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 혀의 진화 래퍼의 탄생

2019.05.19 06:00

케이블 음악방송 엠넷에서 최근 종영한 ‘고등래퍼3’에서 우승을 차지한 고등학교 1학년 이영지 양의 랩 ‘고 하이(GO HIGH)’는 욕설과 도발 대신 철학적이고 자기성찰적인 가사를 읊조리듯 내뱉는다. 3월 말부터 방영 중인 올리브 방송의 ‘노포래퍼’는 유명 래퍼들이 오래된 노포(老鋪·대를 이어 운영되는 점포)를 찾아 장인들과 교감을 나누고, EBS는 지난해 10월부터 기성세대의 강의를 듣고 느낀 점을 랩으로 표현하는 ‘배워서 남줄랩 시즌2’를 방영 중이다. 랩이 자기 표현의 창구가 된 시대. 그 원동력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혀다.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기관에서 의사소통의 핵심 기관이 되기까지, 혀는 진화를 거듭했다.

 

혀를 정복하려는 사람들 

 

3월 29일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과 합정역의 중간쯤 위치한 지하 공연장 ‘스테이라운지’. 이날은 대학 동아리의 랩 공연이 열리는 날이었다. 오랜 라이벌인 고려대와 연세대, 이공계를 대표하는 KAIST와 포스텍, 한국의 현재 수도와 과거 수도의 대결 구도를 가진 서울대와 한양대까지 6개 학교가 참여했다. “오늘은 모든 것을 잊고 놀게요!” 공연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100여 명의 관중들은 비트에 몸을 맡긴 채 공연에 빨려 들어갔다.

 

10대 감정과 생각 표출하는 랩

 

이날 랩 공연은 영상 전문 크루 ‘원더우드’의 주최로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4시간이나 이어졌다. ‘핫’하다는 6개 대학의 랩 동아리들이 대결 구도를 버리고 연합 공연을 한 건 이날이 처음. 관중의 호응도 뜨거웠다.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어깨를 갖다 대며 스왜그(swag) 넘치는 인사를 나누는가 하면, 흘러나오는 비트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이날 공연에 참가한 KAIST 흑인음악동아리 ‘구토스(Ghutto’s)’를 이끌고 있는 장재현 씨(바이오및뇌공학과 2학년)는 “학교 밖 연합 공연은 이번이 처음인데, 더 활성화되기를 바란다”며 “이번 공연 경험을 발판 삼아 올해 가을 KAIST에서 진행하는 포스텍과의 랩 배틀도 잘 준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12년 ‘쇼미더머니’, 2015년 ‘언프리티 랩스타’ 등 래퍼들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TV에서 인기를 끌면서 랩은 최근 케이팝에서 젊은 세대의 정서를 담아내는 대표적인 장르가 됐다. 얼마 전까지 10대를 내세운 ‘고등 래퍼’가 방영됐고, 최근에는 빌보드 차트 진출을 목표로경연을 통해 래퍼를 가리는 ‘킬빌’도 방영 중이다. 


1990년대 이전 록이 젊은 세대의 메시지를 담았다면, 지금은 랩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2013년 ‘가왕’ 조용필이 10년 만에 정규 앨범 19집을 발표했을 때 타이틀 곡 ‘헬로’에는 래퍼 버벌진트의 빠른 랩이 들어갔다. 올해 1월 발표한 가수 이소라의 ‘신청곡’에는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 슈가의 말하는 듯한 랩이 들어가 히트를 쳤다.   


특히 랩은 10대의 감정과 생각을 표출하는 대표적인 수단이 됐다. 경기 의정부고 랩동아리 ‘리버브’에서 활동 중인 조윤호 군(17)은 “랩은 제 인생사를 늘어놓은 소설”이라며 “어떤 음악보다도 랩은 나라는 사람, 내가 경험하는 세상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랩을 한다는 것은 간단히 두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다양한 비트(리듬)에 맞춰 자신의 생각을 써내려간 벌스(가사)를 준비한다. 이를 뇌에 입력한 뒤 ‘최고의 악기’인 혀를 이용해 관객에게 잘 전달하면 된다. 조 군은 “같은 비트여도 나만의 벌스와 비트를 입혀 노래하면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랩이 된다”며 “사람들이 내 랩을 좋아해줄 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400
 

보랏빛 조명이 감싼 공연장을 뒤로하고 대학생들의 실제 랩 연습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2014년부터 매해 가을 각 학교의 대표 래퍼를 뽑아 유튜브에 올리는 영상을 통한 디스 랩 배틀로 유명한 연세대 흑인음악동아리 ‘알와이유(RYU)’와 고려대 ‘테라(TERRA)’로 정했다.  


