠 츠네오는 신라의 적석목곽분의 원류로 러시아를 거점으로 삼았던 흉노(훈족)로 추정했는데 이 부분은 필자를 비롯하여 여러 자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지므로 이곳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경주 황남동에 있는 고분 중에서 대표적인 적석목곽분이 황남대총(제98호분)이다. 경주 대릉원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은 적석목곽분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형태상 쌍분, 즉 부부묘로 표형분이라고도 불리는데 남분(남자)을 먼저 축조하고 나서 북분(여자)을 잇대어 만든 것이다. 황남대총 발굴은 1973년 7월에서 1975년 10월까지 2년 4개월이 소요되었는데 이것은 국내 고분 발굴사상 단일무덤으로서는 최장 조사기간이다. 발굴에 동원된 인원만 총 3만 3천여 명이었는데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무덤의 규모답게 출토유물은 순금제 금관, 비단벌레 장식의 안장틀과 발걸이, 말띠드리개, 유리병 등 무려 7만여 점이나 출토됐다는 점이다.


신라 최대의 이 고분에는 당연히 신라에서 최고 권력을 자랑하던 왕과 왕비가 매장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여자무덤인 북분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남자무덤인 남분에서는 금관 대신 왕관 형식상 유례가 없는 은관 1점, 은관과 같은 형식의 금동관 1점 외에 동제 금도금의 금동제 수목관 5점이 출토되었다.

 

 

서봉총 금관 - 이종호 박사 제공
서봉총 금관 - 이종호 박사 제공

여자의 금관이 더 화려한 이유로 권삼윤은 신라 금관의 주인공이 정치 권력자가 아니라 샤먼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명한 스키타이의 고분에서 출토된 ‘수하의 기사’에는 7개의 가지를 가진 우주목에 말이 매여 있다. 기마민족이 사는 땅은 나무가 귀한 초원이 대부분이므로 나무가 있는 곳은 성스러운 땅이다.


알타이족은 샤먼이 우주목을 타고 오르면서 환자들을 치료한다고 믿었다. 샤먼은 하늘과 교응하는 영혼의 소유자이므로 병마 때문에 고생하는 자, 불행에 빠져 고통받는 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인식되었다. 당시 제정(祭政)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샤먼의 중요도는 누구보다도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여자의 무덤에서 더 화려하고 우수한 부장품이 나왔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설명을 대입하면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허리띠의 경우도 남자는 7줄인데 비해 여자는 13줄이라는 것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황남대총을 비롯하여 적석목곽분에서 발견된 금관들이다. 금관은 금으로 만든 관모를 뜻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모든 관모를 통칭하기도 한다. 관모는 착용자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특별한 의식을 집행할 때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로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지만 신라 고분의 출토품이 주류를 이룬다.


신라와 가야의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은 모두 7점(가야 1점)이다. 이 중에서 교동 금관을 제외한 황남대총 북분·금관총·서봉총·금령총·천마총 금관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이다. 학자들은 경주 일원에만 150여 기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중 발굴된 것은 약 30여기에 불과하므로 앞으로 발굴 여하에 따라 훨씬 많은 금관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금관을 출토한 무덤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경으로 소위 4명의 마립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왕의 숫자보다 많다. 왕비나 왕의 가족도 금관을 썼기 때문으로 추정하는 이유이다.


 경주를 제외한 경상도 일대에서 금동관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들도 5세기 후반부터는 금관처럼 ‘출’자 모양으로 통일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경주의 사로국이  경상도 일대의 소국을 복속시킨 뒤 그 수장에게 일정한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금동관을 비롯 각종 장신구를 하사함으로써 지배복속관계를 유지한 흔적으로 추정한다.
 

 

참고문헌 :
    『경주역사기행』, 하일식, 아이북닷스토어, 2000
    『로마 문화 왕국, 신라』, 요시미츠 츠네오,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2002
    『발해를 다시 본다』, 송기호, 주류성, 2003
    『황금의 나라 신라』, 이한상, 김영사, 2004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 이종호, 백산자료원, 2005
    『고대사의 블랙박스 Royal Tombs』, 권삼윤, 랜덤하우스 중앙, 2005
    『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 경주문화권』, 국민대학교국사학과, 역사공간, 2006
    『한국7대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아침, 2007
   『소호이야기』, 김인희, 물레, 2009
   『황금보검의 비밀』, 이종호, 북카라반, 2013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6호, 2003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과학저술가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과학저술가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 편집자 주
   동아사이언스가 발행하는 인터넷 과학신문 ‘더사이언스’(www.dongascience.com)가 공룡유산답사기, 과학유산답사기 2부, 전통마을을 찾아가는 과학유산답사기 3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찾아가는 과학유산답사기 4부에 이어, 천년 고도 경주의 곳곳을 살펴보는 과학유산답사기 5부 경주역사유적지구를 연재합니다. 과학저술가 이종호 박사의 도움을 받아 세계문화유산 속에 숨어 있는 과학지식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선보일 예정이니,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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