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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국내 작전 때 필요한 한글암호, 개발 한달 만에 “임무 완료”

2019년 03월 02일 03:00
 
이미지 확대하기김우전 전 광복회장이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광복군 정복을 입고 촬영한 사진. 오른쪽은 김 선생 자택에 걸린 백범 김구 선생의 기요비서(비밀 수행비서) 임명장. 김 선생은 1948년 남북 협상을 위해 백범과 북에 동행하기도 했다. 김동제 제공/박연수 기자
김우전 전 광복회장이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광복군 정복을 입고 촬영한 사진. 오른쪽은 김 선생 자택에 걸린 백범 김구 선생의 기요비서(비밀 수행비서) 임명장. 김 선생은 1948년 남북 협상을 위해 백범과 북에 동행하기도 했다. 김동제 제공/박연수 기자

“자유는 매우 소중한 가치예요. 그 가치를 지금의 후손들에게 선물하려고 노력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가 누군가의 형, 누나, 오빠, 언니였습니다. 그들의 노력을 잘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달 16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택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김우전 선생. 병상에서 가족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어렵게 의사소통을 하면서도 ‘자유’를 말할 때에는 또렷한 목소리로 힘주어 당부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소회를 물으니 다시 한번 ‘자유’와 ‘기억’을 강조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 선생은 인터뷰 나흘 후인 20일 향년 98세로 타계했다. 본보와의 자택 인터뷰가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그는 광복군으로 활약하며 미군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했던 인물로, 광복군의 무전통신을 위한 한글 암호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의 비밀 수행비서(기요비서)로도 활동하며 중요한 기밀문서를 국내 애국지사에게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기도 했다. 광복 뒤에는 김구 선생의 개인비서를 지냈고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광복회장 등을 맡아 독립운동가의 삶을 세상에 알리는 데도 앞장섰다.

 

●광복군 암호의 탄생 

 

1922년 평북 정주 출신인 선생은 일본 리쓰메이칸(立命館)대 법학과에 다니던 중 재일학생민족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조선민족 고유문화유지계몽단’에 가입했다. 1944년 1월 일본군에 징병돼 중국으로 파병됐지만 같은 해 5월 말 부대를 탈출해 한국광복군에 들어갔다.

 

이후 10월까지 한국광복군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제3지대에 배치 받아 국내 진공을 준비했다. 당시 미 육군 전략정보처(OSS·미 중앙정보국의 전신)는 일본이 머지않아 패망할 것으로 보고 1945년 3월 한반도 진입작전을 계획하고 중국에서 광복군을 선발해 특수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를 다른 독립운동가와 또 다른 존재로 만든 독특한 업적이 탄생했다. 바로 한글 암호인 W-K(우전킴) 암호를 만든 것이다. 한국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한반도에 진입해 일본군과 싸울 때 서로 통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암호였다. 그는 “당시 부대에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기 때문에 그 임무가 떨어졌다”면서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명령으로 1개월 만에 암호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선생은 “당시 미군 측은 암호 제작 전에 ‘미군을 위해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불쑥 내밀었다”고 회상했다. 상하관계를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돈을 받기 위해 광복군에 온 게 아니라 조국 독립을 위해 온 것이고 암호 제작은 그 일환”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이후 미군은 그를 ‘김 장군’이라 부르며 깍듯이 예우해줬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애국 열사들이 점조직 형태로 활동하며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를 위해 다양한 한글 암호가 개발됐고 실전에 활용됐다. 암호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한글의 자모를 해체한 뒤 이를 아라비아숫자나 기호 등으로 대체한 암호다. ‘ㄱ’이 1, ‘ㄴ’이 2가 되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자모를 해체한 뒤 이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순서를 바꿔 알아볼 수 없게 하는 암호다. ‘ㄱ’을 ‘ㅂ’으로, ‘ㄹ’을 ‘ㄱ’으로 대체하는 식이다. 예를 들면 ‘대한사람’을 ‘매찻아갈’로 바꿔서 규칙을 모르면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김 선생의 암호는 전자를 택했다. 그에게 암호의 원리를 묻자 70여 년 전의 일임에도 막힘이 없었다. 그는 “모든 글자를 네 자리로 바꾼 게 기본 원리”라며 “한글의 자음과 모음, 받침을 구분해 자음과 모음을 2자리 숫자로, 받침은 00을 앞에 붙여 네 자리 숫자로 표시했다. 알파벳과 숫자도 네 자리의 숫자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이미지 확대하기W-K 한글암호 표.
W-K 한글암호 표.

