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사회심리학]우리는 언제든 도덕을 던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2019.07.06 06:00
불의를 지적하기 쉽지만 나와 관련된 순간 인간의 도덕적 판단 능력은 뒤틀린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불의를 지적하기 쉽지만 나와 관련된 순간 인간의 도덕적 판단 능력은 뒤틀린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왜 세상은 이 모양 이 꼴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몰라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알고 나면 바뀔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대학원 생활을 해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날고 기는 똑똑한 사람들과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다들 가장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불의에는 침묵하기 일수였다. 성폭력이나 실적 가로채기 같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원래 다 그렇다’는 논리 하나로 정당화되고 있었다. 


멀리 있는 불의를 지적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것이 ‘나’와 관련된 일이 되는 순간 ‘이건 좀 다르지’가 되며 인간의 도덕판단 능력은 뒤틀린다. 내가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내가 갈등에 휘말리지 않아도 될 때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쉽지만 정작 나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도덕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누구나 다 추상적인 레벨에서는 도덕적이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도덕적임을 자처하지만 실제로 도덕적인 사람은 많지 않은 이유는, 인간의 도덕성이란 고정되어 있기 보다 선택적으로 발휘되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알버트 반두라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상황과 대상에 따라 도덕의 끈을 붙들지 놓을지, 죄책감을 느낄지 말지를 달리한다. 즉 인간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선택적 도덕적 이탈(selective moral disengagement)을 자유자재로 이루는 동물이다. 우리는 언제든 도덕을 던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많은 장치들을 가지고 있다. 

 

①정당화(Moral Justification)


반두라에 의하면 도덕적 이탈을 가능하게 하는 첫 번째 장치는 정당화이다. 원래 폭력은 나쁘지만 이 경우는 좀 다르고 어쩌고 하며 결국엔 ‘나쁘지만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다. 정당화는 거의 무의식 수준에서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한 번 이 사람한테는 맘껏 해를 끼쳐도 된다는 필터를 끼는 순간 그 일은 정말 괜찮은 일이 되어 버린다. 사람이 죄책감 없이 사람을 노예로 삼거나 심지어 학살을 벌이는 등의 일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폭력과 살인 같은 극단적인 행위들도 나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를 제거하고 (적어도 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부끄럽기보다 당연하고 정의로운 일이 되어 버린다. 무자비한 테러리스트의 경우도 자신들을 억압에 저항하기 위한 영웅, 심지어 평화주의자, 인류의 구원자로 여기며 자신들의 살인 행위를 자랑스러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인간이 정당화하지 못할 악행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당화하는 순간 살인자도 구원자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네게 부조리를 믿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너로 하여금 포악한 행위도 저지르게 만들 수 있다”는 볼테르의 말이 실제로 가능한 이유다. 

 

②중립적인 이름 붙이기(Euphemistic Labelling)


도덕 이탈을 가능케하는 두번째 장치는 완곡한 이름 붙이기다. 총격을 총격이라기보다 ‘타겟을 맞추기’, 또 전쟁에서 민간인 사상자를 콜래트럴 데미지 즉, 부차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부르는 것이나 거짓말을 ‘다른 버전의 이야기(a different version of the facts)’ 정도로 부르는 소위 말장난들이다. 


본인들이 폭격을 해서 무고한 시민이 죽었지만, '콜래트럴 데미지'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자연재해같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처럼 가해의식에서 빠져나오는 게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분명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일이 중립적이거나 어쩔 수 없었던 일이 되는 일이 흔하다. 


사기를 ‘전략’이라고 포장하거나 ‘우리가 남이가’처럼 부패의 공범을 끈끈한 우정과 인간미의 화신인 것처럼 포장하는 일도 흔하다. ‘고객 만족’을 위해 애썼을 뿐이라며 클라이언트를 위해 불법적인 일도 불사하는 일도 존재한다. 모두 불의를 죄책감 없이 손쉽게 저지르는 데 기여하는 말들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류의 말들처럼 분명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일인데 어떤 말을 듣고서 가책이 사라졌다면 말장난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③유리한 비교(Advantageous Comparison)

 

