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과학자?...창 열면 풍기는 매화 향 과학으로 재현

2017.12.12 20:00

[피재호 단국대 분자생물학과 교수 인터뷰]

 

동짓날 즈음이면 옛 조상들이 즐겼던 재미난 풍습이 있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그림을 이용하는 풍습이다. 81송이 매화꽃이 그려진 그림을 준비한 뒤 동짓날부터 하루에 한 송이씩 붉은 색으로 칠해 나간다. 그림이 완성됐을 때 창문을 열면 겨울이 지난 뒤 매화가 피는 시기다. 구구소한도는 좋아하는 매화를 기다리는 옛 선비들의 낭만적인 놀이였다. 피재호 단국대 분자생물학과 교수는 매화를 즐겼던 전통 문화를 현대 사회에도 퍼뜨리고자 연구하는 과학자다. 매화 자원을 수집, 보존하고, 살아있는 매화에서 맡을 수 있는 매화 향을 과학적으로 재현했다. 12월 1일 단국대 죽전 캠퍼스에서 피 교수를 만나 그의 매화 이야기를 들어봤다.

 

꽃받침과 줄기가 녹색을 띄는 녹악매. - GIB 제공
꽃받침과 줄기가 녹색을 띄는 녹악매. - GIB 제공

 

● 살아있는 매화 나무에서 풍기는 매화 향을 제작

 

피 교수가 처음 매화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2006년. 고향인 경북 안동의 선산에 매화 나무 1000그루를 심은 것이 시작이었다. 쉽게 키울 수 있는 나무를 추천 받았고 묘목상은 매실 나무(매화 나무)를 추천했다. 문제는 그 다음. 1000그루나 심었지만 이 나무의 품종을 알 수가 없었다. 묘목상도 일본에서 들여온 청매(푸른 매실)가 열리는 나무라고만 설명했다. 그 뒤부터 피 교수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매화를 조사하고 다녔다.

 

“매화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까지 동아시아에서 널리 즐기는 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선비들이 사랑하던 꽃입니다. 창문을 열면 눈에 보이는 곳에 매화 나무를 심는 다거나, 이사를 다니면서도 빼놓지 않고 챙기던 나무였어요. 그런데 어느 샌가부터 매화는 잊혀지고 매실만 찾게 됐지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우리나라에는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은 멋진 매화 나무가 많다. 강릉 오죽헌에는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지정된 ‘율곡매’가 있다 수령은 600년이 넘었고, 사임당과 율곡이 가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유서깊은 나무다. 지난 여름 알쓸신잡이 찾은 순천 선암사에도 600년 된 매화가 있다. 피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600년 넘은 매화는 4주, 200년 령 이상은 67주, 100년 령은 150여 주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가치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율곡매 조차도 2007년에야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피 교수는 이 매화를 수집, 보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접붙이기 방식을 이용하면 유전자가 동일한 나무(후계목)를 만들 수 있어, 전국의 주요 매화 나무 자원을 모았다. 이들의 유전체 계통을 분석해 상호 관계를 알아내는 한편, 필요하다면 후계목을 분양할 방법도 고민 중이다.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 매화가 두 그루 있어요. 이 매화는 조선 왕궁에 심어졌던 나무입니다. 일본으로 갔다가 후계목으로 돌아왔지요. 지금은 매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도 언젠가는 제가 갖고 있는 후계목들이 필요한 순간이 올겁니다.”

 

동일한 나무는 아니더라도 나무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후계목이라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 있는 매화는 일명 ‘와룡매’다. 창덕궁 선정전 앞에 심었던 매화인데, 임진왜란 중인 1593년 다테 마사무네가 이 매화나무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전리품으로 가져갔던 매화 중 두 그루는 즈이간지라는 절에 심어졌는데, 1998년 즈이간지 주지가 사과의 의미로 후계목을 보냈다. 20년 된 나무지만 수백 년짜리 이야기를 담은 나무인 셈이다.