4월 4일 목요일 오후 연세대 신촌캠퍼스 교육과학관 4층의 한 강의실. RYU의 정기 연습이 진행 중이었다. 동아리 방이 따로 없어 빈 강의실을 연습장으로 쓰고 있었다.


송재호 RYU 회장(계량위험관리학과 2학년)은 “오늘은 3명씩 팀을 나눠 팀별로 비트를 지정해줬다”며 “팀마다 준비한 벌스를 이어 붙여 짧은 공연을 하면서 평가하는 방식으로 연습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1년에 만들어진 RYU는 연세대 동아리 중에서도 인기가 많다. 올해도 신입생이 많이 몰렸다. 매년 랩팀과 비트팀, 랩을 듣고 평가하는 리스너로 나눠 회원을 선발한다. 올해는 38명이 새로운 회원이 됐다. 


강영욱 씨(화공생명공학과 1학년)는 “2012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유명 래퍼 에미넴의 스타일이 바뀌었다”며 “다소 화난 듯 세상에 대해 랩을 늘어놓는 에미넴에 반해 랩을 할 방법을 찾다가 RYU에 가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RYU 전체 회원은 50명가량이다. 


고려대와의 랩 배틀에 나가 호응을 얻으면 학내에서는 연예인 수준으로 유명해지기도 한다. 송 회장은 “RYU 출신으로 지난해 고려대와의 랩 배틀에 나가 인기를 끈 정승환 회원은 래퍼 ‘씨세(CISSE)’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며 “최근에는 ‘라프삼두’로 래퍼 활동명을 바꾸고 회사와 음반 계약도 진행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달라져야지, 달라져야지, 마음속으로 외치면 뭐가 달라지겠니. 행동해야지, 행동해야지.”
“그래 나 랩할 체력은 있어, 군대 공익이긴 하지만.”


이날 연습을 위해 써온 대학생 아마추어 래퍼들의 벌스는 기자의 귀에도 쏙쏙 들어왔다. 송 회장은 “2학년 학생 중 각종 공연과 연습에서 많은 회원의 지지를 받은 사람을 고려대와의 랩 배틀에 출전시킨다”며 “이 대결의 래퍼로 뽑히는 것은 RYU에서 활동하는 학생들에게는 학창시절 단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는 큰 사건”이라고 말했다. 


올해 고려대와의 대결에 출전할 회원은 공연과 연습 프로젝트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3명으로 결정된다. 후보군은 가을이 되기 전 어느 정도 결정된다. 이수민 씨(의류환경학과 2학년)는 “랩을 좋아하지만 처음에는 랩을 잘 못하고 자신도 없어서 랩을 듣고 평가하는 역할인 리스너로 RYU 활동을 시작했다”며 “지금은 ‘노래하는 리스너’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노력하면 누구라도 랩을 즐길 수 있고 큰 공연에도 나갈 수 있다고. 


송 회장은 “가사를 잘 쓰고, 박자감도 좋고, 이를 랩으로 잘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력이 기본”이라며 “자신만의 랩 스타일을 만든 회원을 출전시켜 올해는 고려대와의 랩 배틀에서 꼭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 


RYU 부회장인 박신욱 씨(사회정의리더십과 2학년)는 “올해 고려대와의 랩 배틀에 선발되도록 열심히 할 계획”이라며 “앞으로도 래퍼로 성장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의지를 드러냈다.

 

 

RYU를 만나고 일주일 뒤인 4월 11일, 이번에는 고려대 안암캠퍼스를 찾았다. 고려대 랩 동아리 TERRA는 학생회관 내 동아리방 이외에도 세미나실을 하나 더 빌려 두 곳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세대 RYU와 같은 해에 생긴 TERRA에는 현재 랩팀(12명), 싱잉랩팀(10명), 비트프로듀서(4명)에 속한 총 26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학기마다 팀별 회원을 따로 모집한다. 랩팀이나 싱잉랩팀에 뽑히려면 지정 비트와 자유 비트에 맞춰 한 벌스로 랩을 하는 오디션을 봐야 한다. 비트프로듀서팀은 직접 만든 비트 3개를 제출해 통과해야 회원이 될 수 있다. 


