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이 두려운 사람들

2013.09.09 18:00

 

 2010년 7월 경남 함안박물관에서는 700년 전 연꽃 씨앗이 발아해 꽃을 피웠다.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제공
2010년 7월 경남 함안박물관에서는 700년 전 연꽃 씨앗이 발아해 꽃을 피웠다.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제공

“뭐하세요?”
“사진정리.”
“어떤 건데요? 으악!”
“왜 그래?”
“무서워요…”
“뭐가?”
“연꽃이요. 저 구멍이 숭숭 뚫린 게…”
“이게 뭐가 무서워?”
“연꽃 무서워하는 사람들 많아요.”
“뭔 소리야…”


2010년 7월 경남 함안박물관은 700년 전 고려시대 연꽃 씨앗(엄밀히는 열매)이 발아해 꽃을 피웠다는 경사스런 소식을 알렸다. 당시 과학동아 기자였던 필자는 ‘기자가 아니면 언제 보러 가겠어’란 심정으로 1박2일 일정으로 취재를 가, 여관에서 선잠을 자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현장에서 연꽃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700년 된 씨앗이 꽃피운 연꽃은 향기도 우아했고 꽃잎의 분홍빛이 무척 신비로웠다. 당시 필자는 꽃잎 몇 장에서 테두리가 약간 일그러진 걸 보고 ‘오랜 세월 있다 보니 유전자에 결함이 생긴 결과인가’라고 근거없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취재해온 연꽃 사진을 정리하는 걸 후배 기자가 본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멍 여러 개가 숭숭 뚫려있는 이미지를 보면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이런 무서움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연꽃받침통이다. - 심리과학 제공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멍 여러 개가 숭숭 뚫려있는 이미지를 보면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이런 무서움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연꽃받침통이다. - 심리과학 제공

연꽃에서 무서운 건 하늘거리는 꽃잎이 아니라 꽃 가운데 있는 꽃받침통이다. 꼭 샤워꼭지처럼 생긴 연꽃의 꽃받침통은 구멍이 20여개 뚫려있는데 각 구멍에는 암술이 들어있다. 꽃을 찾은 벌의 수고로 수분이 되고 꽃잎이 떨어지면 꽃받침통만 남는데 구멍 안에 박혀있는 열매가 여물면서 색이 짙어지고 따라서 구멍은 눈에 더 잘 띤다. 이때 연꽃받침통의 모습이 가장 무서워보인다는 것. 아무튼 당시 필자는 후배의 반응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여성 10명 중 2명은 환공포증?


그런데 학술지 ‘심리과학’ 8월 27일자 온라인판에 희한한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Fear of Holes’ 즉 ‘구멍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말인데, 번역할 때 어색해서 복수형을 반영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구멍이 여러 개라는 게 중요한다. 즉 구멍이 하나 있을 때 무서운 게 아니라 여러 개가 몰려 있는 대상을 볼 때 느껴지는 두려움이라는 것.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연꽃이란다!


3년 전 후배 기자에게 건성으로 대한 걸 약간 미안해하면서 논문을 읽어봤다.


알고 보니 이런 두려움에 대한 용어도 있다. trypophobia로 번역어는 환(環)공포증이다. 작은 구멍 여러 개가 몰려 있는 이미지를 보면 무서움이나 혐오감이 느껴지는 현상이다. 영국 엑식스대 뇌과학센터 아놀드 윌큰스 교수는 인터넷에 환공포증에 대한 말이 많음에도 이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다는데 의아함을 느끼고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먼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환공포증을 보이는지 알아봤는데 놀랍게도 남자는 11%(91명 가운데 10명), 여자는 18%(195명에서 36명)가 연꽃받침통 이미지를 보면 “불편하거나 고통스럽다”고 답했다.


윌킨스 교수는 오래 전부터 자연이나 예술작품에서 거부감을 일으키는 이미지의 특징을 추출하는 연구를 해왔는데, 이에 따르면 밝기의 대조가 두드러진 패턴이 일정한 범위의 간격으로 반복될 때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환공포증도 이런 패턴과 관계가 있는지 알아봤다.


 먼저 환공포증 웹사이트(www.trypophobia.com)에서 환공포증을 일으킨다고 올려놓은 이미지 가운데 순서대로(편견을 배제하기 위해) 76개를 골랐다. (필자는 환공포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이트에서 이미지를 몇 개 보다보니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환공포증인 독자를 고려해 이들 이미지는 싣지 않았다. 궁금한 독자는 사이트를 방문해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이와 비교하기 위한 이미지로는 구글에서 ‘images of holes’이라는 검색어를 쳤을 때 뜨는 이미지에서 순서대로 76개를 뽑았다. 연구자들은 두 그룹의 이미지를 푸리에 변환 등 데이터 처리 기법을 써서 분석했고 그 결과 환공포증을 유발하는 이미지들 역시 밝기의 대조가 두드러진 패턴이 일정한 범위의 간격으로 반복된다는 걸 확인했다.


그렇다면 환공포증이 없는 사람들은 어떨까. 이런 사람들 20명을 대상으로 두 그룹의 이미지를 보고 -5(아주 불편함)에서 5(아주 편안함)까지 점수를 매기게 했더니 환공포증 유발 이미지는 -0.42, 대조군 이미지는 0.53으로 나왔다. 즉 환공포증인 사람뿐 아니라 그런 증상이 없는 사람들도 환공포증 유발 이미지를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필자가 사이트 이미지를 보고 비위가 상한 것도 그래서였을까.