 

이미 해외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담은 나무로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는 영국에서 온 사과 나무가 있다. 그 유명한 ‘뉴턴 사과’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영감을 줬다는 그 사과 나무다. 접붙이기를 통해 후계목을 만들었고 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에 왔다.

 

피재호 단국대 분자생물학과 교수 - 오가희 기자 solea@donga.com 제공
피재호 단국대 분자생물학과 교수 - 오가희 기자 solea@donga.com 제공

 

● 매화 향을 사시사철 즐기는 방법

 

피 교수의 연구는 매화 자원을 수집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매화의 매력은 ‘은은하게 풍기는 향’이라는 점에 착안, 매화 향수를 제작했다.

 

일반적으로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향이 담겨있는 물체(주로 꽃)를 대량으로 모은 뒤 압착하거나 증류 방식 등을 이용해 원액을 뽑는다. 이 과정에서 성분 변형이 일어나거나 향이 농축되면서 자연 상태의 꽃과 다른 향이 난다. 이 때문에 피 교수는 전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창문을 열면 은은하게 풍겨와 선비들을 즐겁게 했던 그 매화 향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꽃에서 나오는 향 분자들을 포집해 성분을 분석했어요.”

 

이 과정에서 매화마다 모두 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꽃받침이 초록색인 녹악매와 적색인 백매, 붉은 색 꽃잎을 가진 홍매 등이 모두 다른 향을 가졌다. 분석한 성분을 토대로 조향사의 도움을 받아 매화 향수를 제작했다. 첫 매화 향수는 홍매를 선택했다. 첫 인상에서 톡 쏘는 듯 시원한 향을 풍기는 덕분에 일반인들에게 선호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든 향은 향수, 디퓨저 같은 형태로 제작해 일상 생활에서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앞으로는 향을 캡슐에 담아 물감 같은 곳에 응용하는 방법도 고민 중이다.

 

“전시회에서 구구소한도를 전시하고 방문객이 직접 칠하는 행사를 한 적이 있어요. 붉은 색 물감에 매화 향 분자가 들어있는 캡슐을 섞었지요. 물감을 칠하고 마른 뒤 물감 부분을 문지르면 캡슐이 터지면서 향이 나오는 겁니다. 매화가 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며 매화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거지요.”

 

구구소한도는 요즘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즐겨 그리는 소재다. 한국풍 일러스트를 즐겨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곰곰e’도 구구소한도를 모티브로 그린 일러스트를 지난달 29일 자신의 소셜 계정(http://www.grafolio.com/works/406430)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 현대적 일러스트와 그림이 어우러지면 멋진 작품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매난국죽, 사군자 향수와 선비향 제작 목표

 

2018년에는 매화 향을 응용해 새로운 향을 제작할 예정이다. 홍매를 이용해 향수를 제작했지만 피 교수가 정말 만들고 싶었던 향은 녹악매 향이다.

 

“녹악매는 추운 날씨에도 흰 꽃잎가 초록색 잎을 보여주기 때문에 옛 선비들이 가장 사랑한 매화였어요. 향도 선비를 닮았습니다. 강렬한 첫 인상은 없지만 은은한 중간 꽃향기가 오래 도록 남아요.”

 

피 교수는 녹악매 향에 먹 향을 추가한 ‘선비향’을 내놓을 계획이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코로는 매화 향을 즐기고, 눈으로는 매화를 보며 먹물로 그림을 그렸던 선비들의 일상을 향수에 담는 셈이다.

 

선비향과 함께 현재 판매 중인 사군자 향도 리뉴얼 한다. 매화 향은 향기 분자를 포집하면서 최대한 자연 매화향과 유사하게 재현했지만 난이나 국화, 대나무는 각 식물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조향사가 재해석한 작품이다. 피 교수는 “향이 좋아서 향수로 제작하면 좋을 것 같은 난을 선별해 뒀다”며 “2018년에는 난 향수와 국화 향수도 자연 꽃 향과 유사하도록 재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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