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왜 이럴까?] 비합리적인 생각에도 합리적인 이유 있다

2019.03.31 06:00
합리적인 판단은 종종 ‘합리적’인 결과를 낳지 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합리적인 판단은 종종 ‘합리적’인 결과를 낳지 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늦지 않게 주간 업무 계획서 부탁’.


부장님이 보낸 업무 이메일. 간단한 업무입니다만, 좀 수상합니다. 왜 이런 메일을 굳이 보낸 것일까요? 아무래도 부장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깔보는 마음으로 ‘너는 이런 수준의 일이나 해라’라며 메일을 보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회의에 나를 부르지 않은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휴가 기간이었지만 그래도 언제부터 부하 직원 휴가 기간을 신경 썼다고…나쁜 자식. 


답답한 마음이 들어 회사 밖을 잠시 나옵니다. 샌드위치처럼 앞뒤로 패널을 붙인 남자가 목청 높여 외칩니다. 종말이 가까웠다는군요. 외계인이 자신을 납치했다든가 비밀 정부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이야기를 떠드는 뭔가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정부에서는 저런 사람은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세상 모든 일을 다 의심하는 사람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한심한 작자들. 그때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아니 어떻게 내가 나온 것을 안 걸까요. 나를 감시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니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면서 내가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것이죠.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오늘 한바탕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요? 부장은 몹시 나쁜 사람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주변 사람을 착취하는 부류의 인간입니다. 지난주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부서원이 싫어하는 회식을 억지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거야말로 갑질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습니다. 아. 바쁜 일이 있다는 막내는 그냥 집에 갔네요. 사회생활도 모르는 이기적인 철부지 같으니. 게다가 물러터진 부장은 허허 웃으면서 다음 기회에 보자고 합니다. 아이고 정말.


그런데 옆 부서의 부장은 얼마나 멋진지 모릅니다. 카리스마가 넘쳐서 한번 결정을 내리면 부서원이 일사불란하게 따릅니다. 예를 들어 업무 외 회식을 해도 다들 참석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하지만 회식에 오지 못한다는 부서원에게 너그럽게 양해를 해줍니다. 아, 훌륭한 선배. 당장이라도 옆 부서로 바꾸고 싶습니다. 
   
한쪽만 보는 인간


우리는 모두 한쪽을 봅니다. 편견에 사로잡혀 굴절된 렌즈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타인의 의도를 의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매도하고 비난합니다. 터무니없는 괴짜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판단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혼자 살아가는 자신을 위로하듯,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외칩니다. 


아마 편협한 이성이야말로 불행의 근원인지도 모릅니다. 감정과 이성은 쌍두마차를 이루며 우리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감정은 자전거의 뒤 바퀴, 이성은 자전거의 앞바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페달을 너무 심하게 밟아도 위험하지만 사실 더 위험한 것은 앞 바퀴의 방향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정은 뇌의 깊은 곳에서 시작합니다. 강력하고 원초적이죠. 그러나 성난 야수와 같은 감정을 잠재우는 조련사가 있는데, 바로 전전두엽입니다. 이마에 있는 뇌죠. 합리적 판단과 사회적 관계를 조율합니다. 고차원적 사고를 하고 계획을 세우고 의사를 결정합니다. 복잡한 윤리적 판단과 공감 능력, 도덕적 행동도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전두엽 중에서 특히 전전두엽은 이성적인 판단을 관장하는 기능이 있다. 위키미디어
전두엽 중에서 특히 전전두엽은 이성적인 판단을 관장하는 기능이 있다. 위키미디어

이성과 의심


의심은 이성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입니다. 타인의 의도를 판단하고 전체 상황이 돌아가는 형세를 짐작하는 능력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의심이 과하면 무의미한 말이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자연스러운 세상의 흐름에 어떤 숨겨진 질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심코 보낸 업무 메일은 자신을 괴롭히려는 직장 내 갑질이 됩니다. 상대의 말과 태도, 표정은 모두 나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급기야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는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비밀 정부의 메시지로 읽히게 됩니다. 


