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곳 31] 빈소: 슬픔의 무게를 함께 드는 곳

2017년 11월 17일 19:10

최근 사흘 동안 매일 부고(訃告)를 받았다. 세 번째 부음은 두 번째 문상 중에 받아 웬일인가 싶었다. 노을빛 하늘로 날아가는 겨울 철새 떼가 떠올랐다. 선배 부친상이었던 그 부음은 발인 이틀 전 밤에 받았기에 문상할 수 있는 날은 다음 날뿐이었다. 하지만 그 빈소는 먼 지방에 차려졌고 다음 날은 오후 3시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긴 회의가 잡혀 있었기에 상주(喪主)에게 직접 인사할 수 없었다. 미안했지만 내게 동행을 제안한 친구에게 부의금을 부탁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정다운 친구와 동행했다면 오랜만에 고속버스 좌석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서로의 관심사나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주고받았겠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빈소에서 인생을 마감한 고인은 본인의 명복을 빌러, 상주를 위로하러 찾아오는 문상객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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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사람들은 부음을 듣고도 문상하는 일이 불편할 듯싶으면 모른 체하거나, 지인에게 부의금만 대신 부탁하거나, 복잡하지 않을 시간대에 빈소에 서둘러 다녀오곤 할 테다. 빈소까지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함께 문상할 만한 지인들과 시간이 안 맞아 혼자 문상하기가 뻘쭘해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테고, 혹시 불편한 사람들과 맞닥뜨릴지 몰라 지레 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 역시 어떤 부음을 받고는 빈소가 근교일 때는 혼자라도 잠시 짬을 내어 낮 시간에 다녀오곤 하는데, 보통은 저녁에는 다른 약속이나 일정이 있기 때문이지만, 나의 소심하고 까탈스러운 성격 때문에, 빈소에서 만날 법한 불편한 사람들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마음의 선택일 때도 있다.


그러고 보면, 고인이나 상주를 중심으로 연결된 사람들은 그 중심의 당사자와는 돈독하거나 인사를 빠뜨리지 않아야 하는 관계이겠지만, 문상객끼리는 서로가 아예 모르는 관계일 수는 있어도, 서로가 아는 사이라면, 상호간에 편한 관계일 수만은 없을 테다. 때로는 어느 쌍방의 당사자에게만 일어난 나름의 사연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고인이 안치된 슬픈 장소이자, 맞절로써 상주를 위로하고 조문을 고마워하는 정감 있는 빈소가, 살아 있는 어떤 사람들끼리는 서로가 불편한 자리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반가운 지인을 빈소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한다. 그런 날은 마치 고인이 떠나며 두 사람의 친분을 다시 단단히 묶어주기라도 한 듯이 마음이 더욱 살가워져 명함을 주고받거나 바뀐 전화번호를 저장하고는 밤늦도록 마주 앉아 빈 술잔을 채우며 상가가 잔칫집인 양 이야기꽃을 피우게 된다. 더욱이 호상(好喪)인 경우엔, 이야기꽃 향기를 맡은 상주가 문상객이 뜸한 틈을 타 함께 자리해 잠시나마 장례 중임을 망각한다. 그러다 보면 보통 때 같으면, “장례 잘 지내려면 기운 내야 하니 식사 거르지 마시라.”며 온정을 건네곤 했던 말과는 달리, 최근 둘째 날에 문상했던 선배 모친상에서는 상주에게 “이참에 며칠 굶어 번번이 실패했던 다이어트에 성공하세요.”라는 지나친 농담을 던지게 되기도 한다.

 

GI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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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빈소에서는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예전 같으면, 부모상을 당한 상주는 그 자체가 불효이기에 자책하며 장례 내내 말을 아껴야 했다. 오늘날의 통념은 다르기에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상주가 장례식장 바깥까지 나와 문상객을 배웅하는 것을 상서롭게 보지 않은 눈길들도 있으니 상주나 문상객은 자제해야겠다. 상주는 빈소를 떠날 때까지 그곳을 잘 지키고 있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문객은 아무리 호상일지라도 빈소에서 큰소리로 웃거나 떠드는 것은 큰 실례를 범하는 것이니 삼가야 할뿐더러 그곳에서 아무리 반가운 지인을 만났더라도 술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하면 안 된다. 빈소는 고인과 작별하며 명복을 비는 장소이지 결혼식의 피로연장이 아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발인 전날 점심 이후 낮 시간에는 조문을 피해야 한다. 입관(入棺) 시간과 겹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인에게 수의를 입혀드리고 입관하기까지 두 시간가량 걸리기에 조문을 하더라도 상주를 만날 수 없거니와, 문상객이 그 시간을 기다리더라도 그동안 고인의 가족은 이튿날 하관(下棺)할 때만큼이나 오열의 슬픔에 싸이기에 입관 절차를 마친 상주와 그 가족은 잠시나마 마음을 추스를 여유가 필요하다. 추모와 조문을 위해 일부러 걸음 하는 것이니 상주를 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인의 별세로 상주의 심신은 힘드니 상주를 위로하고 도와야 할 사람은 조문객뿐이다. 그래서 흔히 경사에는 불참하더라도 애사는 꼭 챙겨야 한다는 지당한 말이 있는 것이다. 기쁜 일은 함께하는 이가 많지 않아도 그 자체로 기쁘지만, 슬픈 일은 함께하는 이가 많을수록 견뎌내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편집자 주

[마음을 치는 시(詩)]와 [생활의 시선]에 연이어 윤병무 시인의 [때와 곳]을 연재합니다. 연재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과 장소’에 초점을 맞춘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은 오래되어 역사의 범주일 수도 있고, 개인 과거의 추억일 수도 있고, 당장 오늘일 수도 있고, 훗날의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는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이곳’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늘 일상의 공간에서 발 딛고 서 있는 희로애락이 출렁이는 삶의 현장입니다. 너무 익숙하거나 바빠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그 ‘곳’을 시인의 눈길과 마음의 손을 잡고 함께 가만히 동행해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의 구체적인 현지와 생생한 감수성을 잠시나마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으로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생활의 시선]을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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