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에 내몰린 한국판 메이커스 운동의 성지 청계천

2019.01.08 19:50
8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청계천 관수교 사거리에서 열린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기자회견이 열렸다. 참가자들이 폐업한 업체의 간판을 그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8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청계천 관수교 사거리에서 열린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기자회견이 열렸다. 참가자들이 폐업한 업체의 간판을 그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청계천은 하나의 유기체와 같습니다. 서로 다른 여러 업종이 모여 제품을 완성하는 생태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전부 말라죽게 됩니다. 서울시가 생태계를 말살하고 있는 셈입니다.”

 

8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청계천 관수교 사거리 앞에 이 일대 상인과 장인, 예술가, 디자이너, 연구자 등 30여명이 모였다. 손에는 철거로 인해 문을 닫은 업체 간판을 그린 손팻말이 들려 있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로 불리는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세운상가 인근 공구 거리를 비롯한 서울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의 재개발을 멈추고 이 지역을 ‘제조산업문화특구’로 지정해달라"고 주장했다. 

 

세운상가 일대는 현재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현재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 중구 청계 2~4가 사이의 공구 거리는 2006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설정됐다. 해당 부지에는 2023년까지 재개발을 통해 주상복합 아파트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세운상가 옆 입정동 일대 세운 3-1, 3-4, 3-5 구역은 지난해 10월 26일 관리처분계획의 인가가 나며 이미 전면 철거에 들어갔다. 400여 명의 청계천 공구상가 상인과 장인들은 철거를 통보받은 지 1~2개월 만에 이사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보존연대 측에 따르면 10%이상의 상인들이 폐업을 결정했다. 보존연대 측은 “주변에서 빈 점포를 급히 찾다 보니 세운상가나 종로 쪽에는 4000만원에서 6000만원 정도의 권리금까지 생겼다”며 “서울시가 젠트리피케이션의 주범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상인들과 장인들은 청계천의 생태계를 지키고 미래를 위해 일대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성철 평안상사 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상인들과 장인들은 청계천의 생태계를 지키고 미래를 위해 일대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성철 평안상사 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이 지역 소상공인들은 세운재정비촉진지구를 해제하고 ‘제조산업문화특구’로 전환해 진정한 도시재생을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미 철거가 진행중인 재개발 구역의 상인들은 기부체납 용지에 공구상가 대체부지를 마련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청계천 옆 관수교 사거리에서 33일째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소상공인들은 청계천의 생태계를 지키고 미래를 위해 일대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계천 소상공인 생존권 사수 비상대책위원장인 강문원 두루통상 대표는 “청계천은 지난 70여 년 동안 공구의 메카로 자리 잡으며 상인들과 직인들이 생계를 유지해 온 곳”이라며 “다른 곳으로 가서 장사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생태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망하는 구조”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강 대표는 “청계천은 한국 산업의 초석이 된 곳”이라며 “이 거리를 문화유산으로 후대에 물려줘 미래 자손들에게 교육 자료로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60년간 대를 이어 공장을 운영한 김학률 신아주물 대표는 “쇳물의 냄새로, 색깔로 하나하나를 가지고 작업하는 장인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며 “다른 곳에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가지고 있는 기술 총동원해 해결하는 장인정신이 없으면 운영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여기서 나가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며 “기술전수를 해줄 수도 없어 60년 노하우가 단절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일주일 후 가게를 비워야 한다는 홍성철 평안상사 대표는 “좁은 길과 낙후된 골목도 잘 보존해 역사가 되어 오늘날 수많은 사람을 부르는 로마처럼 청계천도 자연스러운 리모델링을 한다면 서울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철거로 문을 닫은 청계천 공구거리. 이 지역이 속한 서울시 중구 입정동 일대 세운 3구역은 지난해 10월 26일 관리처분 계획 인가가 나며 전면 철거에 들어갔다. 철문이 굳게 닫힌 거리에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철거로 문을 닫은 청계천 공구거리. 이 지역이 속한 서울시 중구 입정동 일대 세운 3구역은 지난해 10월 26일 관리처분 계획 인가가 나며 전면 철거에 들어갔다. 철문이 굳게 닫힌 거리에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이 지역에 자리잡기 시작한 예술가와 메이커들도 반대 목소리를 냈다. 세운상가에 입주한 지 1년 반 된 3D 프린터 제작업체 ‘아나츠’의 이동엽 대표는 “새로운 제품의 도면을 주면 그대로 깎아주고, 이걸 들고 다음 업체로 가면 색을 입혀주고, 바로 옆으로 가면 포장까지 해준다”며 “스타트업 제조업체에는 천국과 같은 곳”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문화적 가치를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엔 산업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숨어있다”며 “40년 이상의 장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술은 독일과 유럽 미국 제조업 강국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데 제품 생산에 드는 비용은 10배 이상 저렴하다”고 말했다.

 

기획 및 전시 업체 ‘저스트 프로젝트’의 이영언 대표는 “10년 넘은 거래처가 다 문 닫고 나갔다”며 “디자이너나 제조를 기반으로 한 작가들이 작업할 곳이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3km 내에서 모든 걸 만들 수 있는 이 생태계가 없어지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며 “낙후되고 슬럼화된 2차 산업을 치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2차 산업 없이는 4차 산업혁명도 없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보존연대 측은 을지로 공구 거리 내 골목인 ‘을지유람길’을 행진했다. 이 길은 중구청에 요청하면 골목해설사가 해설을 나오는 관광길이다. 보존연대 측은 “앞으로도 매주 기자회견과 청계천 일대 보존에 관한 연구발표회를 진행할 것”이라며 재개발 반대 활동을 지속할 뜻을 밝혔다.

 

세운 3-4, 3-5 구역에 건설 예정인 주상복합 건물의 조감도 -한호건설 홈페이지 캡처
세운 3-4, 3-5 구역에 건설 예정인 주상복합 건물의 조감도 -한호건설 홈페이지 캡처

보존연대 측은 철거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동절기 철거를 금지한 서울시 조례를 어기고 11월과 12월에 지속적으로 편법 예비 철거를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5월 30일 서울시는 재건축·재개발 사업인가에 협의체를 통해서 관리처분 계획을 인가하도록 하고 동절기인12월~2월에는 강제철거를 금지하는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재개발 업체 측은 협의체를 제대로 구성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동절기 철거도 금지 규정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업체 측은 이 일대는 주거용지가 아니라 상업용지로 지정돼 있어 동절기에도 철거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보존연대 측은 이 지역은 메이커 운동과 4차 산업혁명의 기반이 될 곳이자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며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를 ‘지역 맞춤형’으로 되살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보존연대 측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도시 안에서 5만명 규모의 장인들과 상인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생산하고 판매하는 시장 구조 사례를 찾기가 힘들다”며 “정부는 메이커 운동 활성화로 혁신창업을 촉진하겠다는 정책을 펴놓고는 메이커 운동에 최적화된 장소를 해체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철거현장 가림막에 철거로 급작스럽게 가게를 옮긴 업체들이 이전안내문을 붙여놓았다. 보존연대 측은 철거지역 상인들 중 10%는 가게를 옮기지 못해 폐업했다고 밝혔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철거현장 가림막에 철거로 급작스럽게 가게를 옮긴 업체들이 이전안내문을 붙여놓았다. 보존연대 측은 철거지역 상인들 중 10%는 가게를 옮기지 못해 폐업했다고 밝혔다. 조승한 기자 shinj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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