이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작동합니다. 냉정한 판단으로 이득과 손해를 따지고 어떤 행동이 도움이 되는지 판단합니다. 이리에 밝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리 분별이 과하면 우리는 정이 없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 자신만 아는 사람이라고 하죠. 어느 정도 선을 넘으면 심지어 사이코패스라는 진단을 붙입니다.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이익만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데, 과연 누가 나쁘고 누가 좋은 사람인가요? 게다가 진짜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이 좋은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종종 사이코패스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이 시대의 위인, 지상의 천사’라는 타이틀을 강탈합니다. 대중의 칭찬이 돈과 권력으로 환전되는 세상에서 사이코패스가 이를 놓칠 리 없습니다. 


어차피 이런 세상이라면 나도 질 수 없습니다. 앞으로 내 이익만 우선 챙기겠다고 결심합니다(사실 이미 너무나도 그렇게 살고 있었지만 뭐 따지지 말죠). 그런데 이성 동료 한 명이 연락합니다. 영화를 보여달라고 하네요. 미쳤습니까? 영화표가 얼만데. 딱 잘라 거절합니다. 그러자 그럼 자신이 영화표를 살 테니 대신 커피를 사라고 합니다. 아니 제정신이 아니네요. 커피 한 잔의 원가는 고작 몇 백원. 다국적 음료 회사의 배를 불려주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커피 믹스를 사가겠다고 했습니다. 동료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냥 관두자고 합니다. 다행입니다. 커피 믹스도 공짜는 아니니까요. 근데 뭔가 마음이 시립니다. 왠지 기회를 놓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냥 기분이겠죠? 

 

인간의 이성은 아주 편협합니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내적 평가와 세상에 대한 외적 평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측을 종합하여 판단을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상태나 세상에 대한 평가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예측은 일단 틀릴 것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고 핸들을 놓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길을 몰라도 일단 길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마음속 나침반을 보면서 더듬더듬 가야 할 길을 고민하고 결정합니다. 아예 핸들을 놓아버리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입니다. 


마음속 나침반은 정확한 자북을 가르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오차가 조금 더 심합니다. 과도한 자기애에 빠져 세상은 자신의 거울처럼 여기는 사람, 세계를 바꾸겠다는 숭고한 이상(혹은 허황된 망상)을 가진 사람, 이성과 제대로 사귀지 못하며 전전긍긍하는 사람,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꼬치꼬치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소위 ‘비정상’적인 사람이죠. 그런데 과연 비정상이란 무엇일까요? 부장님의 업무 지시는 의심해도 되지만, 세상이 멸망한다는 의심의 수준에 이르지 않는 중용의 덕을 가져야 할까요. 정신장애의 수많은 증상 중에서 소위 ‘질병징후적’ 증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정신장애에서만 나타나고 소위 ‘일반인’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증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국장. 앞 면은 흔히 보았을 것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열세 개의 주와 흰머리 독수리. 그리고 ‘여럿에서 하나로(E pluribus unum)’이라는 라틴어 표어가 쓰여있다. 뒷면도 역시 열 세개의 주를 상징하는 13단의 피라미드와 미국이 독립한 1776(MDCCLXXVI)년에서 새로운 시대의 질서(Novus Ordo Seclorum)라는 표어가 적혀 있다. 하지만 피라미드와 눈, 그리고 표어의 의미는 종종 과도한 상상을 낳아 전세계를 지배하는 단일 정부, 즉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가 있다는 음모론으로 발전했다.
미국의 국장. 앞 면은 흔히 보았을 것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열세 개의 주와 흰머리 독수리. 그리고 ‘여럿에서 하나로(E pluribus unum)’이라는 라틴어 표어가 쓰여있다. 뒷면도 역시 열 세개의 주를 상징하는 13단의 피라미드와 미국이 독립한 1776(MDCCLXXVI)년에서 새로운 시대의 질서(Novus Ordo Seclorum)라는 표어가 적혀 있다. 하지만 피라미드와 눈, 그리고 표어의 의미는 종종 과도한 상상을 낳아 전세계를 지배하는 단일 정부, 즉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가 있다는 음모론으로 발전했다.

