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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의 과학카페]홍역은 어떻게 면역 기억상실을 일으킬까

2019년 01월 29일 11:00

홍역은 역사상 다른 어떤 질병보다도 많은 아이를 죽였다. - 율라 비스, ‘면역에 관하여’에서

 

우리가 별 생각없이 쓰는 관용어를 들여다보면 과거 우리 조상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홍역을 치르다’는 표현도 그런 예로, 국어사전을 보면 ‘몹시 애를 먹거나 어려운 일을 겪다’라는 뜻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중병을 앓는 게 힘든 일이므로 이런 은유적 표현이 나온 것 같은데, 그 많은 질병 가운데 하필 홍역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홍역백신이 있고 의료인프라가 잘 갖춰진 환경에서 사는 오늘날 한국인의 입장이다. 홍역에 걸릴 일이 없고 만에 하나 걸려도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과 두 세대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는 아이가 태어나도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부모들이 많았는데, ‘홍역을 치르다’ 사망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확대하기홍역백신 개발 및 보급은 현대 보건학의 위대한 승리로 불과 수십 년 만에 매년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수만 명 수준으로 낮췄다. 오늘날 홍역백신 접종률(위)과 홍역으로 인한 사망률(아래. 빨간색이 짙을수록 높다) 지도로 반비례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홍역백신 개발 및 보급은 현대 보건학의 위대한 승리로 불과 수십 년 만에 매년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수만 명 수준으로 낮췄다. 오늘날 홍역백신 접종률(위)과 홍역으로 인한 사망률(아래. 빨간색이 짙을수록 높다) 지도로 반비례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다행히 1960년대 홍역백신이 개발되면서 상황은 급변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까지 아프리카를 제외한 지역에서 홍역을 퇴치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뿐 아니라 아시아, 남미의 여러 나라들에서 여전히 백신 접종률이 집단면역을 갖는데는 못 미친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매년 홍역으로 8만5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고 있다.

 

1월 27일 현재 40명 보고

 

집단면역(herd immunity)이란 어떤 인구집단에서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백신을 접종해 한 사람이 감염되더라도 병원체가 면역력이 없는 사람에게 옮겨가지 못해 전염병이 퍼지지 못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집단면역이 형성된 곳에서는 백신을 맞지 않아도 ‘무임승차’를 할 수 있다.

 

그런데 홍역은 전염성이 워낙 높아 집단면역에 이르는 문턱이 높다. 우리나라는 홍역백신 접종률이 90%를 넘는다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집단면역을 확보한 상태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홍역 환자가 속출하고 있는데(27일 현재 40명), 해외여행을 갔다가 옮은 사람들이 출발점으로 보인다. 아직 공식발표가 없어 확언할 수는 없지만, 감염된 사람들 대다수는 아마도 홍역백신을 맞지 않아 면역력이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지금처럼 환자가 발생했을 때 바로 격리하는 체계가 가동되지 않는다면 독감 수준까지는 아니겠지만 홍역이 꽤 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의료인프라가 잘 갖춰진 오늘날 설사 홍역에 걸리더라도 독감처럼 한 일주일 고생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고 사실 환자 대다수는 그렇다. 그러나 운이 없으면 독감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듯이 홍역 역시 위험성이 만만치 않다.

 

의도적으로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꽤 되는 유럽의 경우 2017년 발생 건수가 평년의 네 배로 급증해 2만1315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35명이 사망했다. 사망률이 ‘불과’ 0.2%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라고 볼 때 적은 숫자가 아니다. 게다가 ‘통계적으로’ 보면 비슷한 수의 사람이 홍역이 나은 뒤 2~3년 내에 추가로 사망할 수 있다. 홍역 후유증인 ‘면역 기억상실(immune amnesia)’이라는 현상 때문이다.

 

주로 면역세포 이용해 증식

 

홍역은 역사가 유구한 질병이고 백신이 나온 지도 50년이 넘었지만 2011년에야 정확한 발병 및 전파 메커니즘이 밝혀졌다. 홍역은 독감처럼 호흡기를 통해 전파되지만, 실제 인체에서는 주로 면역세포가 감염된다. 홍역바이러스는 몇몇 면역세포 표면에 있는 CD150이라는 단백질을 인식해 세포 안으로 침투해 증식한다.

 

이미지 확대하기홍역바이러스의 전파 메커니즘은 2011년에야 밝혀졌다. 즉 숙주에 침투해 면역세포(lymphocyte)를 타고 림프관을 돌아다니던 바이러스가 기관(trachea)의 상피세포 표면의 넥틴-4(nectin-4)를 인식해 침투한 뒤 증식해 세포 밖으로 나가 분비물에 섞여 퍼진다. ‘사이언스’ 제공
홍역바이러스의 전파 메커니즘은 2011년에야 밝혀졌다. 숙주에 침투해 면역세포(lymphocyte)를 타고 림프관을 돌아다니던 바이러스가 기관(trachea)의 상피세포 표면의 넥틴-4(nectin-4)를 인식해 침투한 뒤 증식해 세포 밖으로 나가 분비물에 섞여 퍼진다. ‘사이언스’ 제공

호흡기 주변에 서성이던 면역세포에 들어간 바이러스는 림프관을 타고 이동하고 림프절에서 다시 증식한 뒤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진다. 이 가운데 피부세포에 도달한 바이러스가 증식하면서 좁쌀 같은 발진이 피부를 뒤덮는다. ‘홍역(紅疫)’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한편 면역세포를 타고 림프관을 돌던 바이러스는 호흡기의 상피세포에 침투한다. 2011년 ‘네이처’에 발표된 논문은 이때 바이러스가 상피세포 표면의 넥틴-4(nectin-4) 단백질을 인식해 출입문을 연다는 사실을 밝혔다. 상피세포에 침투한 바이러스는 증식한 뒤 세포 밖으로 나와 숙주가 기침을 할 때 미세한 물(침)방울에 실려 공기 중으로 퍼진다.