김대희 TERRA 회장(식품자원경제학과 2학년)은 “TERRA는 대학 동아리이지만 분야별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는 게 특징”이라며 “프로듀서팀과 일반 랩팀, 좀 더 노래하듯 벌스를 던지는 싱잉랩팀 등 연습도 분야별로 나눠서 진행한다”고 말했다. 


TERRA도 연세대와의 랩 배틀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김 회장은 “연세대와의 ‘디스 랩 배틀’과 대학 축제인 ‘입실렌티’의 무대에 서는 것이 TERRA 회원으로서는 큰 자부심”이라며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축제 무대를 위해 오늘도 연습을 예정대로 진행했다”고 말했다. 


TERRA는 최소 한 학기 이상 회원으로 활동하면 무대의 크기에 관계없이 공연에 참가할 자격을 주고 있다. 공연에 참가하고 싶으면 신청을 한 뒤 자유 비트와 지정 비트 하나씩에 맞춰 오디션을 진행한다. 최종 진출자는 모든 회원이 참여하는 비밀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지난해 디스 랩 배틀에서 ‘HUTA’란 별칭으로 활약한 TERRA 랩팀장 신준택 씨(경영학과 2학년)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TERRA 회원들은 계속 성장하고 있다”며 “올해도 멋진 곡을 담은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연세대와의 랩 배틀에서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신 씨는 랩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마이크만 하나 쥐고 무대를 휘어잡는 래퍼를 동경해왔다”며 “래퍼의 벌스와 행동에서 묻어나는 분위기를 내 스타일로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저 사람은 어떤 랩을 하는 사람이야’라는 얘기가 나올 수 있도록 누군가의 뇌리에 각인될 수 있는 랩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빈지노 같은 래퍼는 한국 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며 “더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도구로 랩이 자리 잡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때 꾸는 꿈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제 전부를 걸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랩의 매력에 빠져 현재 래퍼의 길을 걷고 있는 김동연 씨(23)를 만났다. 김 씨는 경기 의정부시 가능동 주변의 한 건물 지하에 연습실을 꾸리고 녹음을 하며 무명 래퍼들의 음원 사이트인 ‘사운드클라우드’에서 ‘Kite(카이트)97’이란 이름으로 곡을 올리고 있다.


김 씨는 “래퍼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은 ‘쇼미더머니’와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주목받는 것”이라며 “홍대 공연장을 돌며 인맥을 쌓거나 열심히 음악을 만들어 올리면서 프로듀서에게 발탁돼 래퍼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색 졸업사진으로 유명한 의정부고의 랩동아리 ‘리버브’ 창립 멤버이자 리더다. 리버브를 이끌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래퍼의 길에 뛰어 들었다. 지금까지도 김 씨는 리버브 회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그를 만난 4월 6일 의정부고에 재학 중인 리버브 회원 중 1명을 제외한 13명이 그의 요청에 한 달음에 달려왔다.


김 씨는 “랩을 좋아하는 동생들과 1년에 한 번씩 의정부시 로데오거리에서 무대를 열고 있다”며 “래퍼로 성공한다면 더 많은 학생들이 랩을 즐길 수 있도록 알리는 일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의정부시에서 운영하는 중학생 진로특강과 서울 강서구의 한 중학교 랩 동아리 강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랩에 대한 강의도 하고 있다. 흑인음악에서 태동한 랩의 종류와 한국의 래퍼들을 소개하고, 학생들에게 랩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랩에도 타고난 ‘영재’가 있을까. 김 씨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 번 들은 말을 줄줄이 외울 수도 있고 박자감도 타고 날 수는 있다”면서도 “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만의 벌스를 쓰고 이를 말로 잘 소화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랩은 래퍼가 살면서 느끼는 자신만의 시선을 벌스에 담아야 하고, 이를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이 뒷받침돼야 한다. 김 씨는 빈지노와 도끼를 가장 좋아한다. 그들은 이미 있던 장르의 랩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보여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래퍼로 평가 받는다. 


