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에 숨었다 피는 ‘씨범꼬리'에서 북극식물의 인내 배워요.”

2019.06.21 03:00
북극 전문가이자 생물학자인 이유경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19일 인천 송도 극지연구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극지 연구는 북극에 영토를 갖지 않은 한국이 관련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송도=윤신영 기자
북극 전문가이자 생물학자인 이유경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19일 인천 송도 극지연구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극지 연구는 북극에 영토를 갖지 않은 한국이 관련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송도=윤신영 기자

‘자주범의귀’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섬에 흔히 자라는 꽃이다. 강한 자주색을 띤 꽃잎 5개가 이끼만 한 크기의 앙증맞은 별 모양을 이루며 무더기로 핀다. 자주범의귀는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서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육상을 가득 덮고 있던 빙하가 기후변화 등으로 녹으면서 드러난 불모의 땅에 이끼와 함께 가장 먼저 싹을 틔우는 식물이기도 하다.


19일 오전, 인천 송도 극지연구소에서 만난 북극 전문가 이유경 극지연 극지생명과학연구부 책임연구원은 좋아하는 북극의 꽃을 묻는 질문에 자주범의귀를 첫 손에 꼽았다. “용감한 꽃이거든요. 빙하로 수십만 년 덮여 있느라 아무 영양도 없는 땅에 미생물 다음으로 가장 먼저 진출하고, 가장 오래 견디는 식물입니다.”


이 책임연구원의 삶이 자주범의귀와 비슷하다. 미생물학자인 그는 2004년 극지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국내 첫 연구기관인 극지연구소가 설립될 때부터 북극 생물 연구에 참여했다. 국내에서는 불모지와 같은 분야였다. 이후 한국의 북극기지인 다산과학기지가 있는 스발바르와 미국 알래스카, 그린란드 등을 거의 매해, 때로는 한 해에 두 번 이상 방문하며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 다녀온 북극 방문 횟수만 15번에 이른다. 북극의 해양과 토양에서 미생물을 관측하고, 환경 변화에 따른 생태계 변화를 살피는 게 주요 연구 분야지만, 2011년부터는 식물도 틈틈이 연구하고 있다.


“2011년, 다산과학기지에 가려다 경유지인 노르웨이 롱이어비엔에서 기상악화로 비행기가 결항돼 발이 묶인 적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바쁜 일정에 하루를 허비하게 돼 발을 굴렀는데, 그 순간 다른 풍경이 보였습니다. 낮밤없이 연구 주제인 미생물만 보고 사느라 한번도 신경쓰지 못했는데, 북극에 식물이 참 많더군요.” 

 

이유경 극지연 책임연구원이 가장 좋아하는 북극 식물로 꼽은 자주범의귀. 가장 북쪽에 사는 꽃이자, 빙하가 물러난 땅에 미생물 다음으로 먼저 자리잡는 식물이다. 이 책임연구원은 ′용감해서′ 이 꽃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이 책임연구원이 낸 ′한 눈에 보는 스발바르 식물′ 표지에도 자주범의귀가 들어갔다. 황영심 제공(′한 눈에 보는 스발바르 식물′ 발췌)
이유경 극지연 책임연구원이 가장 좋아하는 북극 식물로 꼽은 자주범의귀. 가장 북쪽에 사는 꽃이자, 빙하가 물러난 땅에 미생물 다음으로 먼저 자리잡는 식물이다. 이 책임연구원은 '용감해서' 이 꽃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이 책임연구원이 낸 '한 눈에 보는 스발바르 식물' 표지에도 자주범의귀가 들어갔다. 황영심 제공('한 눈에 보는 스발바르 식물' 발췌

마침 동행하던 식물학자 이은주 서울대 교수와 식물 사진을 찍으며 종을 분류하고 기록하는 일을 시작했다. 알고 보니 북극은, 비록 춥고 황량하지만 전세계 식물 종의 1%가 사는 무시할 수 없는 생태계였다. 지하에 1년 내내 얼음이 녹지 않는 영구동토가 있는 혹독한 곳이지만, 여기에 적응해 여러 해 땅 속에 숨어 있다 수줍게 꽃을 피우는 독특하고 작은 식물이 많이 있었다. 북극에는 사막과 돌밭, 초록색 풀로 완전히 덮인 초원까지 다양한 지형이 있다. 어디를 가나 시선을 낮추면 꽃을 찾을 수 있었다. “북극이라고 하면 빙하 위 흰 북극곰을 가장 먼저들 떠올리지만, 실은 꽃도 피고 동물도 사는 곳입니다.”

 

이 책임연구원은 이후 본래 연구와 별도로 개인 시간과 연구비를 들여 북극의 식물을 우리말로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 가운데 스발바르 지역의 식물 55종을 묶어 이달 10일 ‘한눈에 보는 스발바르 식물’이라는 도감으로 펴냈다. 한국어로 된 첫 스발바르 식물 도감이다.

