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보통과학자] 매튜 볼턴, 과학을 미치도록 사랑한 갑부

2019.07.04 15:00
과학을 통해 사회변화를 꿈꾸었던 만월회(Lunar society)에는 증기기관차를 기술적으로 개량한 제임스와트와 이를 서포트해주는 투자자 메튜 볼턴이 있었다. 사진은 그들이 정기적으로 만났던 장소. 위키피디아 제공
과학을 통해 사회변화를 꿈꾸었던 만월회(Lunar society)에는 증기기관차를 기술적으로 개량한 제임스 와트와 이를 서포트해주는 투자자 메튜 볼턴이 있었다. 사진은 그들이 정기적으로 만났던 장소. 위키피디아 제공

18세기 중반, 영국의 버밍엄이라는 도시에서,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과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제에 관해 밤새도록 토론을 하던 괴짜들이 있었다. 당시 영국사회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던 사람들로 구성된 이 괴짜모임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만월회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이뤄지기 시작했다. 루나틱(lunatic), 즉 괴짜라는 말의 어원이 된 이 모임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영국이 강대국이 된 이유도 밝혀지기 시작했다.

 

만월회, 과학과 기술로 사회를 진보시키려던 엔터프루너 집단

만월회는 1760년 이전의 어느 날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과 매튜 볼턴(Matthew Boulton)이 만나면서 시작된 것으로 과학사가들은 추정한다. 18세기 중반의 영국은 산업혁명이 막 진행되던 시기였고, 과학과 기술 그리고 산업에 대한 기대가 충만한 시대였다.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에라스무스 다윈은 의사이자, 과학자이자 발명가였고, 볼턴은 금속제조업과 단추제작사업으로 성공한 재벌이었다. 하지만 둘의 만남은 사회적 성공을 위한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둘은 모두 과학을 사랑했고, 과학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꿈꾸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자민 프랭클린도 볼턴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이들은 특히 전기가 만들어지는 원리와 이를 이용한 산업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관심사가 훗날 증기기관에 대한 볼턴의 관심의 기원이 된다. 이들이 과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주제의 토론을 펼치던 만월회에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James Watt), 산소를 발견한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도자기 사업가였던 조지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구성원들의 면면을 현대의 시선으로 바라봐도, 이들이 과학기술을 기반으로한 사업에 관심이 있었다는건 명확하다. 오늘날로 바꿔 말하면, 이들은 테크 스타트업을 꿈꾸는 엔터프루너 집단이었던 셈이다⁠.

근대과학은 유럽대륙에서 시작했지만, 18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의 과학적 스타일은 상당히 달랐다.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영국은 과학을 진흥하면서도 그 발견과 산업에의 응용을 딱히 구분짓지 않았다. 만월회는 그런 영국의 분위기를 대표하는 모임인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프랑스 과학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연구가 지배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이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유가 바로 이런 과학적 스타일의 차이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영국의 과학적 스타일은 확실히 순수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의 지식인들이 모두 사업가와 발명가를 학자로 인정하고 교류했던 건 아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로버트 보일의 실험실에는 보이지 않는 기술자들이 과학자의 연구를 이름 없이 수행하고 있었고, 영국 특유의 자연철학 중심 지식인 사회는, 기술자와 사업가들과 학문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영국사회는 빠르게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으로 변해갔지만,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이 그 빠른 변화를 받아들이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만월회는 왕립학회와 각종 철학자 모임이 포용하지 못했던 기술자와 사업가들이 과학자와 함께 격의 없이 학자적인 토론을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회적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신분에 구애 받지 않은 과학적 토론의 사회적 분위기가 영국을 산업혁명의 주축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발명가였으며, 과학자이도 했던 벤처 투자자, 아마도 볼턴을 현대적 의미로 각색한다면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볼턴은 과학자인가

 

영국 50파운드 지폐에 그려져 있는 매튜 볼턴과 제임스 와트.
영국 50파운드 지폐에 그려져 있는 매튜 볼턴과 제임스 와트.