김 씨는 “지금도 래퍼로서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처음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랩을 너무 못 했다”며 “연습을 통해 더욱 나은 랩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앞으로 계속 래퍼의 길을 갈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원 없이 랩을 할 것”이라며 의지를 드러냈다.    


지금까지 만난 래퍼들이 랩에 빠진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연세대 RYU 회원인 정민영 군(의예과 2학년)은 “랩을 하는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으면 된다”며 “자신의 스타일을 자신감 있게 살릴 수 있다면 랩을 하면서 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리버브 회원인 황의찬 군(의정부고 3학년)은 “선생님들은 래퍼의 길이 어렵다며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래퍼의 길을 걸어가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400개 근육의 최종 지휘자, 

 

사람마다 혀의 움직임을 수행하는 능력에 차이가 있다. 학계에선 이런 차이가 유전적인 영향에서 비롯되지만 훈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동아 제공
사람마다 혀의 움직임을 수행하는 능력에 차이가 있다. 학계에선 이런 차이가 유전적인 영향에서 비롯되지만 훈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동아 제공

래퍼부터 성악가까지 모든 가수는 관객에게 노랫말을 전달한다. 성대가 만든 소리를 노랫말로 바꾸려면 복부부터 얼굴까지 400여 개의 근육을 움직여 소리의 공명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 근육의 움직임을 최종적으로 조율해 발음을 만들어내는 기관이 바로 혀다. 혀가 만든 길을 따라 공기가 흐르고 이들 공기의 흐름이 입술을 통해 바깥으로 나오면 비로소 말이 완성된다. 혀가 지휘하는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랩 스타일이 결정되는 셈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 밴쿠버로 간 박신욱 씨(연세대 사회정의리더십과 2학년)는 고등학교 때까지 학창시절을 외국에서 보냈다.


박 씨가 캐나다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한국으로 온 것은 한국의 랩과 젊은이들의 문화에 매료돼서다. 래퍼 빈지노, 도끼, 스윙스의 랩을 듣고 이들의 벌스와 그 분위기에 반한 박 씨는 연세대에 입학한 뒤 흑인음악동아리 ‘RYU(알와이유)’에 가입해 아마추어 래퍼의 길에 들어섰다. 

 

래퍼 빈지노 따라할 수 있나

 

아마추어 래퍼 박신욱 씨의 말하는 습관을 알기 위해 주어진 글을 읽게 한 뒤 음의 변화를 보는 음향햑적 검사를 실시했다. 성문의 압력 검사도 진행했다. 사진 남윤중
아마추어 래퍼 박신욱 씨의 말하는 습관을 알기 위해 주어진 글을 읽게 한 뒤 음의 변화를 보는 음향햑적 검사를 실시했다. 성문의 압력 검사도 진행했다. 사진 남윤중

4월 12일 박 씨와 함께 서울 강남구 예송이비인후과 음성센터를 찾았다. 좋은 래퍼가 되기 위한 과학적인 조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예송이비인후과는 2006년 국내 최초로 목소리 검진센터를 열고 혀와 성대의 상태를 검사하고 치료해왔다.


이날 박 씨는 약 40분 간 음향학적 검사와 폐활량 검사, 성대 내시경, 성문 압력 검사 등을 포함한 ‘음성종합검진’을 받았다. 


검사를 진행한 장진은 예송이비인후과 음성언어치료사는 박 씨를 컴퓨터가 있는 의자 앞으로 안내했다. 장 치료사는 랩을 하거나 말을 할 때 불편한 점을 묻는 질문을 시작으로 박 씨에게 다양한 질문을 쏟아 냈다. 박 씨가 “랩을 할 때 호흡이 버거운 경우가 있다”고 하자 장 치료사는 박 씨의 평소 말 하는 습관과 폐활량을 통한 발성량부터 체크했다. 


우선 ‘아’ 하는 소리를 각각 5초, 10초 간격으로 내뱉게 했다. 이어서 약 10줄에 이르는 글을 소리 내 읽게 했다. 박 씨가 이를 읽자 센서를 통해 컴퓨터에 입력된 박 씨의 음성 데이터는 파형으로 바뀌어 기록됐다. 