●10대 유독 동물 명단을 살펴보니


환공포증인 사람들은 왜 연꽃처럼 전혀 해가 안 되는 대상의 특정 패턴만 보고도 두려움에 떠는 것일까. 연구자들은 환공포증인 사람들과 면담을 한 결과 이들이 푸른고리문어 같은 동물들도 두려워한다는 걸 발견했다. 푸른고리문어는 몸 표면에 50~60개의 선명한 푸른 고리 무늬가 있는데 맹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잘못 건드리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환공포증인 사람들이 역시 두려움을 느낀다는 푸른고리문어의 모습. 선명한 고리 수십 개가 몸을 덮고 있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처리하면 환공포증을 일으키는 이미지의 처리 결과와 비슷한 패턴이 나와 서로 관련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환공포증인 사람들이 역시 두려움을 느낀다는 푸른고리문어의 모습. 선명한 고리 수십 개가 몸을 덮고 있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처리하면 환공포증을 일으키는 이미지의 처리 결과와 비슷한 패턴이 나와 서로 관련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이 문어의 푸른고리 패턴과 연꽃받침통의 구멍 패턴이 뭔가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른 연구자들은 인터넷에서 ‘the 10 most poisonous animals(10대 유독 동물)’을 검색했다. 여기에는 푸른고리문어와 함께 상자해파리, 브라질방황거미, 데스스토커전갈, 인랜드타이펜(독사), 킹코브라(독사), 대리석원뿔달팽이, 독화살개구리, 복어, 스톤피쉬가 이름을 올렸다.


이들 동물의 이미지를 분석한 결과 예상대로 환공포증 유발 이미지와 비슷한 패턴이 나왔다.


 결국 환공포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위험한 동물이 갖는 시각적 특성을 공유하는 이미지에 대한 반응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환공포증은 구멍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우리 데이터는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한 가지 결정적인 특징이 특정한 시각 패턴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한편 환공포증은 보통 사람들도 그런 이미지에 반응하는 경향이 좀 더 과장돼 나타난 결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왜 어떤 사람은 환공포증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이유는 아직 모르고 있다. 사실 이건 다른 수많은 공포증도 마찬가지다.


 가던 길 앞에 비둘기가 날아와 내리면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을 가끔 보는데(대부분 여성들이었던 것 같다), 유난스럽다 싶다가도 진짜 무서워하는 것 같아 안 됐기도 하다. 이를 조류공포증(ornithophobia)이라고 부른다. 사실 필자도 공포증이 하나 있는데 바로 개공포증(cynophobia)이다. 혼자 길을 가다가 돌아다니는 개를 마주치면 겁이 덜컥 나는데, 개 덩치가 클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공포증은 진화상 유리한가?


이런 공포증은 이성으로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 상황에 마주치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게 특징이다. 그래도 요즘은 진화심리학자들이 이런 공포증을 좋게 해석해 약간 위안을 주기도 한다. 즉 상황을 좀 더 과장되게 인식함으로써 낮은 확률의 위험조차 피하게 하는 장치라는 것. 그럼에도 과유불급이라고 너무 겁이 없는 것도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하겠지만, 너무 겁이 많은 것도 결코 유리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0여 년 전쯤 어느 날, 앞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중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한 30미터 앞에 허연 진돗개 한 마리가 있는 게 아닌가. 녀석도 올라오다가 필자를 보고 멈춰선 것 같았다. 마침 커브길이라 개 뒤쪽 길이 보이지 않아 개주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한 10초를 대치하고 있는데 주인은 안 나타나고 진땀이 났다. ‘어떻게 하지…’ 고민을 하다 ‘다시 산을 올라가 (100미터 쯤 떨어져 있는) 정자로 일단 피신하자’고 결심하고 어깨를 돌리는 순간 갑자기 개가 필자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맹수 앞에서는 절대 등을 보이지 말라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기겁을 한 필자는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20미터, 10미터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으어어어어…”


필자의 입에서는 사람의 소리라고 할 수 없는 괴성이 튀어나왔고(공포에 질린 한 마리 짐승이었다!), 녀석이 거의 5미터 앞까지 육박했을 때 필자도 모르게 다시 몸을 돌렸다. 녀석도 놀랐는지 순간 멈췄는데 이때 어디선가 “아무개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방향을 보니 한 남자가 서 있다. 개도 그 사람을 보더니 꼬리를 흔들며 내려간다.


“이런 개를 목줄도 안 매고 풀어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개는 사람 안 물어요. 허허.”


‘이 사람이 지금 웃음이 나오나’라고 속으로 분개하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산을 내려왔다. 개주인이 추격전을 봤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필자가 개공포증이 없었다면 그때 그냥 내려오면서 “녀석 참 잘 생겼다!”라고 한 마디 했을 것이고, 개도 모른 척 지나갔을 것이다. 필자의 지나친 공포와 그에 따른 어설픈 행동이 개의 늑대 본능을 일깨운 건 아닐까.


아무튼 그 일 이후로 필자는 TV에서 자연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사냥 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맹수에게 쫓기는 초식동물의 절망적인 심정을 살 떨리게 체험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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