 

북극 전문가이자 생물학자인 이유경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19일 인천 송도 극지연구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극지 연구는 북극에 영토를 갖지 않은 한국이 관련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송도=윤신영 기자
북극 전문가이자 생물학자인 이유경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19일 인천 송도 극지연구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극지 연구는 북극에 영토를 갖지 않은 한국이 관련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송도=윤신영 기자

일견 멀고 먼 북극, 그것도 눈에도 잘 띄지 않는 작고 여린 미생물과 식물을 연구하는 까닭을 물었다. “북극과 우리가 생각보다 가깝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북극의 기후변화는 중위도에 위치한 한반도의 기상 현상에 영향을 직접 미친다. 철새는 북극에서 여름을 난 뒤 한반도를 지나 남반구에 간다. 북극을 찾는 관광객도 점점 늘고 있다. 일부 식물은 백두산 등 고산에도 자란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북극이 기후변화 등 환경변화에 취약한 ‘광산의 카나리아’ 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때문이 북극의 기온 상승폭은 지구 평균의 2배가 넘습니다. 제가 처음 다산과학기지에 간 2003년 이후 인근 빙하는 200m나 녹아 후퇴했어요. 영구동토층이 녹으며 해안선이 무너져 내린 곳도 있고, 대기중의 이산화탄소가 녹으며 해양이 산성화돼 플랑크톤이 사라지고 먹이사슬이 흔들린 곳도 있습니다. 이런 변화가 안 그래도 종이 적은 단조로운 북극생태계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한국에 실질적인 도움도 된다. 2010년대 들어 북극은 국제사회의 가장 관심을 크게 모으고 있는 지역이 됐다. 기후변화로 북극 빙하 사이에 길이 나며 북극항로가 열렸다. 액화천연가스 등 자원도 발굴됐다. 춥고 버려진 땅으로만 생각했던 북극의 가치를 다시 보고 러시아, 덴마크, 캐나다 등 북극권 국가들이 앞다퉈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각국이 주도하는 북극 관련 회의가 쉴 틈 없이 연중 개최될 정도다.

 

여린 느낌의 북극식물 씨눈바위취. 사진제공 이유경
여린 느낌의 북극식물 씨눈바위취. 사진제공 이유경

중위도 국가인 한국은 북극에 영토가 없고, 북극과 관련한 논의에 목소리를 낼 자격이 없다. 유일하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과학 연구다. 다행히 북극을 대상으로 한 과학 연구는 기후와 생태, 해양과 지질 등 환경과 관련이 많다. 연구에 참여하기만 해도 지구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책임연구원은 “한국도 2013년부터 북극이사회에 옵서버 국가로 참여하고 관련 학술대회를 극지연에서 개최하며 교류를 늘리고 있다”며 “특히 북극은 지역에 오래 거주해 온 원주민의 의견이 중요한데, 과학연구를 하는 국가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꾸준함이다. 기후와 생태 분야의 특성상 단순해 보이지만 오래 지속해야 하는 연구가 한국에서는 푸대접이다 길어야 5년 남짓이면 같은 주제로는 국가연구과제를 수행하기 어렵다. 똑 같은 걸 왜 하냐는 반문이 꼭 나온다. “하지만 생태는 최소 20~30년 꾸준히 데이터를 축적해야 힘이 생겨요. 30년, 100년 꾸준히 데이터를 반복해서 매일 측정한 스웨덴 같은 국가들은 북극과 지구의 기후, 생태가 정말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데이터로 말합니다.”


이 책임연구원이 하나 더 꼽은 북극의 식물은 씨범꼬리다. 긴 줄기 끝에 작고 흰 꽃이 무더기로 핀다. 그런데 바로 아래에 자주색의 씨앗 같은 ‘무성아’가 달린다. 무성아는 땅에 떨어지면 씨앗처럼 새 개체로 자라는 기관이다.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을 둘 다 하는 것이다. 잎도 두 종류다. 씨범꼬리는 이 모든 꽃과 줄기를 몇 년이고 땅 속에 숨기고 기다리다 결국 꽃을 피우고 씨를 퍼뜨린다. 이 책임연구원은 “인고를 상징하는 식물이라 특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오래 인내해야 하는 꽃의 운명이 북극의 과학 연구와 언뜻 겹쳤다.

 

이유경 책임연구원이 또 하나 꼽은 식물인 씨범꼬리. 여러 해 동토 아래에 숨죽이고 있다 꽃을 피운다. 결과를 볼 때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는 북극 연구가 씨범꼬리의 운명을 닮았다. 사진제공 이유경
이유경 책임연구원이 또 하나 꼽은 식물인 씨범꼬리. 여러 해 동토 아래에 숨죽이고 있다 꽃을 피운다. 결과를 볼 때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는 북극 연구가 씨범꼬리의 운명을 닮았다. 사진제공 이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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