‘정상’적인 환청


친구에게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이야기해보세요. 아마 친구의 표정이 싹 바뀌면서 조심스럽게 진료를 권할 것입니다. 그러나 환청은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겪는 증상입니다. 아마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이나 잠에서 막 깰 때 이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혹시 지금 나 깨웠어?’라며 눈을 비비고 일어나지만 사실 아무도 깨운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경험합니다. 폭발성 머리 증후군(EHS)라는 공상과학 소설에 등장할 것 같은 증상도 있는데, 잠을 자거나 깰 때 머리에서 아주 큰 소음이 들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쯤 되면 병원에 가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하지만 대개는 치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환청이라고 하면 아주 무시무시한 정신장애를 생각하지만 사실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 현상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면서도 ‘속으로 소리 내 읽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도 그렇습니다. 여자 주인공의 대사는 여자 목소리로,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는 남자 목소리로 ‘들립니다’. 소설이 흥미진진할수록 그런 경향은 더 심해집니다. 몹시 피곤하면 환청이 더 잘 들립니다. 일부 약물도 그런 증상이 더 잘 일어나게 합니다. 
  
‘합리’적인 망상


환청뿐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상상과 터무니없는 망상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많은 학생이 명문대에 입학하겠다고 결심하지만, 대부분은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장담해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과대망상은 집어치우라고 해야 할까요? 산불 감시원은 도무지 일어나지도 않는 산불을 감시하겠다고 푸른 산을 매일 쳐다봅니다. 24시간 레이다로 국경을 감시하는 군인은 전쟁 망상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수십 년간 일어나지도 않았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면서 의심하고 또 의심하니 말입니다. 


망상은 사실 인간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하늘을 나는 마차와 물속을 다니는 배, 지구 반대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자, 사람이 타고 달나라에 가는 대포알이나 몸 안에 심는 강철 관절. 모두 터무니없는 망상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입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점점 친해지다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평생 같이 살아갑니다. 전에는 얼굴도 모르던 사람입니다. 도무지 있을까 싶은 이런 일이 세상에는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물론 대부분의 ‘망상’은 이런 과대한 혹은 낭만적인 상상이 아닙니다. 부정적이고 무서운 상상이 더 흔합니다. 의심과 두려움입니다. 타인의 의도를 의심하고 파국적인 미래를 걱정하고 굶주림과 질병, 전쟁,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런 걱정은 인류 역사에서 ‘항상’ 실현되는, 있을 법한 미래였습니다. 신석기 초기 조상 열 명 중 네 명은 부족 간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불과 백 년 전 스페인 독감으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전 세계가 둘로 나뉘어 죽을 때까지 싸운 일도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서 2등 시민으로 살았던 것이 불과 부모님 세대입니다. 해방되자마자 곧 600만 명이 죽고 다쳤습니다. 인구가 3000만 명일 때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일상에서도 항상 일어납니다. 아침 뉴스에서 ‘간밤의 사건·사고’를 볼까요? 멀쩡하게 길을 가다가 강도를 당하고, 집에서 잠을 자다가 칼에 찔립니다.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속이는 어눌한 목소리의 사기꾼이 오늘도 열심히 여기저기 전화를 합니다. 아드님이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오백만 원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무료 백신 프로그램으로 위장하여 컴퓨터를 못 쓰게 만드는 바이러스를 퍼트립니다. 이쯤 되면 타인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합리적인 상상과 터무니없는 망상의 경계는 불분명합니다. 실현되면 예언이고 일어나지 않으면 망상입니다. 1591년 왜에 통신사로 다녀온 황윤길은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했지만, 괜히 민심을 동요케 하는 말이라며 묵살당했습니다. 그의 말이 현명한 예언이 된 것은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백 년 간 없었던 전쟁이 갑자기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인지 모릅니다. 황윤길과 같이 통신사로 다녀온 김성일의 의견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합리적인 판단은 종종 ‘합리적’인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에필로그 


삶의 불행은 종종 이성의 ‘불합리성’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과 등가의 불행은 바로 이성의 ‘합리성’ 때문에 일어납니다.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나쁜’ 사람들, 장밋빛 비전을 제시하며 카리스마와 선동의 경계를 걷는 사람들, 어디서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타인을 들러리로 만드는 사람들,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를 오르고 아마존을 탐험하는 사람들. 이들의 삶은 종종 ‘이상’해 보이지만,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성 자체보다는 생존을 위해 살아야만 했던 우리의 과거 잔재인지도 모릅니다. 비합리적인 생각에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합리적인 결정에도 반드시 비합리적인 면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은 긴 진화의 세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인간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때문이야》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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