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보통과학자] 조 힌 치오,염색체와 매카시즘

2019.06.06 13:20

"숫자는 정말 우연히 찾게 된 거예요.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이 염색체 숫자를 48개로 생각해왔다는데 엄청 놀라긴 했죠" -조 힌 치오⁠


"치오, 미국에도 기회를 주세요. 우리 모두가 매카시즘에 빠진건 아니예요" 

-헤르만 뮬러 (초파리 유전학자, 노벨상 수상자⁠)

 


염색체 숫자의 미스테리

 

1956년, 인간유전학계엔 모두를 놀라게 한 논문 한 편이 발표된다⁠. '인간의 염색체 숫자'라는 간단한 제목의 이 논문은, 1956년까지 모두가 48개라고 철썩같이 믿던 인간 염색체의 숫자가 46개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논문의 제1저자는 조 힌 치오(Joe Hin Tjio), 제 2 저자는 알버트 레반(Albert Levan)으로 이들은 각각 스페인과 스웨덴에서 일하던 연구자들이었다. (논문 바로가기 https://onlinelibrary.wiley.com/doi/pdf/10.1111/j.1601-5223.1956.tb03010.x)

 

연구소에 걸린 '인간염색체 숫자'논문의 기념상패
연구소에 걸린 '인간염색체 숫자' 논문의 기념상패

인간 염색체 숫자가 48개로 정해진 건 1923년의 일로, 46개와 48개로 논란이 중이던 가설을 테오필루스 페인터가 논문을 통해 확정지었다⁠. 이 후, 인간 염색체 연구자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인간은 48개의 염색체가 있다고 믿게 된다. 이후 치오와 레반의 연구로 교정되기까지, 무려 33년 동안 과학자 모두가 인간 염색체 숫자를 48개로 알고 있었으니, 혹자는 이 사건을 과학계의 집단환각 사건으로 비하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현장 과학자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첫째, 페인터는 거짓 보고를 한게 아니다. 그는 1923년까지 인간 세포핵의 분열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최선의 해상도와 세포고정기법으로 분열하는 고환 조직을 관찰했고, 처음엔 46개와 48개 모두에 가능성을 두고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인간 염색체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려 하자, 염색체 숫자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면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할 수 없다는걸 깨닫고,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모두 종합해 48개로 발표했다.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인간 염색체 숫자가 48개라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둘째, 과학적 발견은 기술의 발전에 의해 제한된다. 페인터의 세포고정기법은 지금처럼 정교하지 않았다. 훗날 그의 염색체 그림을 본 치오는, 이런 낮은 해상도의 그림으로 염색체 숫자를 거의 근사하게 맞춘 페인터의 공을 높이 샀다고 한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페인터가 사용한 세포고정기법으로는 가장 커다란 1번염색체가 동원체를 중심으로 둘로 찢겨 나가는걸 방지하기 어려웠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가 대부분이었고, 가끔은 1번염색체가 쪼개지지 않은 상태로 남았기 때문에 숫자가 46과 48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치오와 레반의 시대엔, 염색체를 염색하는 기법은 물론 식물에서 유래된 물질로 세포분열중인 염색체를 고정시키는 기법도 개발된 상태였다. 즉, 페인터의 시대에 염색체 숫자 48개는 실험기법의 제한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발표였을 뿐이다. 그런 일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과학은 언제나 오류를 수정하고 있다.

페인터가 인간 염색체의 숫자를 48개라고 확정할 때 참고했던 그림. (오른쪽)1956년 인간 염색체의 숫자가 46개임을 확정할 때 사용된 그림. 세포 고정 기법과 염색 기법, 그리고 해상도에서 큰 진전이 있었음이 보인다.
(왼쪽) 페인터가 인간 염색체의 숫자를 48개라고 확정할 때 참고했던 그림. 1956년 인간 염색체의 숫자가 46개임을 확정할 때 사용된 그림. 세포 고정 기법과 염색 기법, 그리고 해상도에서 큰 진전이 있었음이 보인다.

셋째, 더 놀라운 사실은 33년 동안 그 어느 인간유전학 연구자도, 염색체의 숫자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과학자들의 문제풀이가 교과서에 기술된 것처럼 정합적인 발전과정을 따르지 않고, 무정부주의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준다. 즉, 치오와 레반의 발견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인간유전학 연구자들이 인간염색체 숫자가 중요하지 않은 연구에 집착하고 있었다. 초파리 유전학자들은 염색체에 새겨진 띠의 패턴을 연구해서 유전자를 염색체 상에 배열하고 있었고, 인간 유전학은 초파리 유전학에 비하면 최첨단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렇게 많은 연구자가 연구하고 있지도 않았다⁠.