역사가들이 이미 잘 밝혀두었듯이, 볼턴이라는 엔젤투자자 혹은 엑셀레이터가 없었다면, 와트의 증기기관이 영국에 퍼지는 시간은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볼턴은 단지 자금을 지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와트의 증기기관을 기술적으로 개량하고, 판로를 개척하고, 특허를 내고 유지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이 2011년 50파운드 지폐에 이례적으로 와트와 볼턴이라는 두 명의 위인을 함께 집어 넣은 건 우연이 아니다. 볼턴은 와트의 재정적 후원자일 뿐 아니라, 과학적/기술적 조언자이디고 했기 때문이다. 볼턴은 단지 돈만 많은 재력가가 아니라, 에라스무스 다윈 등의 학자들과 과학에 대해 토론하는 만월회의 일원이었고, 스스로 과학과 발명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사실 오늘날처럼 과학자라는 직업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시대에, 18세기 중엽 과학자의 정체성과 모습을 상상한다는건 쉽지 않다. 특히 1830년대까지만 해도 과학자, 즉 사이언티스트(Scientist)라는 개념 자체는 그다지 친숙하지 않았다. 보통 1833년 윌리엄 휴월이라는 철학자가 과학자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말은 처음엔 과학자 집단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왜냐하면 일부 귀족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통해 어떤 이익을 추구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과학자라는 어감엔 과학을 통해 사업을 추구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볼턴이 살던 19세기 중엽의 영국에서, 과학자라는 직업은 기술자나 발명가 혹은 사업가와도 크게 마찰을 빚지 않는 활동을 의미했다. 일부 귀족 출신의 과학자를 제외한다면,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서 과학은 발명이나 산업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적 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이었고, 그런 활동에 종사하고 기여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과학자로 여겼다. 오늘날처럼 순수하게 과학자라는 직업이 나뉘어지게 된건, 20세기 들어 나타난 현상이다⁠.

이론과 실천, 과학과 기술, 순수와 응용의 구분을 넘어

 

매튜 볼턴은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기간을 연장하고  1774년 볼턴앤드와트를 세우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제공
매튜 볼턴은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기간을 연장하고 1774년 볼턴앤드와트를 세우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제공

과학자의 작업이 발명가나 기술자의 작업과 구분되는 경계는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발명가의 작업이 과학자의 작업이 아니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오래전부터 과학사학계에서는 과학의 역사를 전문화된 분과학문인 과학사로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과학철학의 구획문제를 남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예를 들어 과학사라는 분야를 창안했다는 평가를 듣는 알렉산더 코이레는, 과학의 역사를 이론 중심으로 재편해 기술했고, 이는 자연철학이 학문의 기준으로 평가되던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잘못된 기준이었다. 원래는 과학과 비과학을 구획하려던 과학철학의 구획문제는, 과학사로 넘어가 과학과 기술, 순수과학과 응용과학 등을 구분하는 문제로 비화되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현실에서는 뚜렷한 경계가 없는 과학과 기술의 경계가 과학을 다루는 문헌들 속에서는 나타나는 아이러니가 초래됐다⁠.