호흡량을 검사하기 위해 숨을 크게 마신 뒤 한 번에 ‘후~’ 하고 내뱉는 동작도 세 번 반복했다. 최대발성량을 확인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아’ 소리가 갈라져 끊어질 때까지 내뱉게도 했다. 박 씨는 최장 25초간 ‘아’ 소리를 이어갔다. 이후 ‘파’ 소리를 5번 연달아 내게 해 성대 압력을 측정했고, 성대 내시경 검사도 했다. 


김형태 예송이비인후과 음성센터 대표원장(가톨릭대 의대 이비인후과학교실 외래교수)은 박 씨의 검진 결과를 받아 들고 성대의 구조와 기능부터 판독했다. 

 

김형태 예송이비인후과 음성센터 대표원장이 내시경을 이용ㅇ해 박 씨의 성대 상태를 관찰하고 있다. 최근에는 초고속성대촬영검사를 통해 미세한  성대의 떨림을 촬영해  음의 변화도 관찰하고 있다. 사진 남윤중
김형태 예송이비인후과 음성센터 대표원장이 내시경을 이용ㅇ해 박 씨의 성대 상태를 관찰하고 있다. 최근에는 초고속성대촬영검사를 통해 미세한 성대의 떨림을 촬영해 음의 변화도 관찰하고 있다. 사진 남윤중

김 원장은 “성대를 보면 아래가 살짝 헐어 있고, 성대가 닫혀야 할 때 끝이 조금 열려 있다”며 “자신의 호흡량으로 소화하기 버거운 랩을 할 때 공기와 함께 동시에 말을 뱉어내는 습관 때문에 성대에 일부 이상이 생긴 것 같다”고 추정했다. 호흡량 자체는 평균 이상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얘기를 담고자 가사를 너무 길게 노래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김 원장은 “성대 이상은 당장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본인의 호흡량이나 성대 구조에 적합한 스타일의 랩을 찾아야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 씨가 좋아하는 래퍼 빈지노는 빠른 랩이나 분위기 있는 랩 등 모든 종류의 랩을 잘 소화하는 수준급 래퍼로 평가 받는다. 박 씨도 다양한 종류의 랩을 소화하기 위해 최근 빠르고 강한 랩 스타일을 연습했다. 


김 원장은 “다양한 랩을 시도하는 것은 좋다”면서도 “사람마다 말을 할 때 나타나는 근육의 반응이 다른 만큼 근육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연습하면 오히려 성대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박 씨의 경우 현재 성대 결절이 일부 나타난 만큼 이를 치료한 뒤 자신의 호흡량에 맞는 벌스를 작성해 적당한 비트의 랩을 시도하는 게 좋다는 진단을 받았다. 또 빠른 랩은 흉식호흡과 복식호흡을 익혀 호흡량과 발성량을 늘린 뒤에 시도해야 혀와 근육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는 조언도 들었다.  

 

400개 근육 중 가장 중요한 8개 근육

 

랩이나 노래를 할 때 가슴부터 얼굴까지 분포하는 근육을 모두 사용하게 된다. 19개 대표 근육부위에 전극을 달아 긴장도를 파형으로 보는 ′발성역학다차원측정법′을 사용하면 노래할 때 나타나는 습관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남윤중
랩이나 노래를 할 때 가슴부터 얼굴까지 분포하는 근육을 모두 사용하게 된다. 19개 대표 근육부위에 전극을 달아 긴장도를 파형으로 보는 '발성역학다차원측정법'을 사용하면 노래할 때 나타나는 습관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남윤중

해부학적으로 본인에게 적합한 랩 스타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발성역학적다차원측정법’이라는 더욱 정교한 검사를 받을 수도 있다. 예송이비인후과는 2005년 신체 근육 측정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얼굴과 턱, 목, 복부, 흉부 등의 근육이 있는 부위에 전극 19개를 붙이고 노래할 때 근육 긴장도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2~3곡을 부르는 동안 근육이 수축되고 이완되는 정도가 전극을 통해 측정되고, 이를 파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김 원장은 “특정한 발음을 한다고 생각하면 우리 뇌는 즉각적으로 여기에 필요한 근육을 작동시킨다”며 “배부터 얼굴까지 분포하는 약 400개의 근육이 상호작용해 후두에서 입까지의 공간이 변하고, 이를 통해 발음이 만들어 진다”고 설명했다. 