 

2018년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는 홍역바이러스가 면역세포에 침투하는 게 결국은 면역 억제로 이어진다는 시나리오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로테르담의대 등 네덜란드의 공동연구자들은 2013년 네덜란드의 한 지역에서 발생한 홍역에 주목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한 프로테스탄트 종파가 모여 사는 지역에 홍역이 돌았다. 연구자들은 이 가운데 4~13세 어린이 확진 환자 23명을 대상으로 발진 전후에 혈액시료를 채취했다.

 

그 결과 대조군(홍역에 걸리지 않은 또래)에 비해 적응면역에 관여하는 T세포와 B세포의 수가 크게 줄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들 세포의 표면에는 CD150이 고밀도로 분포해 있어 홍역 바이러스의 집중 공격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

 

이와는 별도로 연구자들은 동일인에서 홍역을 앓기 전과 앓고 난 후의 면역세포 유형에 따른 수의 변화를 알아보기로 했다. 어차피 한동안 홍역이 돌 것이므로 아직 걸리지 않은 어린이 82명의 혈액을 채취했다. 유행이 지나간 뒤 조사한 결과 이 가운데 무려 77명이 홍역에 걸린 것으로 밝혀졌다(참고로 전체 홍역 환자는 2600여 명으로 집계됐다). 부모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34명은 증상이 약했고 43명은 심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혈액 채취 열흘 이내에 발병했거나 두 번째 혈액 채취 열흘 이내까지 낫지 않은 경우는 빼고(이미 또는 여전히 감염돼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나머지 42명을 대상으로 면역세포 수의 변화를 조사했다.

 

그 결과 홍역을 앓고 난 뒤에도 유독 기억B세포의 수가 여전히 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경향은 증상이 심각했던 그룹에서 더 두드러졌다. 기억B세포(memory B cell)는 병원체(항원)에 최초로 노출됐을 때 형성돼 혈액이나 림프액에 존재하는 세포다. 처음 감염돼 병을 일으킨 병원체가 그다음에는 힘을 쓰지 못하는 건 기억B세포가 즉각 대응해 항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미지 확대하기홍역을 앓고 나면 면역 기억상실이라는 현상 때문에 2~3년은 감염에 취약한 상태가 돼 사망 위험성이 높아진다. 의료인프라가 갖춰진 서구에서조차 홍역백신이 도입된 이후(회색 영역) 홍역으로 인한 사망자(점선)가 크게 줄었을 뿐 아니라 홍역 이외의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자(실선)도 절반 수준으로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이언스’ 제공
홍역을 앓고 나면 면역 기억상실이라는 현상 때문에 2~3년은 감염에 취약한 상태가 돼 사망 위험성이 높아진다. 의료인프라가 갖춰진 서구에서조차 홍역백신이 도입된 이후(회색 영역) 홍역으로 인한 사망자(점선)가 크게 줄었을 뿐 아니라 홍역 이외의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자(실선)도 절반 수준으로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이언스’ 제공

게다가 이렇게 줄어든 기억B세포 가운데 상당수가 홍역 바이러스를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다. 홍역은 한 번 걸리면 평생 면역이 되는 이유다. 결국 홍역에 걸리기 전까지 면역 반응을 통해 구축해 놓은 적응면역이 취약해지고(이를 다소 과장한 표현이 ‘면역 기억상실’이다) 회복되는데 2~3년은 걸린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평소 같으면 항체를 생성해 쉽게 무찌를 수 있는 익숙한 병원체에 또 당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유럽에서 자녀에게 백신 맞히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우려스러운 일로, 홍역이 아이들에게 심각한 질병이라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인다”며 “홍역의 발병과 이어지는 면역 억제에 대한 지식이 백신 접종이 꼭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미지 확대하기홍역을 앓고 난 뒤 나타나는 면역 억제(기억상실) 현상이 기억B세포의 감소(빨간색) 때문이라는 가설을 지지하는 동물(마카크원숭이)실험 결과가 2012년 나왔다. 반면 홍역바이러스에 대한 기억B세포는 지나치게 많다(녹색). 지난해 네덜란드의 연구자들은 홍역 환자를 대상으로 이런 메커니즘이 사람에서도 일어남을 확인했다. ‘PLOS 병원체’ 제공
홍역을 앓고 난 뒤 나타나는 면역 억제(기억상실) 현상이 기억B세포의 감소(빨간색) 때문이라는 가설을 지지하는 동물(마카크원숭이)실험 결과가 2012년 나왔다. 반면 홍역바이러스에 대한 기억B세포는 지나치게 많다(녹색). 지난해 네덜란드의 연구자들은 홍역 환자를 대상으로 이런 메커니즘이 사람에서도 일어남을 확인했다. ‘PLOS 병원체’ 제공

물론 위의 경우처럼 종교적인 이유로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경우는 과학 데이터를 갖고 아무리 설득해도 사실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자폐 연관성’처럼 이미 틀린 것으로 밝혀진 주장이나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또는 자본주의 음모(백신으로 돈벌이를 하는 제약회사와 의사들)에 맞서기 위해 또는 “자연에 맡겨야 한다”는 철학 때문에 자녀들에게 홍역백신을 맞히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의사결정권이 없는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를 직접 썼고,  번역서로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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