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통신 기술의 주연은 기업, ETRI는 명품 조연 역할하겠다”

2019.04.24 15:07
김명준 ETRI 신임 원장은 24일 경기 과천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ETRI가 시대에 맞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윤신영 기자
김명준 ETRI 신임 원장은 24일 경기 과천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ETRI가 시대에 맞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윤신영 기자

“맛깔나는 드라마가 되려면 잘생긴 주연 말고 감초 역할을 하는 조연이 중요하다. 주연만 있는 드라마는 얼마나 지루하겠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최불암 씨나 김수미 씨 같은 역할로 남우·여우 조연상을 노리겠다.”

 

김명준 ETRI 신임 원장은 24일 경기 과천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이제 (전자·통신 분야) 연구를 훨씬 잘 알고 잘 하는 기관은 기업”이라며 “과거 ETRI가 기술 불모지였던 한국에 서양 기전자통신기술을 ‘역공학’ 방법을 통해 들여온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면, 이제는 바뀐 시대에 걸맞는 조연으로서 활약할 때”라고 재치있게 설명했다.

김 원장은 정통 ETRI맨이다. 처음 연구소에 입사한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기술 발전과 함께 해온 ETRI 연구성과를 줄줄이 꿰고 있다. 그는 “처음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 1980년대에는 서양 기술의 국산화라는 ‘역할’이 분명했다”며 “완성품을 뜯어보며 다시 만드는, 좋게 말하면 역공학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직접 제품을 뜯어가면서 흉내 냈는데, 이후에는 표준이 생겨 표준을 바탕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표준이 나온 뒤면 이미 2~3년 지난 것을 우리가 더 떨어지는 성능으로 구현한다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기술을 모아서 서비스를 만드는 ‘SI(시스템 통합)’ 단계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게 김 원장이 파악한 한국 전자통신 기술 발달 역사다. 그는 “역공학으로 쌓은 실력이 새로운 스펙을 구현하는 단계로 갔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ETRI는 한때 한국의 전자통신 기술 발전의 주역을 맡았다. 하지만 지금은 기업이 워낙 잘 해 기존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게 김 원장 생각이다. ‘조연’은 그런 현황을 고려해 현재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이다.

 

김명준 ETRI 신임원장. 윤신영 기자
김명준 ETRI 신임원장. 윤신영 기자

김 원장은 “구체적인 기관 ‘역할과 책임(R&R)’ 등은 내부 구성권과의 논의를 거쳐 정할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그는 “업무보고를 받아 보니 칼을 잘 만들어 두었더라. 하지만 4차산업혁명 시대에 맞는지 의문이다”며 “다 용광로에 넣고 다시 만들어 ‘토르의 망치’ 같은 것을 만들라고 했다”고 말해 변화를 예고했다.

 

한국의 1세대 컴퓨터공학 전공자답게 ETRI를 소프트웨어 공학 중심 연구소로 탈바꿈시킬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ETRI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하드웨어 엔지니어, 소재 연구자 등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만큼 특정 분야 기술에 집중하기보다는 모두가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부정의 뜻을 보였다.


김 원장은 최근 연구원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이유는 역할의 변화다. 지난 정부부터 지금까지 ‘기초원천연구 강화, 사회문제 해결, 중소기업 활성화’ 등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장으로서 김 원장도 그 역할에 적극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평가 기준이 ‘네이처, 사이언스, 셀 논문 게재’ 등으로 구체화되면서 현장에서 달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후문이다. 연구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기초연구와 문제해결형 기술 연구를 평가하기도 난감하다.

 

김 원장은 “실용적인 문제해결형 기술 연구자는 특허로 평가하고 기술료를 받거나 투자를 유치하게 하고, 기초연구자는 논문으로 평가하게 하는 등 평가 시스템을 바꾸고 재원을 달리 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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