그가 만든 한글 암호표를 보면 자음은 11부터 24의 숫자로, 쌍자음은 25~29로, 모음은 30~39로, 복합모음은 40~49로 대체된다. 받침은 0011부터 0034까지의 숫자를 썼다. 숫자와 알파벳도 0051부터 0136까지의 수로 변환된다. 선생은 “전파를 이용한 무전통신용 암호였으며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전달할 수 있었다. 모든 숫자를 붙여 쓰기 때문에 상당히 길지만 무조건 네 자리로 끊어 읽으면 돼 헷갈릴 염려가 없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김’은 W-K 한글암호로 ‘11390015’가 된다. ‘ㄱ’은 11, ‘ㅣ’는 39, 받침 ‘ㅁ’은 0015다. 그의 암호는 단지 글자만 표시하는 게 아니라 ‘기다리시오(7731)’, ‘매우 긴급(7750)’, ‘지금 분주하다(7716)’ 등 자주 쓰는 표현을 교환신호로 만들어 포함시켰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암호를 연구한 책 ‘한국 독립운동과 암호’에 따르면 이렇게 숫자를 이용해 한글을 ‘감추는’ 암호는 한반도에 3·1운동이 번져가던 1919년 3월 처음 일제에 알려졌다. 중국 하얼빈에서 발견된 한 장의 문건에 한글의 자음과 모음, 숫자, 방위가 각각 아라비아숫자나 점, 선, 원 등의 기호와 짝지어 있었던 것이다. 암호 해독법이 담긴 ‘암호부’였다.

 

이후 이런 암호들은 조금씩 ‘문법’을 바꿔가며 꾸준히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일제강점기 암호를 연구한 이은영 성균관대 한문학과 초빙교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 3.1운동에 쓰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에 발각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암호는 점점 복잡해졌다. 1945년 개발된 김 선생의 W-K 암호는 그 정점이었다.

 

이미지 확대하기W-K 한글암호 사용 사례. 대한독립만세를 변환했다.
W-K 한글암호 사용 사례. 대한독립만세를 변환했다. 이은영, ‘한국 독립운동과 암호’ 참고

 

●“누구나 독립운동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렵사리 만든 W-K 암호는 결국 쓰이지 못했다. 작전 준비가 한창이던 1945년 8월 일본이 갑자기 항복해버린 것이다. 그는 “당시 광복군은 반격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 힘으로 독립을 얻지 못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이 암호는 비밀에 부쳐져 미국 국가기록원(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전신)에 소장돼 오다 1988년 비밀이 해제돼 세상에 알려졌다. 선생은 “그전까지는 내가 암호를 만들었다는 말을 사람들이 믿지 못하다가 봉인이 해제되자 비로소 알게 됐다”며 웃었다.

 

그의 암호는 온전히 그의 작품이다. 일각에서는 W-K암호에서 K는 선생의 성(김)에서, W는 당시 한글 암호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미 공군 대위 클래런스 윔스의 성 ‘윔스’에서 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생은 “내 이름 가운데 글자 ‘Woo’에서 딴 게 맞다. 윔스 대위는 암호가 거의 완성됐을 때 왔다”고 내막을 설명했다.

 

이미지 확대하기타계 나흘 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김우전 전 광복회장. 박연수 기자
타계 나흘 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김우전 전 광복회장. 박연수 기자

선생의 자택에는 김구 주석이 그를 비서로 임명한 ‘기요비서(비밀 수행비서) 임명장’이 걸려 있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애국지사와 연락을 담당했고, 광복 뒤에도 개인비서로 일했다”며 “1948년에는 통일과 관련한 임무를 맡아 남북 협상을 할 때도 함께 갔다”고 했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그의 삶에 큰 흔적을 남겼던 듯하다. 1998년 나온 그의 자서전 제목도 ‘김구 선생의 삶을 따라서’다.

 

선생은 “독립운동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역사를 그냥 단순히 문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단지 글로만 읽을 게 아니라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심정을 같이 헤아려 달라는 얘기였다.

 

그는 또 “자꾸 나서서 과거를 말해야 한다”며 “그게 내가 분명하지 않은 발음으로 기자에게 긴 시간 설명하는 이유”라고도 했다. 그는 독립운동이 먼 과거의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선생은 “열심히 하면 자신도 독립운동가가 될 수 있다. 그래야 탈출할 생각이 나온다. 구속은 괴로운 일 아닌가. (누구라도) 하루라도 빨리 자유스러운 몸이 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인간으로서의 자유,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의 소중함을 알아 달라는 까마득한 후배에 대한 가르침으로 들렸다.

 

인터뷰 나흘 뒤 선생의 타계 소식이 들렸다. 인터뷰 때만 해도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질문 하나하나에 대해 답을 했던 선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생의 아들 김동제 씨는 “아버님은 마지막 인터뷰에서 어린이 등 젊은 세대를 언급하며 독립운동을 알리고 자유의 중요성을 알리셨다”며 “독립운동을 알리는 데 늘 적극적인 분이셨지만 마지막 인터뷰는 특히 놀랍고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윤신영 기자·박연수 기자 yeon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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