 

음성을 내기 위해 움직이는 400여 개 근육들 중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8개의 대표 근육으로 이뤄진 혀다. 김 원장은 “후두에서 나온 공기는 성도 내에 위치하는데, 이때 성도 내의 공기 진동을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 혀”라며 “특히 가사가 많은 랩의 경우 혀 근육에 문제가 생기면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혀는 우리 몸에서 가장 자유로운 근육에 해당한다. 다른 근육들은 뼈나 인대에 양쪽 끝이 고정된 상태여서 움직임에 제약을 받지만, 혀 근육은 한쪽 끝만 고정돼 있다. 덕분에 연습을 통해 근육의 움직임을 새롭게 추가할 수 있다. 


김 원장은 “일본인은 한국어에만 있는 ‘의’나 ‘외’ 같은 발음을 할 수 없는데, 이는 혀 근육이 이런 발음에 필요한 동작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일본인도 연습하면 이런 발음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다른 근육의 움직임까지 자연스럽게 구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처음 외국어를 배울 때 어눌하게 발음을 하는 이유도 근육의 훈련이 덜 됐기 때문이다.


발음이 근육의 훈련과 관련이 있다면 랩은 어릴 때부터 하는 게 좋을까. 최근 ‘중등 래퍼’와 ‘고등 래퍼’의 등장도 이와 관계된 것은 아닐까. 김 원장은 “조기 랩 교육은 언어를 자연스럽게 내뱉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어릴 때부터 근육 훈련을 통해 향후 자신만의 스타일로 언어를 소화해 발음하는 래퍼가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성악의 경우 조기 교육은 오히려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김 원장은 “구강 내 성도가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악 발성을 위해 근육을 움직이면 공명을 만드는 습관이 잘못 자리 잡을 수 있다”며 “성인이 됐을 때의 성도에는 어릴 때 형성한 근육의 움직임이 맞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MRI로 혀 움직임 실시간 확인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연구팀은 래퍼나 비트박서의 현란한 혀 기술의 비밀을 실시간 자기공명영상(MRI) 기술을 통해 확인했다. 사진은 연구팀이 실시간 MRI 기술로 촬영한 비트박서의 구강 내 근육의 움직임. USC 제공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연구팀은 래퍼나 비트박서의 현란한 혀 기술의 비밀을 실시간 자기공명영상(MRI) 기술을 통해 확인했다. 사진은 연구팀이 실시간 MRI 기술로 촬영한 비트박서의 구강 내 근육의 움직임. USC 제공

전문 보컬 트레이너나 성악과 교수는 노래하는 모습만 보고도 ‘왼쪽 어깨를 들라’거나 ‘혀를 입천장에 더 붙이고 소리를 내라’는 등 조언을 한다. 경험을 통해 소리를 내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그간 근육의 움직임을 확인해 구강 내에서 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며 “최근 ‘실시간 자기공명영상(real time MRI)’ 기법이 발전하면서 혀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실시간 자기공명영상 기법은 MRI를 이용한 인체 촬영 이미지를 영상으로 확보하는 기술이다. 지금까지는 심장의 움직임을 보는 데 주로 활용됐지만, 최근 음향 연구에도 이 기법이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2018년 11월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열린 제176회 ‘미국음향학회(ASA)’ 연례회의에서 티모시 그리어 서던캘리포니아대 박사과정 연구원은 “비트박스를 하는 사람(비트박서)의 구강 구조를 실시간 자기공명영상 기술로 관측한 결과 소리가 생성될 때 성도 내 공간에서 나타나는 구조적인 변화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가령 비트박서들은 스네어 드럼(뒷면에 쇠 울림줄을 댄 작은 북) 소리를 따라할 때, 방출음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출음은 구강 내 압력을 높인 뒤 공기의 출입을 막은 곳을 열어서 내는 소리다. 그런데 연구팀은 일부 비트박서는 방출음 없이도 스네어 드럼 소리를 재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팀은 이런 변화를 분석해 혀와 입천장 등 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관여하는 다양한 신체 부위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했고, 비트박서를 포함해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 음악가의 발성을 조사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원장은 “실시간 MRI 기술이 아직 목소리를 시각화하는 수준은 아니다”라며 “향후 구강 내부의 움직임에 대한 데이터가 계속 축적되면 래퍼가 랩을 하는 동안 자신의 혀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실력을 늘리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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