이론중심의 분야만을 과학으로 구획하던 과학사가들의 실수로 인해, 현재까지 대중은 과학과 기술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됐다. 예를 들어 과학사가 루퍼트 홀은 제임스 와트를 과학자로 여기지 않았는데, 그의 작업이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코이레와 홀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쿤은 이론중심의 물리학 분야를 중심으로 과학혁명의 구조를 밝히는 책을 저술했고, 쿤의 책이 전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부터, 과학에 대한 이미지는 이론중심적인 학문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역사에서 과학자라 불러도 무방할 여러 기술자, 발명가, 사업가 등을 잃게 된건, 바로 지식인 사회의 오래된 고질병인 이론중심의 형이상학에 대한 선호와, 이를 받아들인 과학철학, 과학사 등의 학문에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자를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구획은, 동료 평가를 거친 학술지에 연구논문을 실을 수 있느냐일 것이다. 만약 볼턴이 현대를 살아간 과학자였다면, 그 또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중엽의 과학계는 지금처럼 학술지를 통한 연구논문 출판이 완전히 정착되지도 않았고, 과학자의 직업이 대학교수나 회사 연구원 등으로 고정된 것도 아니었다. 어떤 과학사가는 만월회 구성원인 웨지우드가 철학회보에 논문을 제출한 적이 있으므로 과학자이고, 볼턴은 그저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사업가라고 구획하지만, 당시 왕립학회장이던 조지프 뱅크(Joseph Bank)는 볼턴 같은 엔터프루너였고 논문도 없었다. 즉, 현대의 기준으로 과거의 누군가를 과학자나 비과학자로 구분하는 일에는 신중한 분석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만월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벤자민 프랭클린도 제임스 와트와 매튜 볼턴처럼 미국 화폐에 초상화로 새겨져 있다⁠7. 프랭클린은 번개를 연구해 피뢰침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며, 실제로 다양한 연구를 통해 다방면의 과학분야에 기여했고,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다. 프랭클린을 발명가로 부를 것인지 혹은 과학자로 부를 것인지는 역사를 과거 시점에서 바라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볼턴과 프랭클린 모두 19세기의 관점으로는 과학자였다고 생각한다. 이론중심의 과학분야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둘은 과학과 발명 그리고 사업과 사회를 통합적으로 바라본, 어쩌면 지금은 거의 남지 않은 진짜 과학자였는지 모른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을 때 과학데이를 만들고 이화학연구소를 설립하려던 김용관이 발명학회를 만들었던 것도 우연은 아닐지 모른다⁠. 과학자의 역사엔 산업혁명으로 세상을 바꾼 발명가들의 역사가 들어 있다. 그들은 당당한 과학자였고, 과학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려던 혁명가이기도 했다. 볼턴도 프랭클린도, 우리가 아는 과학자의 이미지가 아니지만, 과학자가 맞다. 그들은 책상에서 지식을 추구하던 자연철학을 경멸하고, 현장에서 지식을 찾으려 했고,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꿈을 꾼 사람들이다.

매튜 볼턴은 과학자였다. 그리고 우리에겐 여전히 지금도, 볼턴처럼 재력가이면서 과학에 모험적으로 투자했던 과학자가 없다. 한국 사회의 변화는, 바로 그런 부자 과학자에게서 올지도 모른다. 그런 과학자가 보통 과학자가 되는 세상이라면, 더이상 과학적 기초의 부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한국엔 볼턴 같은 부자 과학자가 필요하다.

 

참고자료

- 만월회의 과학과 산업에 대한 융합적 관심에 대해서는 Schofield, R. E. (1957). The industrial orientation of science in the Lunar Society of Birmingham. Isis, 48(4), 408-415 참고.

-신분·종교 가리지 않는 영국 분위기가 혁신 이끌어( https://news.joins.com/article/21044609 )

- 매튜 볼턴에 대한 책으로는 다음이 있다. Dickinson, H. W. (2010). Matthew Boult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 (*)이 장을 쓰는데 다음 논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Baggott, S. (2016). Was Matthew Boulton a Scientist? Operating between the Abstract and the Entrepreneurial. In Matthew Boulton (pp. 69-83). Routledge.

-현대사회에서도 과학과 기술의 경계는 모호하다. 다음 논문을 참고할 것. 홍성욱. (1994).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용: 지식으로서의 기술과 실천으로서의 과학. 창작과비평, 22(4), 329-350.7

-발명가와 기술자 그리고 과학자이면서 정치인이었던 인물들이 화폐에 기록되어 있다는 건 한국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장영실을 화폐에 넣자는 의견이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정말 서양에 대한 과학컴플렉스가 아닌가 싶다.

-김용관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할 것. 임종태. (1995). 김용관의 발명학회와 1930 년대 과학운동. 한국과학사학회지, 17(2), 89-133.

 

※필자소개

우재.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생물학과에 진학했으나, 간절히 원하던 동물행동학자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고, 바이러스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을 연구했다. 초파리 수컷의 교미시간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모두가 무시하는 이 기초연구가 인간의 시간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닌다.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 타운랩을 준비 중이다. 최근 초파리 유전학자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책 《플라이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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