 
염색체 숫자를 33년동안 48개로 알고 지낸건, 최초 발견자의 잘못도, 연구공동체의 잘못도 아니다. 그건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의 일부를 보여주는 사건일 뿐이다. 

 


식민지에서 차별, 그리고 매카시즘까지

 

미국 국립보건원에 합류해 연구할 당시의 조 힌 치오. NIH
미국 국립보건원에 합류해 연구할 당시의 조 힌 치오. NIH

1956년 논문의 제1저자 치오는, 1919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태어났다. 근대 인도네시아의 역사는 제국의 식민지로 점철되어 있다. 현재의 인도네시아 군도는 포르투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그리고 일본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다. 처음엔 대항해시대를 열던 포르투칼이 인도네시아 북부를 점령하고 각종 향신료를 헐값에 본국으로 보내고, 천주교를 전파했다. 이후 네덜란드가 16세기 후반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그 유명한 동인도회사를 설립,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가 된다. 18세기말, 동인도회사가 파산하고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패하면서 인도네시아의 주인은 프랑스가 되었다가, 경쟁자인 영국과의 전쟁으로 잠시 영국의 지배가 끝난후, 1942년 일본의 침략이 있기 전까지 다시 인도네시아의 주인은 네덜란드가 된다. 20세기 초가 되면 인도네시아에도 수카르노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일본의 패망 이후 다시 인도네시아를 노리던 네덜란드에 의해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네덜란드는 독일에게 나라를 빼았긴 경험이 있었지만, 20세기 중반 인도네시아를 재침략하며 잔인한 제국주의의 만행을 보여주었다. 


치오는 인도네시아가 아직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시기에 태어나 아버지에게 아버지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학교에서는 몇 가지 언어와 농학을 배웠다. 그는 자바섬의 감자 작물학자로 취업해서 식물 세포학을 연구하다가 1942년 일본이 자바섬을 침공했을 때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3년의 옥중 생활을 보내던 와중에, 일본의 패망으로 2차세계대전이 끝났고, 그는 난민 자격으로 네덜란드로 출국한다. 몇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그는,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고, 당장 코펜하겐에 있는 왕립네덜란드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연구자로서 놀라운 능력을 갖춘 이 인도네시아 출신의 학생은, 스웨덴 룬트 대학에서 연구하던 레반을 만나 교류를 시작했다. 이 후 그는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레반과 공동연구를 시작했고, 1955년 겨울이 되면, 1956년 논문의 기본이 되는 결과들을 대부분 혼자 만들었다.

 

치오가 인간염색체 숫자가 46개라는걸 발견하던 시기에, 레반은 휴가 중이었고 나중에 돌아와 치오의 발견을 보며 이 결과가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전까지 치오와의 공동연구에서 제1저자는 언제나 치오, 교신저자는 레반이 맞는게 대부분이었다. 왜냐하면 언제나 실험의 대부분을 치오가 담당했고, 레반은 대부분의 경우 연구재료 등을 제공하는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6년의 레반은 달랐다. 그는 치오에게 집요하게 제1저자를 요구했으며, 이에 분노한 치오는 연구한 샘플을 모두 치워버리고, 레반에게 직접 실험을 해서 밝혀보라고 말했다. 아내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치오와 레반은 이 논문을 발표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20세기 중반의 유럽으로 돌아가, 인도네시아 출신의 박사학위도 없는 연구원과, 스웨덴 대학의 교수 사이에 존재하던 권력의 차이를 상상해보면, 레반이 얼마나 치오를 이용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염색체 숫자 46의 발견은 전적으로 치오의 공이다.

 

1956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인간유전학회에서 발표 중인 치오. (오른쪽) 알버트 레반. Victor McKusick(cc)/University of Lund
1956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인간유전학회에서 발표 중인 치오. (오른쪽) 알버트 레반. Victor McKusick(cc)/University of Lund

식민지 출신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오가며 살아야 했던 치오의 평범하지 않은 여정이, 염색체 숫자 48에 도전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치오는 분명 자신의 연구가 지속적으로 숫자 46을 말해줄 때도, 페인터의 1923년 논문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연구결과를 신뢰했고,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운도 좋았다. 그가 만든 인간 고환의 세포분열 조직 샘플은, 당시까지 존재하던 샘플 중 가장 해상도가 좋았고, 그는 당시 발전하던 다양한 세포생물학의 기법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여러가지 요인들이 1956년 기념비 적인 논문에 얽힌 작은 이야기다.