불의를 죄책감 없이 저지르는데 기여하 장치들에는 정당화, 중립적 이름 붙이기, 유리한 비교, 면책, 결과 왜곡 등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불의를 죄책감 없이 저지르는데 기여하 장치들에는 정당화, 중립적 이름 붙이기, 유리한 비교, 면책, 결과 왜곡 등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세 번째 장치는 유리한 비교를 하는 것이다. 예컨데 범죄자들 중 죄를 뉘우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내가 안 했어도 다른 누군가 했을 거라거나 나보다 더 한 나쁜놈들도 많고, 나는 조금만 헤먹었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인간들은 더 많이 헤쳐먹고도 무사하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내가 살아남으려면 먼저 남들에게 해를 입힐 수밖에 없다는 등의 사고방식을 보인다. 나보다 더 한 놈들도 많기 때문에 내가 한 건 별로 악행도 아니고 따라서 나는 억울하다는 사고방식이다. 또는 폭력을 행사해 놓고 그걸 정당화하겠다고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랬다는 둥 나중에 보면 피해보다 얻는 게 더 많을 것이라고 둘러대는 사람들도 있다. 나쁜 건 나쁜 것일텐데 조금만 나쁘다던가 덜 나쁘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통해 나쁨을 희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또는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괜찮다는 식의 이야기들 역시 죄책감 없는 악행의 확산에 기여한다. 

 

④면책(Displacement of Responsibility)


네 번째는 책임을 면하는 것이다. 흰 가운을 입은 실험자가 시켰다고 해서 약 70%의 사람들이 다른 참가자를 전기고문 했다는 밀그램의 실험처럼, 사람들은 대체로 권위에 약한 편이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이를 다시 악행의 핑계로 쓰는 안타까운 경우도 흔하다. 일례로 나치 전범들의 경우 위에서 시켜서 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피해자에게 어떤 개인적인 감정도 없었고 단순히 주어진 역할에 따라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따라서 자신은 악행을 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자신을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로 치환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책임감과 도덕적 책임감은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흔히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맡은 임무에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을 떠올리지만, 이런 류의 책임감은 종종 도덕적 인간으로써의 책임감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말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충실하게 잘못된 명령을 따르고 개인으로서의 도덕적 책임감은 지지 않는 현상이 존재한다. 실제로 성격특성 중 성실성(의무감, 책임감, 계획성)이 높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명령을 잘 따르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잘못된 명령도 더 잘 따르는 편이었다는 발견이 있었다. 

 

⑤결과 왜곡(Disregard or Distortion of Consequences)


다섯 번째는 자신이 끼친 해로움을 평가절하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의도적이고 아주 질이 나쁜 충격적인 일로 여기는 반면, 자신이 타인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실수로 어쩔 수 없이, 내가 ‘한’ 게 아니라 그렇게 ‘된’, 해가 크지 않았고 상대방도 빨리 잊었을 것이라며 의도와 결과의 나쁨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세상에 악행은 넘쳐나지만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여전히 많은 모순이 발생하는 것 같다. 똑같은 행동도 남이 하면 잘못된 것이지만 내가 하면 잘못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에 서로 남들만 비난할뿐 반성하거나 행동을 교정하는 사람은 적은 게 아닐까? 타인의 도덕성을 비난하면 왠지 나는 적어도 그 사람보다는 더 나은 사람인 것 같은 도덕적 정체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비난은 많지만 악행은 결코 줄지 않는 현상이 유지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잘못된 행동의 결과가 심리적인 충격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또는 환경오염의 피해처럼 아주 먼 곳에서 나타나는 등 피부로 체감할 수 없다면 결과를 왜곡하는 건 더 쉬워진다. 피해자들이 숨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도와야 하는 이유다. 

 

이 외에도 인간을 ‘벌레’ 정도로 치환하는 ‘비인간화’, 비난 전가하기, 내 사람들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내집단 편향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선택적으로 도덕성을 버리게 한다는 것이 반두라의 설명이다. 더불어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도덕성은 선택적으로 발휘되기 때문에 대상이 내가 아닌, 이 환경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그 사람은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악독한 범죄자일수록 누울 자리를 가려 눕기 때문에 피해자 외의 주변사람들에게는 ‘그럴 사람 아니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다’는 말을 듣는 편이기도 하다. 결국 그럴 사람 아니라는 말은 적어도 나한테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이란 보편적으로 선한 사람이기보다 ‘적어도 나한테는’ 선했던 사람이란 뜻이니까. 가급적 편파적이지 않은 도덕 판단력과 선택적이지 않은 도덕성을 가지도록 힘써보자. 

 

-Bandura, A. (2002). Selective moral disengagement in the exercise of moral agency. Journal of Moral Education, 31, 101-119.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게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법과 겸손, 마음 챙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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