치오의 능력을 알아본건 당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던 미국의 과학자들이었다. 1956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인간유전학회에서, 레반과 치오의 연구가 발표된다. 페인터와 친분이 있던 초파리 유전학자 뮬러는 치오와 레반의 발견에 감명을 받아, 치오에게 미국행을 권한다. 하지만 치오는 당시 노벨상을 수상하고 엄청난 유명세를 떨치던 뮬러의 제안을 거부한다. 미국에선 매카시즘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들 나라엔 매카시즘이 유행한다고 들었어요. 나는 인도네시아 감옥에서의 고문과 고통을 기억합니다. 나는 그런 나라에 가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말했다. 1950~1954년까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면 미국 전역의 광기가 매카시즘이다. 매카시즘은 다양한 직종의 인물들을 피해자로 만들었지만, 과학자들도 곤욕을 치러야 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조지프 니덤 등의 과학자도 공산주의자로 의심받던 시절이었다.


한때 러시아에서 초파리 유전학을 가르치다 리센코 논쟁에 휩쌓여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경험이 있던 멀러는, 대공황을 겪으며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고, 그의 실험실에 소련 출신의 과학자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당시에는 불법이었던 학생들의 좌파신문 스파크(The Spark)를 배포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을 정도로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치오에게 뉴욕타임즈의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적인 글들을 오려 보내는 등의 노력으로 치오를 미국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한다. 이후 치오는 테오도르 퍽이라는 교수와 함께 연구를 거듭해, 다시 한번 염색체 숫자를 다시 확인하고, 여러 연구성과를 내 1959년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 업적을 인정받아 그는 이후 미국립보건성 NIH로 건너가 평생을 거기서 연구자로 보냈고, 1962년엔 케네디 대통령이 수여하는 과학상을 수상한다.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과학상을 수여받고 있다. NIH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과학상을 수여받고 있다. NIH

 

인간염색체 질환의 발견을 이끌다

 

염색체의 숫자가 밝혀진 1956년이 지나고 1959년이 되자, 다운 신드롬, 다운 신드롬, 터너 증후군, 클라인펠터 증후군 XXX 여성, XYY 남성 등등의 인간염색체 이상에 의한 질환들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한다. 이 발견들은 모두 치오의 논문에 빚지고 있다. 이후 의학세포학이라 불리는 분야가 탄생했고, 태아의 염색체 이상을 검사하는 양수 천자 amniocentesis가 1960년대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염색체에서 보이는 이상현상은, 이른 시기 태아의 유전질환을 조사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인간 유전자를 각각의 염색체에 지도화하는 일도 치오의 작업들 덕분에 가능했다. 그는 이후 암에서 나타나는 염색체 이상을 연구해 많은 업적을 내고, 미국립보건원에서 은퇴한다.


1956년엔 아무도 인간 염색체 갯수에 관심이 없었다. 유전학의 발전에서 염색체 숫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효모 유전학이 빠르게 발전하던 시기를 지나 1985년이 되어야, 효모의 염색체 갯수가 결정되기도 했다. 혹자는 말한다. 만약 치오의 발견이 없었다면, 인간 염색체의 갯수는 인간유전체프로젝트 이후에야 결정되었을지 모른다고.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NIH제공
NIH제공

 

참고자료

 

- McManus, Rich (1997-02-11), "Photographer, Prisoner, Polyglot: NIDDK's Tjio Ends Distinguished Scientific Career", The NIH Record, 46 (3),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1-07-21, retrieved 2011-08-03
- McManus, Rich (1997-02-11), "Photographer, Prisoner, Polyglot: NIDDK's Tjio Ends Distinguished Scientific Career", The NIH Record, 46 (3),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1-07-21, retrieved 2011-08-03
-1956 Joe Hin Tjio and Albert Levan Tjio, J. H. Levan, A. (1956). The chromosome number of man. Hereditas, 42(1-2), 1-6.
- T. S. Studies in mammalian spermatogenesis. II. The spermatogenesis of man. J. Exp. Zool. 37, 291-336 (1923).
- Painter, T. S. (1921). The Y-chromosome in mammals. Science, 53(1378), 503-504.
- Gartler, S. M. (2006). The chromosome number in humans: a brief history. Nature Reviews Genetics, 7(8), 655.

 

※필자소개

우재.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생물학과에 진학했으나, 간절히 원하던 동물행동학자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고, 바이러스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을 연구했다. 초파리 수컷의 교미시간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모두가 무시하는 이 기초연구가 인간의 시간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닌다.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 타운랩을 준비 중이다. 최근 초파리 유전학자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책 《플라이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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